겨울방학을 앞둔 고등학교 2학년의 어느 겨울날. 수업 대신 진행된 DVD 상영 도중 그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 정말로 울었다가는 모두의 주목을 받았을테니 겉으로는 꾹 참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그가 본 영화는 바로 톰 튀크베어 감독의 베스트셀러 원작 영화, '향수'였다. 그리고 그는 주인공에게 너무나, 정말 너무나도 깊이 공감했다.
'그래! 저거라고! 저거야! 냄새, 향! 저거라고!'
태어날 때부터 엄청나게 예민한 후각을 갖고 태어난 그. 그리고 그것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고통과 좌절이, 비록 허무맹랑한 영화 한 편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깊은 위로가 되었다.
"너 오줌 냄새나"
유치원생이던 그는, 유치원 버스 옆 자리에 앉아있던 6살 지민이에게 큰 소리로 난데없는 폭언을 던졌다. 당연히 통학버스 안은 또래 아이들의 웃음으로 가득찼고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었던 지민이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지민이는 등원 직후부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떼를 썼고, 결국 유치원까지 달려온 지민 엄마는 화가 나서 그의 엄마를 소환했다.
"아니, 세상에 애가 어? 아니 참, 어떻게 아무리 애는 애라지만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해요! 지민이가 정말로 오줌이라도 쌌으면 모르겠는데, 아니 그런 누명을 씌우면 애가, 이 작은 애가 얼마나 상처를 받겠냐구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사실 지민 엄마 입장에서 보아도 화가 날 법한 일이긴 하다. 정말로 지민이가 오줌을 싸서 놀림거리가 되었더라도 화가 났을 판인데, 오줌을 안 쌌는데 놀림거리가 되고 아이가 등원거부를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겠는가.
하지만 '그' 입장에서는 더더욱 억울한 일이었다. 그는 알았다. 분명히 지민이는 소변을 지렸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지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경험이 있듯이 속옷에 조금 덜 배출된 극미량의 오줌이 살짝 묻은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말이다. 그의 예민하디 예민한 코는 분명히 그것을 캐치했다.
물론 통원버스 안의 거의 모든 원아가 그런 '몇 방울'을 지리곤 한다. 심지어 운전석에서 운전하고 있는 아저씨마저 팬티 앞 동전만한 영역이 마지막 몇 방울에 침식당한 상태라 '그'에게는 이미 버스 안 전체가 지린내가 가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예쁘고 깨끗한 지민이마저 오줌을 지렸다는 사실에 큰 실망감을 느낀 것이었다.
"엄마가 다른 사람들한테 냄새로 뭐라고 하랬어, 하지 말랬어?"
"…"
엄마는 항상 그를 혼냈다. 후각에 엄청나게 예민한 아이는 곧잘 타인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했으니까. 자극적인 냄새에 관한한, 함께 키우던 개보다도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에 매번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는 그가 스스로 '재능'이나 '천재성'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피곤한 문제' 또는 '고쳐야 할 성격'이라고 받아들이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의 몇 배, 아니 몇 백, 몇 천, 아니 몇 만…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예민할 수도 있는 그런 초월적인 후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의 모든 만남과 인연에 자연스러운 장벽과 혐오를 쌓기에 충분했다.
불과 30초 전까지 불알을 긁었던 주제에 지금은 '그'의 팔뚝을 잡고 있는 경흠의 손.
생리 때문에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하는 아영.
일주일 째 같은 바지는 물론이요 양말마저 잘 갈아신지 않는 대휘.
툭하면 방귀를 내뿜는, 그러면서 매번 제일 먼저 "무슨 냄새 안나?" 하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재경.
오줌은 당연하고, 똥을 싸고도 손을 안 닦는 수많은 미친 놈들이 꽤나 있는 이 더러움의 전당, 교실.
모두가 모르기에 우습게 넘길 수 있는 불결.
그리고 그것을 혼자만 너무나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초감각.
모두의 얼굴에서 하나둘씩 곪아가는 여드름.
마치 전염병마냥 비슷한 시기에 일제히 터지는 같은 반 여자아이들의 생리.
운동이 끝나고 난 직후 모두의 몸에서 격렬하게 발산되는 가혹한 땀과 발냄새.
한여름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 하나가 엉덩이 골을 지나 깊은 곳으로 들어가버리는 순간의 역겨움 등.
'그'는 삶 자체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도저히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매 순간순간 구토와 싸워야만 했다.
그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러한 후각이 더욱 더 발달되어 간다는 사실이었다.
