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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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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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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도로. 그럴싸한 드라이브 뮤직과 함께 나와 주리의 말이 잠시 끊어진다. 주리의 휴대폰이 간간히 빛나고, 악셀을 밟는 나의 발이 깊어질 무렵 나는 서서히 피곤과 밤에 취하기 시작한다.

I want to drive you through the night, down the hills
I'm gonna tell you something you don't want to hear
I'm gonna show you where it's dark, but have no fear

에어컨 바람이 싸늘함을 넘어 추위까지 느끼게 하지만 나도 주리도 에어컨을 끄지 않는다. 온 팔에 돋아나는 닭살과 함께 어느새 속도는 위험 수준을 넘기고야 만다.

"조금 줄여요"

주리의 핀찬에 그제서야 속도를 줄이고, 잠시 유치하게 혼자만의 기분에 취했던 바보 같은 나를 속으로 책망하며 "우리 뭐라도 마실까" 하고 별로 마음에도 없는 제안을 한다. 주리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갑자기 나에게 들어보인다.

[ 재호빠 ]

주리의 남자친구, 그리고 나의 오랜 동업자 재호. 나는 대답 대신 차의 속도를 높인다. 사실 목적지도 없으면서.






나이트 드라이브 






'첫눈에 반한다'라는 말을 나는 이제껏 외형에 관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외적으로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나로서는 결코 겪을 리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리의 견해는 달랐다.

"정말로 한번도 여자한테 잘 생겼다는 말 들어본 적 없어요?"
"그만해라잉"
"으악, 진짠데?"

재호가 거래처에 잠깐 다녀오겠다며 나간 사이에 가게에 방문한 그의 여자친구 주리. 한 시간 정도의 빈 시간 동안 우리는 다소간의 어색함 속에서도 빠르게 친해졌고 7살의 나이 차에도 오래 만난 친구처럼 금방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저 오빠 재밌어"
"그치? 내가 맨날 재밌다고 했잖아. 엄청 웃기다고"
"야, 사람 앞에 놓고 쑥덕거리지 마라?"

재호의 등장이 아쉽게 느껴진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른 묘한 죄책감에 나는 혼자 실없이 웃었고, 어째서인지 나를 보며 또 묘하게 웃고 있던 주리의 모습에 묘한 가능성을 느낀 나.

그것은 평생 몇 번 밖에 느낀 적 없는, 아주 오래간만의 어떤 솔직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이었다.

물 빠진 스키니 청바지에 연보라색 트랙탑, 블루블랙으로 염색한 아주 짧은 숏커트. 별로 대단할 것도 없고, 내가 어울리기에도 지나치게 어린 나이. 그저 재호와 만나다보니 우리 또래와도 잘 어울려주는구나 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려고 해도 어느새 카톡 메세지로 다가온 그녀.

[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
[ 재호빠 폰ㅋ 뭐해요? 아직 가게에요? ]
[ ㅇ ]
[ 뭐야 성의없게 ]
[ ㅋ ]
[ 이따 놀러가도 되요? ]

재호가 대학원 가는 날마다 꼭 연락을 미리하고 그를 피해 가게에 나타난 그녀. 세번째의 등장에 나는 혼자 속 끓이다 못해 결국 먼저 묻고 말았다.

"나랑 따로 동업하고 싶냐? 왜 꼭 내 동업자 없을 때 놀러오는데?"

직구로 묻고 싶은 마음을 돌리고 돌리고 돌려 비겁하게 물었지만 주리의 대답은 꽤나 직설적이었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에요?"




10시 갓 넘긴 시점에 일찍 가게 문을 닫고 근처 분식집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 아니 그녀와 나. 둘 다 저녁을 거른 상태였기 때문에 떡튀순을 주문하려고 했지만 주리는 라면으로 족하다고 했다.

"아니 내가 먹고 싶다고"
"그냥 오빠도 라면 먹어요"

기어코 나에게도 라면을 강요한 그녀는 서로가 라면을 반쯤 먹었을 무렵 툭 털어놓듯이 말했다.

"오빠가 좋아요"

사실 나는 이런 류의 여자애들을 좀 겪어본 적이 있다. 기도 승도 전도 없이 갑자기 툭툭 자석 달라붙듯이 마음을 부딪혀 오는 아이들. 내가 대단한 뭘 한 것도 아닌데, 혼자 하트 뿅뿅이 되어서는. 심지어 남친까지, 그것도 오랜 동업자인 친구를 달고 부딪혀 온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내가 널 만나면 재호가 날 죽이려고 할걸"

나는 '내가 널 만나지 말아야 할 내 안의 이유' 대신 외부의 이유를 들어 거절 아닌 거절을 했다. 확실히 단언컨데 나는 비겁한 타입의 인간이다.

"그럼 내가 재호 오빠 정리하면 되잖아요"
"그런 걸 정리라고 할 수 있냐?"
"아"

짜증난다는 류의 인상을 쓰는 주리. 아, 그렇구나. 아마 확신하건데, 재호 역시 주리가 저 코 끝을 찡그린 표정에 반했을거라 생각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럼 말죠 뭐. 이렇게만 만나요. 가끔"

'그럼 말죠' 라는 말에 느낀 찰나의 아쉬움과 후회. 그리고 '이렇게만' 이라는 말에서 느낀 안도감과 더러운 충동.