수염이 돋아나고, 어깨가 벌어지고 키가 성장하면서 그의 코는 어느새 '지금 이 순간'을 넘어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무뎌지지 않은 미숙한 남자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불행한 능력이었다.
"밥 먹었어?"
"응. 오빠는?"
"나도 먹었지. 누구랑 먹었어?"
"혜영이랑"
"아… 그렇구나"
여친 자희의 입에서 풍겨오는 베리오 치약 속 돈까스와 그 소스의 향기. 단무지와 양배추의 냄새. 그리고 아마도 상대가 주문했을 제육볶음의 희미한 냄새. 아마도 한 두점 정도 집어먹은 느낌. 그리고 그녀의 옷에서 느껴지는 다른 남자들의 향수. 흔한 싸구려 향수와 그리드 향수, 그 와중에 희미하면서도 존재감을 분명히 하는 젠할리곤스 엔디뷔온의 향, 주르오스의 향, 비샤 보이 등등등등.
아마도 같은 수업을 들었을 그 누군가들의 냄새들. 그러나 그 많은 향의 폭포 속에서도 혜영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뭐지. 왜 자희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참, 내가 말했나? 나 어제 네일했어. 이쁘지?"
네일아트를 했다면서 손을 내미는 순간, 자희의 손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진한 남자 싸구려 향수의 냄새. 다시 기억을 되짚어본다. 제육볶음의 기억 어딘가에 아주 희미하지만 비슷하게 스쳐 지나간 그 냄새.
"응 이쁘네. 잘 어울린다. 와 이렇게 디테일하게도 가능하구나"
확신은 어렵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는 판단을 흐리듯, 지나치게 좋은 후각이 때로는 방해가 된다. 이 싸구려 향수를 쓰는 놈이 학생식당 근처 어딘가에 앉았던 놈의 냄새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향수 냄새가 왜 자희의 손에서 나는데? 그는 손톱의 그림을 자세히 보는 척 하면서 코를 손 가까이 하고 그 향수 냄새에 집중하며 냄새를 깊게 들이마셔본다.
자희의 손바닥에 싸구려 향수 속 향기 분자의 지도가 그려진다. 자희의 왼손 새끼손가락 주변부터 손날 언저리, 그리고 약지 손가락까지 향이 덮고 있다.
문득 '그'는 그 모양에 대해 '시작하는 연인들의 터치'라는 시적인 이름을 붙여주고 충동을 느낀다. 손을 잡을까 말까, 잡아도 될까 망설이며 주춤대다 새끼손가락부터 슬그머니 감싸쥐는 그러한 터치. 슬픔과 진한 충격이 코를 거쳐 후두부에까지 전해진다. 그러나 티를 낼 수는 없다.
'어쩌면'
그는 일방적인 터치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지막 기대를 걸어본다. 하지만 한번 집중하자 그 냄새는 의외의 곳에서도 피어올랐다. 자희의 귓볼. 뭘까. 이것은 더욱 믿기 어렵다. '시작하는 연인의 터치'에서 갑자기 귀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단 말인가. 어쩌면 오후가 되어 향이 약해진 향수를 한번 더 뿌린 그 놈팽이의 향수 분무가 우연찮게 닿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무슨 생각해?"
눈이 동그래진 자희의 표정을 보며 그는 "아냐, 그냥 참 정교하구나 하고 생각했어. 나도 저런 손재주 있으면 좋을텐데" 하고 표정을 감추었다. "넌 가끔 쓸데없는데서 엄청 감성적이더라" 하고 쾌활하게 웃는 자희의 표정을 보며 그는 애써 불안한 감정을 달래본다. 그럴 리 없다며.
어떠한 능력은 노력과 훈련에 의해 더욱 발달한다. 그리고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진 천재가 전력으로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그 재능은 만개하기 마련이다. 자희에 대한 의심병이 도진 그 날 이후로 그는 후각을 더욱 단련했다. 이미 그러한 노력이 가져올 파국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멈추기에 그는 아직 어렸으며 젊었다.
"후우"
작고 희미한 향을 캐치해내는 것부터 시작된 감지능력 훈련.
"흐음"
다양하게 뒤섞인 냄새 속에서 그 향 하나하나를 분리해내는 향 추출의 훈련.
"후우읍"
하나의 향에 집중하여 특정 범위 내에서 그 향의 분포를 측정해내는 탐지 훈련.
"흐으음"
옷감 또는 종이, 비닐 등 다양한 장애물 속에 감추어진 향이 은밀하게 새어나오는 부분을 중심으로 발굴해내는 미세화 훈련.
"하아아"
콧 속에 가득한 혼란스러운 향의 기억들을 재빠르게 뱉어내고 초기화하는 리셋의 훈련.
"흐음"
어딘가에서 날아온 냄새에 묻어있는, 그 날아온 거리 도중에 맞닥뜨린 세세한 향들을 분석함으로서 어디에서부터 날아온 것인지 확인해내는 레이더화 훈련.
"하아압"
이미 씻겨져 나가고 지워져 나간, 조각조각난 향의 구멍들을 메꾸어 원래 묻어난 향을 복구해내는 재조합의 훈련.
"흠"
아주 혼란스러운 냄새들이 뒤섞인 증거물 속에서 필요없는 것들을 빠르게 걸러내고 중요한 냄새들을 신속히 걸러내는 필터 훈련.
"으음"
냄새들을 기억하고, 그 냄새들을 빠르게 기억해내는 기억력 훈련.
"후우"
그 모든 능력을 스스로가 만족스러울 때까지 끌어올리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반 년. 어느새 그는 냄새가 말해주는 증거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흔하게들 구라를 치는지 매일매일 놀라면서 또 실망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나? 어제 일찍 잤지"
"그랬구나"
자희의 몸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그 싸구려 남자향수의 냄새. 그의 기억창고방 속에서 어느새 꽤 큰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는 그 역겨운 향수의 흔적.
"자희야"
그는 결심했다. 여기서 관두어야 한다고. 자희의 전신에서 풍기는, 평소와 다른 바디워시의 향. 그리고 역겹게도 희미하게나마 아주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는, 그 바디워시에 많이 지워진 상태의 희미한 밤꽃향기. 그는 독해지기로 했다.
"그 남자 잘하디"
"뭐?"
그 어떠한 경고나 싸움 대신 난데없는 한 마디로 던지는 그렇고 그런 연애의 좋지 못한 결말. 자희는 놀랐고, 당황했으며, 무슨 소리냐며 소리부터 질렀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다른 수컷의 내밀한 냄새를 뇌리 어딘가에 아로새겨준 역겨운 경험을 용납할 정도로 너그러운 남자는 아니었다.
"젠장"
자희를 얼른 잊고 싶은 마음에 곧바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자희에게 한방 먹이고 싶었다. 평소에야 다른 사람의 체취에 대해 굳이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마음에 드는 상대가 보이면 열심히 향을 맡아댔다. 스쳐 지나가면서 스윽 숨 한번만 들이마셔도 그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흐'
체취는 수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며칠에 걸쳐 정보를 축적하다보면 더욱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사용하는 향수, 흡연 여부, 취미, 어제 먹은 야식 메뉴, 간밤에 술을 마셨는지 아닌지, 남자친구의 여부까지.
'팝콘냄새와 극장 특유의 냄새…지난 주에도 나던데. 영화를 좋아하나?'
'저녁에 야식 자주 먹네. 어제는 족발인가. 닭발 소스 냄새도 나는군'
'다림질 냄새가 자주 난다…자취한다더니, 다림질까지 자주하는 타입인가. 의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실망은 금방이었다.
'군데군데 아직도 다 지워내지 못한 남자 향수 냄새, 그리고 그 냄새…음. 남자친구가 있었던걸까'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다른 상대로 눈을 돌려보아도, 지나치게 민감한 코 때문에 실수를 찾는게 더 쉬웠다.
'후우, 배탈 났나보네…아, 냄새 참기 힘들다'
'머리 며칠째 안 감은거지? 머리가 길어서 관리 힘들긴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한거 아닌가'
'부츠에서 냄새가…큼!'
그렇게 코가 혼자 유난을 떨며 안 좋은 체취부터 맡아대니, 모처럼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해도 곧 시들해지기 마련이었다. 생각해보면 자희도 마찬가지였을텐데, 왜 그녀와 만날 때는 그런 것을 덜 느꼈을까. 그는 당혹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버럭 겁도 났다. 이대로 이렇게 시간만 흘려보내다가, 정말 트라우마 생겨서 나이 먹고도 혼자 살게 되지는 않을까, 같은.