"아니야"

아무리 순간의 충동으로 살아온 나였지만, 사랑 아닌 여자 때문에 손에 쥔 많은 것을 송두리채 박살내 버리기에는 내 나이도 이제는 어린 나이가 아니다.

그러자 말없이 라면 국물을 들이킨 그녀. 꿀꺽 꿀꺽 뭐야, 안 짜나, 꿀꺽. 무슨 라면 국물을 시원한 냉국이라도 되는 양 들이킨 주리는 그릇을 내려놓고는 "겁쟁이" 라면서 나를 몰아세웠다. 맞는 말이다. 겁쟁이.

아예 여지를 안 준 것도 아니고, 주리가 올 때마다 설레이는 표정으로 이것저것 시키지도 않은 음료를 내어주고 지난 십수 년간 여자 꼬실 때마다 써온 수많은 마음의 테크닉을 활용하가며 최대한 그녀를 기쁘게 한 나.

몰랐을 리가 없다.

재호 앞에서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표현들을 통해, 잔잔하고 담백하면서도 은은하게 배어드는 감정의 얽힘을 유도한 나. 아마도 재호 같은 타입과는 다른 류의 어떤 부드러운 재미를 느꼈을 것이다.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조금은 귀여움까지 느껴지는 도발. 그리고 솔직하게 "아니, 당연히 후회할거야" 라며 답을 하는 나의 여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매번 이런 타입의 여자애들과 엮이곤 했다. 정말 매번.

곰곰히 생각해보건데 그녀들이 '남자'라는 성별에게서 항상 느껴온 어떤 전형성에서 묘하게 탈피한 모습에서 신선함들을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지만 달리 말하면 그것은 그만큼 순간의 콩깍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너는?"

우습지만 나의 이 역질문에 꼬리 내린 애들은 한 명도 없다. 단 한 명도. 그리고 비겁한 나는 "그럼 니가 선택한 거니까, 절대로 후회하지마" 라는 말과 함께 그녀들을 집으로 들이곤 했지. 쓰레기처럼.




나의 08년식 랜서 에볼루션를 본 주리는 "와 차 진짜 못 생겼다" 하면서 아저씨 차라고 놀려댔다. 연식을 듣고는 헛웃음을 짓기까지.

"야, 그래도 이거 좋은 차야. 진짜로"
"수리비가 더 들어갈거 같은데"

아픈 구석을 찔렸지만 어쨌든 나는 변명 대신 여유있는 드라이브로 밤의 도로를 주행하기 시작했다. 답답함 도심을 벗어나 자유로와 통일로를 거쳐 다시 차를 돌려 인천공항 고속도로를 달렸다. 중간에 기름을 넣고 조금 오버했나 생각할 무렵 주리가 말했다.

"드라이브하니까 좋다"
"조금만 더 달리자"

그리고는 드디어 김포 어느 켠까지 다시 차를 몰고 와서는 차를 세웠다.

"안 졸려?"

슬슬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무의미한 드라이브. 이게 뭘까. 연애도 아니고, 사랑의 도피도 아니고.

"오빠는 졸려요?"
"조금"
"그럼 잠깐 눈 붙여요"

창문을 내리고 어느새 완연한 가을의 날씨를 느끼게 하는 선선한 공기를 폐에 채우는 것도 잠시, 주리는 차에서 내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빠는 담배 안 피워요?"
"끊었어"
"정말요? 어떻게 사람이 담배를 끊어요?"
"난 끊을 수 있어. 섹스도 끊었어"

내 아저씨 같은 농담에 푸푸하며 실없이 웃는 주리.

"끊은게 아니라 끊어진거 아니에요? 아니 아예 이제는 잘 안서나? 아 그래서 담배 끊은거?"
"야"

슥 들이대보는데 한술 더 뜨며 치고 들어오는게 재밌다. 이런 느낌 얼마만인가. 하지만 난 찬물을 또 끼얹고야 만다.

"근데 너 재호랑은 뭐 문제 있어?"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한 주리는 담배를 다시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남 탓 하고 싶은거에요?"

역시 비겁했나.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너 앞에서는.

"그냥, 궁금해서"

사방에서 들려오는 가을 벌레들의 오케스트라. 주리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나는 그냥 편하게 만나고 싶은건데, 재호 오빠는 자꾸 진지해지니까. 그래서 더 그런 것도 같고. 그리고 그런 걸 떠나서 오빠 같은 사람 궁금해서요"
"뭐가?"
"평생 결혼 안 할 거 같은 사람. 누가 뭐라고 안 하면 진짜로 인생에 계획 같은거 하나도 안 정하고 대충 막 살 거 같은 사람"
"내가 그런 이미지야?"
"아니에요?"