"자희야"
늦은 밤의 전화. 그는 자느냐고 묻는 카톡 같은 것은 보내지 않았다. 그저 다시 만나자는 말을 건냈을 뿐이었다. 자희는 한참이나 훌쩍이다가 "알았어" 하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고마워"
그렇게 근 3주 만에 자희를 다시 만난 그는 애써 그녀 모르게 코를 벌름거리며 체취를 훑어댔다. 마치 수캐처럼. 다행히도 자희에게서는 그 어떤 위험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단지 그는 그런 동물같은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낄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자희를 만나자 비로소 편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돌아와야 할 곳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너…"
그리고 1년. 입대 후 첫 휴가를 나온 그는 지독한 좌절을 느꼈다. 예쁜 원피스를 입고, 생글생글 웃는 자희에게서, 결코 나서는 안되는 냄새가 피어나고 있었으니까.
"왜?"
그는 순간 자희에게 뺨을 날릴까, 아니면 그대로 그녀를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가버릴까를 고민했지만, 지난 몇 달간의 군 생활로 익힌 필사적인 표정관리 스킬로 애써 웃으며 식당으로 인도했다.
"아냐, 밥부터 먹자. 저기 부대찌개 집 맛있겠다"
"응!"
간신히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어느새 그의 눈에는 뿌옇게 눈물이 차올랐다. 자희에 대한 실망 때문이 아니었다. 어째서 이런 거지 같은 재주를 갖고 태어나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사람이 방구 좀 뀔 수도 있지. 시발."
"너는 애가 왜 그렇게 유난스럽냐"
"개코도 시발 정도껏이지"
"하루에 몇 번을 토하는거야 너는"
"아 오빠, 또 속 안 좋아요?"
수많은 억울한 시간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고, 차라리 몰랐으면 속 편했을텐데, 차라리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한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에 울컥했다.
"나 잠깐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알았어"
그는 무언가 큰 결심을 한 얼굴로, 갑자기 가게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음식점 옆 편의점에서 라이타를 하나 산 다음, 가게 뒷 편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자희는 "끄아아아악!" 하는 그의 비명에 놀라 뛰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남친은 라이타로 스스로의 콧구멍 속을 지져버린 상태였으니까.
"미친 새끼"
그는 눈을 떴다. 병원이었다.
"왜 그런거야! 군 생활이 그렇게 힘들어?"
자희는 퉁퉁 부은 눈으로 깨어난 그에게 소리쳤다. 무언가 대답하고 싶었지만 콧 속을 불로 지져버린 탓에 징-하는 아찔한 통증에 차마 말조차 하기 힘들었다. 군 생활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너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코가 너무 아팠다. 역시 미련한 짓이었을까.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으니까. 해방이었다.
"보기 힘들어. 코가 그 모양인데 이제 어떻게 널 사귀어?"
"뭐?"
깜짝 놀라 자희를 쳐다보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뭐지'
당황하며 그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텅빈 4인실 병실 안에는 그와 자희 뿐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거냐고 이 멍청아, 너 이제 나 어떻게 만날래? 코 저거 수술은 되나?"
환청이라도 들리는 것일까. 혹시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닌가 싶어 눈을 끔뻑였지만 그는 순간 언젠가 본 무협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시력을 잃고 엄청난 청력을 얻게 된 어느 고수의 이야기 말이다. 이제는 후각을 잃은 대신에 독심술이라도 얻었단 말인가. 그 상황에 너무 기가 막혔지만 그는 자희의 다음 말-여전히 입을 다문 채 눈물만 흘리고 있는-에 아주 씁쓸함을 느낄 따름이었다.
"역시 그냥 한수 오빠 만나는게 맞는걸까. 하, 정말 이게 뭐야 도대체"
그 말에 그는 코가 징징 울리는 통증 속에서도 기어코 말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자희야, 미안한데 엄마한테 전화 좀 대신 해줘. 그리고 너 일단 돌아가. 나 좀 쉴게"
몇 시간 후, 그가 곤히 잠든 와중, 병실 옆 환자 가족 대기실에서 그의 엄마는 눈물을 겨우 그치고는 조사를 위해 나온 헌병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우리 애가 막 자해를 하고 그럴 애는 아니에요. 단지 그냥 애가 망상병이 있어요. 지가 무슨 강아지 마냥 냄새를 귀신같이 잘 맡는다는 이상한 망상이 있어요. 근데 전혀 그게 아니거든요. 어렸을 적에 검사도 받아봤는데 오히려 평균보다 떨어지는 편이래요. 아까도 저 짓을 한게, 그러니까, 지 여친이 무슨 바람을 피웠대요. 그리고 그걸 지 코로 알 수 있다는데, 그게 너무 괴로워서 그냥 코를 없애버리고 싶었대요. 근데 이제는 사람 속 마음 소리가 들린대나 어쩐대나. 정신병에 걸려버린건 아닌지 걱정이 되서, 진짜 어째요 우리 아들. 에휴으, 진작에 정신병원이라도 데려가는건데!"
'세상에! 세상에!'
그가 본 영화는 바로 톰 튀크베어 감독의 베스트셀러 원작 영화, '향수'였다. 그리고 그는 주인공에게 너무나, 정말 너무나도 깊이 공감했다.
'그래! 저거라고! 저거야! 냄새, 향! 저거라고!'
태어날 때부터 엄청나게 예민한 후각을 갖고 태어난 그. 그리고 그것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고통과 좌절이, 비록 허무맹랑한 영화 한 편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깊은 위로가 되었다.
체취
"너 오줌 냄새나"
유치원생이던 그는, 유치원 버스 옆 자리에 앉아있던 6살 지민이에게 큰 소리로 난데없는 폭언을 던졌다. 당연히 통학버스 안은 또래 아이들의 웃음으로 가득찼고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었던 지민이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지민이는 등원 직후부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떼를 썼고, 결국 유치원까지 달려온 지민 엄마는 화가 나서 그의 엄마를 소환했다.
"아니, 세상에 애가 어? 아니 참, 어떻게 아무리 애는 애라지만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해요! 지민이가 정말로 오줌이라도 쌌으면 모르겠는데, 아니 그런 누명을 씌우면 애가, 이 작은 애가 얼마나 상처를 받겠냐구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사실 지민 엄마 입장에서 보아도 화가 날 법한 일이긴 하다. 정말로 지민이가 오줌을 싸서 놀림거리가 되었더라도 화가 났을 판인데, 오줌을 안 쌌는데 놀림거리가 되고 아이가 등원거부를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겠는가.
하지만 '그' 입장에서는 더더욱 억울한 일이었다. 그는 알았다. 분명히 지민이는 소변을 지렸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지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경험이 있듯이 속옷에 조금 덜 배출된 극미량의 오줌이 살짝 묻은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말이다. 그의 예민하디 예민한 코는 분명히 그것을 캐치했다.
물론 통원버스 안의 거의 모든 원아가 그런 '몇 방울'을 지리곤 한다. 심지어 운전석에서 운전하고 있는 아저씨마저 팬티 앞 동전만한 영역이 마지막 몇 방울에 침식당한 상태라 '그'에게는 이미 버스 안 전체가 지린내가 가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예쁘고 깨끗한 지민이마저 오줌을 지렸다는 사실에 큰 실망감을 느낀 것이었다.
"엄마가 다른 사람들한테 냄새로 뭐라고 하랬어, 하지 말랬어?"
"…"
엄마는 항상 그를 혼냈다. 후각에 엄청나게 예민한 아이는 곧잘 타인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했으니까. 자극적인 냄새에 관한한, 함께 키우던 개보다도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에 매번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는 그가 스스로 '재능'이나 '천재성'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피곤한 문제' 또는 '고쳐야 할 성격'이라고 받아들이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의 몇 배, 아니 몇 백, 몇 천, 아니 몇 만…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예민할 수도 있는 그런 초월적인 후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의 모든 만남과 인연에 자연스러운 장벽과 혐오를 쌓기에 충분했다.
불과 30초 전까지 불알을 긁었던 주제에 지금은 '그'의 팔뚝을 잡고 있는 경흠의 손.
생리 때문에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하는 아영.
일주일 째 같은 바지는 물론이요 양말마저 잘 갈아신지 않는 대휘.
툭하면 방귀를 내뿜는, 그러면서 매번 제일 먼저 "무슨 냄새 안나?" 하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재경.
오줌은 당연하고, 똥을 싸고도 손을 안 닦는 수많은 미친 놈들이 꽤나 있는 이 더러움의 전당, 교실.
모두가 모르기에 우습게 넘길 수 있는 불결.
그리고 그것을 혼자만 너무나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초감각.
모두의 얼굴에서 하나둘씩 곪아가는 여드름.
마치 전염병마냥 비슷한 시기에 일제히 터지는 같은 반 여자아이들의 생리.
운동이 끝나고 난 직후 모두의 몸에서 격렬하게 발산되는 가혹한 땀과 발냄새.
한여름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 하나가 엉덩이 골을 지나 깊은 곳으로 들어가버리는 순간의 역겨움 등.
'그'는 삶 자체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도저히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매 순간순간 구토와 싸워야만 했다.
그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러한 후각이 더욱 더 발달되어 간다는 사실이었다.
수염이 돋아나고, 어깨가 벌어지고 키가 성장하면서 그의 코는 어느새 '지금 이 순간'을 넘어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무뎌지지 않은 미숙한 남자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불행한 능력이었다.
"밥 먹었어?"
"응. 오빠는?"
"나도 먹었지. 누구랑 먹었어?"
"혜영이랑"
"아… 그렇구나"
여친 자희의 입에서 풍겨오는 베리오 치약 속 돈까스와 그 소스의 향기. 단무지와 양배추의 냄새. 그리고 아마도 상대가 주문했을 제육볶음의 희미한 냄새. 아마도 한 두점 정도 집어먹은 느낌. 그리고 그녀의 옷에서 느껴지는 다른 남자들의 향수. 흔한 싸구려 향수와 그리드 향수, 그 와중에 희미하면서도 존재감을 분명히 하는 젠할리곤스 엔디뷔온의 향, 주르오스의 향, 비샤 보이 등등등등.
아마도 같은 수업을 들었을 그 누군가들의 냄새들. 그러나 그 많은 향의 폭포 속에서도 혜영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뭐지. 왜 자희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참, 내가 말했나? 나 어제 네일했어. 이쁘지?"
네일아트를 했다면서 손을 내미는 순간, 자희의 손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진한 남자 싸구려 향수의 냄새. 다시 기억을 되짚어본다. 제육볶음의 기억 어딘가에 아주 희미하지만 비슷하게 스쳐 지나간 그 냄새.
"응 이쁘네. 잘 어울린다. 와 이렇게 디테일하게도 가능하구나"
확신은 어렵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는 판단을 흐리듯, 지나치게 좋은 후각이 때로는 방해가 된다. 이 싸구려 향수를 쓰는 놈이 학생식당 근처 어딘가에 앉았던 놈의 냄새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향수 냄새가 왜 자희의 손에서 나는데? 그는 손톱의 그림을 자세히 보는 척 하면서 코를 손 가까이 하고 그 향수 냄새에 집중하며 냄새를 깊게 들이마셔본다.
자희의 손바닥에 싸구려 향수 속 향기 분자의 지도가 그려진다. 자희의 왼손 새끼손가락 주변부터 손날 언저리, 그리고 약지 손가락까지 향이 덮고 있다.
문득 '그'는 그 모양에 대해 '시작하는 연인들의 터치'라는 시적인 이름을 붙여주고 충동을 느낀다. 손을 잡을까 말까, 잡아도 될까 망설이며 주춤대다 새끼손가락부터 슬그머니 감싸쥐는 그러한 터치. 슬픔과 진한 충격이 코를 거쳐 후두부에까지 전해진다. 그러나 티를 낼 수는 없다.
'어쩌면'
그는 일방적인 터치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지막 기대를 걸어본다. 하지만 한번 집중하자 그 냄새는 의외의 곳에서도 피어올랐다. 자희의 귓볼. 뭘까. 이것은 더욱 믿기 어렵다. '시작하는 연인의 터치'에서 갑자기 귀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단 말인가. 어쩌면 오후가 되어 향이 약해진 향수를 한번 더 뿌린 그 놈팽이의 향수 분무가 우연찮게 닿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무슨 생각해?"
눈이 동그래진 자희의 표정을 보며 그는 "아냐, 그냥 참 정교하구나 하고 생각했어. 나도 저런 손재주 있으면 좋을텐데" 하고 표정을 감추었다. "넌 가끔 쓸데없는데서 엄청 감성적이더라" 하고 쾌활하게 웃는 자희의 표정을 보며 그는 애써 불안한 감정을 달래본다. 그럴 리 없다며.
어떠한 능력은 노력과 훈련에 의해 더욱 발달한다. 그리고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진 천재가 전력으로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그 재능은 만개하기 마련이다. 자희에 대한 의심병이 도진 그 날 이후로 그는 후각을 더욱 단련했다. 이미 그러한 노력이 가져올 파국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멈추기에 그는 아직 어렸으며 젊었다.
"후우"
작고 희미한 향을 캐치해내는 것부터 시작된 감지능력 훈련.
"흐음"
다양하게 뒤섞인 냄새 속에서 그 향 하나하나를 분리해내는 향 추출의 훈련.
"후우읍"
하나의 향에 집중하여 특정 범위 내에서 그 향의 분포를 측정해내는 탐지 훈련.
"흐으음"
옷감 또는 종이, 비닐 등 다양한 장애물 속에 감추어진 향이 은밀하게 새어나오는 부분을 중심으로 발굴해내는 미세화 훈련.
"하아아"
콧 속에 가득한 혼란스러운 향의 기억들을 재빠르게 뱉어내고 초기화하는 리셋의 훈련.
"흐음"
어딘가에서 날아온 냄새에 묻어있는, 그 날아온 거리 도중에 맞닥뜨린 세세한 향들을 분석함으로서 어디에서부터 날아온 것인지 확인해내는 레이더화 훈련.
"하아압"
이미 씻겨져 나가고 지워져 나간, 조각조각난 향의 구멍들을 메꾸어 원래 묻어난 향을 복구해내는 재조합의 훈련.
"흠"
아주 혼란스러운 냄새들이 뒤섞인 증거물 속에서 필요없는 것들을 빠르게 걸러내고 중요한 냄새들을 신속히 걸러내는 필터 훈련.
"으음"
냄새들을 기억하고, 그 냄새들을 빠르게 기억해내는 기억력 훈련.
"후우"
그 모든 능력을 스스로가 만족스러울 때까지 끌어올리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반 년. 어느새 그는 냄새가 말해주는 증거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흔하게들 구라를 치는지 매일매일 놀라면서 또 실망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나? 어제 일찍 잤지"
"그랬구나"
자희의 몸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그 싸구려 남자향수의 냄새. 그의 기억창고방 속에서 어느새 꽤 큰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는 그 역겨운 향수의 흔적.
"자희야"
그는 결심했다. 여기서 관두어야 한다고. 자희의 전신에서 풍기는, 평소와 다른 바디워시의 향. 그리고 역겹게도 희미하게나마 아주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는, 그 바디워시에 많이 지워진 상태의 희미한 밤꽃향기. 그는 독해지기로 했다.
"그 남자 잘하디"
"뭐?"
그 어떠한 경고나 싸움 대신 난데없는 한 마디로 던지는 그렇고 그런 연애의 좋지 못한 결말. 자희는 놀랐고, 당황했으며, 무슨 소리냐며 소리부터 질렀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다른 수컷의 내밀한 냄새를 뇌리 어딘가에 아로새겨준 역겨운 경험을 용납할 정도로 너그러운 남자는 아니었다.
"젠장"
자희를 얼른 잊고 싶은 마음에 곧바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자희에게 한방 먹이고 싶었다. 평소에야 다른 사람의 체취에 대해 굳이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마음에 드는 상대가 보이면 열심히 향을 맡아댔다. 스쳐 지나가면서 스윽 숨 한번만 들이마셔도 그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흐'
체취는 수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며칠에 걸쳐 정보를 축적하다보면 더욱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사용하는 향수, 흡연 여부, 취미, 어제 먹은 야식 메뉴, 간밤에 술을 마셨는지 아닌지, 남자친구의 여부까지.
'팝콘냄새와 극장 특유의 냄새…지난 주에도 나던데. 영화를 좋아하나?'
'저녁에 야식 자주 먹네. 어제는 족발인가. 닭발 소스 냄새도 나는군'
'다림질 냄새가 자주 난다…자취한다더니, 다림질까지 자주하는 타입인가. 의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실망은 금방이었다.
'군데군데 아직도 다 지워내지 못한 남자 향수 냄새, 그리고 그 냄새…음. 남자친구가 있었던걸까'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다른 상대로 눈을 돌려보아도, 지나치게 민감한 코 때문에 실수를 찾는게 더 쉬웠다.
'후우, 배탈 났나보네…아, 냄새 참기 힘들다'
'머리 며칠째 안 감은거지? 머리가 길어서 관리 힘들긴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한거 아닌가'
'부츠에서 냄새가…큼!'
그렇게 코가 혼자 유난을 떨며 안 좋은 체취부터 맡아대니, 모처럼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해도 곧 시들해지기 마련이었다. 생각해보면 자희도 마찬가지였을텐데, 왜 그녀와 만날 때는 그런 것을 덜 느꼈을까. 그는 당혹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버럭 겁도 났다. 이대로 이렇게 시간만 흘려보내다가, 정말 트라우마 생겨서 나이 먹고도 혼자 살게 되지는 않을까, 같은.
"자희야"
늦은 밤의 전화. 그는 자느냐고 묻는 카톡 같은 것은 보내지 않았다. 그저 다시 만나자는 말을 건냈을 뿐이었다. 자희는 한참이나 훌쩍이다가 "알았어" 하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고마워"
그렇게 근 3주 만에 자희를 다시 만난 그는 애써 그녀 모르게 코를 벌름거리며 체취를 훑어댔다. 마치 수캐처럼. 다행히도 자희에게서는 그 어떤 위험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단지 그는 그런 동물같은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낄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자희를 만나자 비로소 편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돌아와야 할 곳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너…"
그리고 1년. 입대 후 첫 휴가를 나온 그는 지독한 좌절을 느꼈다. 예쁜 원피스를 입고, 생글생글 웃는 자희에게서, 결코 나서는 안되는 냄새가 피어나고 있었으니까.
"왜?"
그는 순간 자희에게 뺨을 날릴까, 아니면 그대로 그녀를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가버릴까를 고민했지만, 지난 몇 달간의 군 생활로 익힌 필사적인 표정관리 스킬로 애써 웃으며 식당으로 인도했다.
"아냐, 밥부터 먹자. 저기 부대찌개 집 맛있겠다"
"응!"
간신히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어느새 그의 눈에는 뿌옇게 눈물이 차올랐다. 자희에 대한 실망 때문이 아니었다. 어째서 이런 거지 같은 재주를 갖고 태어나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사람이 방구 좀 뀔 수도 있지. 시발."
"너는 애가 왜 그렇게 유난스럽냐"
"개코도 시발 정도껏이지"
"하루에 몇 번을 토하는거야 너는"
"아 오빠, 또 속 안 좋아요?"
수많은 억울한 시간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고, 차라리 몰랐으면 속 편했을텐데, 차라리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한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에 울컥했다.
"나 잠깐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알았어"
그는 무언가 큰 결심을 한 얼굴로, 갑자기 가게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음식점 옆 편의점에서 라이타를 하나 산 다음, 가게 뒷 편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자희는 "끄아아아악!" 하는 그의 비명에 놀라 뛰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남친은 라이타로 스스로의 콧구멍 속을 지져버린 상태였으니까.
"미친 새끼"
그는 눈을 떴다. 병원이었다.
"왜 그런거야! 군 생활이 그렇게 힘들어?"
자희는 퉁퉁 부은 눈으로 깨어난 그에게 소리쳤다. 무언가 대답하고 싶었지만 콧 속을 불로 지져버린 탓에 징-하는 아찔한 통증에 차마 말조차 하기 힘들었다. 군 생활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너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코가 너무 아팠다. 역시 미련한 짓이었을까.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으니까. 해방이었다.
"보기 힘들어. 코가 그 모양인데 이제 어떻게 널 사귀어?"
"뭐?"
깜짝 놀라 자희를 쳐다보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뭐지'
당황하며 그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텅빈 4인실 병실 안에는 그와 자희 뿐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거냐고 이 멍청아, 너 이제 나 어떻게 만날래? 코 저거 수술은 되나?"
환청이라도 들리는 것일까. 혹시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닌가 싶어 눈을 끔뻑였지만 그는 순간 언젠가 본 무협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시력을 잃고 엄청난 청력을 얻게 된 어느 고수의 이야기 말이다. 이제는 후각을 잃은 대신에 독심술이라도 얻었단 말인가. 그 상황에 너무 기가 막혔지만 그는 자희의 다음 말-여전히 입을 다문 채 눈물만 흘리고 있는-에 아주 씁쓸함을 느낄 따름이었다.
"역시 그냥 한수 오빠 만나는게 맞는걸까. 하, 정말 이게 뭐야 도대체"
그 말에 그는 코가 징징 울리는 통증 속에서도 기어코 말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자희야, 미안한데 엄마한테 전화 좀 대신 해줘. 그리고 너 일단 돌아가. 나 좀 쉴게"
몇 시간 후, 그가 곤히 잠든 와중, 병실 옆 환자 가족 대기실에서 그의 엄마는 눈물을 겨우 그치고는 조사를 위해 나온 헌병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우리 애가 막 자해를 하고 그럴 애는 아니에요. 단지 그냥 애가 망상병이 있어요. 지가 무슨 강아지 마냥 냄새를 귀신같이 잘 맡는다는 이상한 망상이 있어요. 근데 전혀 그게 아니거든요. 어렸을 적에 검사도 받아봤는데 오히려 평균보다 떨어지는 편이래요. 아까도 저 짓을 한게, 그러니까, 지 여친이 무슨 바람을 피웠대요. 그리고 그걸 지 코로 알 수 있다는데, 그게 너무 괴로워서 그냥 코를 없애버리고 싶었대요. 근데 이제는 사람 속 마음 소리가 들린대나 어쩐대나. 정신병에 걸려버린건 아닌지 걱정이 되서, 진짜 어째요 우리 아들. 에휴으, 진작에 정신병원이라도 데려가는건데!"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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