모르겠다. 어쩌면 이러다가, 아니 매우 높은 확률로 평생 독신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인생에 계획도 없이 살았던가. 분명 예전에는 아니었는데. 글쎄. 그런지도 모르지.

"모르겠네"
"근데 나도 그래요. 나도 꼭 그렇게 막 계획 따라서 살아야 되나 싶기도 하고. 그럴 나이가 아니라는건 아는데, 계획 따라 사는게 무슨 의미인가 싶고. 그럼 뭐가 크게 다른가 싶고. 안 그래요?"

나도 차에서 내려 밤의 가을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때 아닌 인생 상담. 잘만 유도하면 이 일탈을 꿈꾸는 어린 양을 성실한 한 남자의 품으로 다시 곱게 돌려보낼 수도 있고, 또 모든 것을 파멸 속으로 날려버릴 것이 분명한 더럽고 짜릿한 인연 속으로 떠날 수도 있는 이 기묘한 갈림길에서 나는 주리의 얼굴을 달빛 아래서 또 보고야 만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고등학교 때의 역사 선생님이 그랬다. 절대로 달빛 아래에서 여자와 오래 이야기 하지 말라고. 천하의 못생긴 여자도 이뻐 보인다고. 그래서 자기가 평생 집에 들어갈 때마다 후회하며 살고 있다고. 아재식 쓰레기 농담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신신당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또 어기고야 만다. 하물며 주리만큼 예쁜 여자애라서야.

"주리야"

조금 운을 길게 뗀 어색한 부름. 분위기를 잡을 생각이었지만, 연애 감각이 녹슨 탓일까 내 방식이 후져진 것일까, 너무 뻔한 패턴에 주리는 피식 웃고 만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해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하는 주리의 질문.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도 흘낏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며 내적갈등에 대한 변명을 찾아보는 나.

"가자"

어디로 가냐는 주리의 연이은 질문에 나는 "어디긴, 자러 가야지. 안 졸려?" 하며 그녀를 차에 태운다. 어느새 밤 12시 반이 넘었다. 나는 서울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눈이 뻑뻑해지는 것을 느끼며 음악을 튼다.



새벽의 도로. 그럴싸한 드라이브 뮤직과 함께 나와 주리의 말이 잠시 끊어진다. 주리의 휴대폰이 간간히 빛나고, 악셀을 밟는 나의 발이 깊어질 무렵 나는 서서히 밤에 취하기 시작한다.

I want to drive you through the night, down the hills
I'm gonna tell you something you don't want to hear
I'm gonna show you where it's dark, but have no fear

에어컨 바람이 싸늘함을 넘어 추위까지 느끼게 하지만 나도 주리도 에어컨을 끄지 않는다. 온 팔에 돋아나는 닭살과 함께 어느새 속도는 위험 수준을 넘기고야 만다.

"조금 줄여요"

주리의 핀찬에 그제서야 속도를 줄이고, 잠시 유치하게 혼자만의 기분에 취했던 바보 같은 나를 속으로 책망하며 "우리 뭐라도 마실까" 하고 별로 마음에도 없는 제안을 한다. 주리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갑자기 나에게 들어보인다.

[ 재호빠 ]

주리의 남자친구, 그리고 나의 오랜 동업자 재호. 나는 대답 대신 차의 속도를 높인다. 사실 목적지도 없으면서.




"내가 뭐 이 시간에 잘 사람인가? 어 잠깐 담배 사러 나왔어. 우리 윗 집 그 미친 년 땜에 이제 집에서 담배도 못 피우잖아. 응, 어. 가을이라 그런지 날씨 좋네. 오빠도 피곤하지. 응? 아니. 응, 그럼. 나도. 어, 어어, 그럼 잘 자"

모텔 주차장 앞. 차에서 내려 재호와의 짧은 통화를 마친 주리는 다시 나의 안색을 살핀다.

"화난 거에요?"
"아니"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이 나이 쳐먹고 뒷감당 안 되는 짓을 또 벌이는 것 같아서"

또 라는 말에 푸푸하고 웃은 주리는 "올~ 처음이 아니시다?" 하며 내 옆구리를 푹 찌른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뀐 입장이긴 했지만. 나는 머쓱하게 웃고는 주리의 손목을 잡았다. 그래, 길게 생각할 것 없다. 굴러 들어오는 떡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겁나요?"

솔직히 말해서 나 같은 타입의 인간은 세상에 별로 겁나는 것이 없다. 정말로. 아마도 주리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렇다고 이 망설임이 도덕율에 의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아니"

2억 2천만원짜리 섹스를 하게 될까봐 겁난다는 드립을 치고 싶었지만, 아무리 내 연애세포가 다 죽었다 해도 그 정도는 아니다. 물론 재호의 투자금 2억 2천만원이 떠오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망설임은 어느새 주리의 손깍지가 날려버렸다.

"이제 고민 그만해요 고만"

그 말은, 재호가 평소 즐겨쓰던 말이라는 사실에 혼자 속으로 히죽 웃으며, 그렇다면 나는 어떤 말, 어떤 생각, 어떤 행동을 주리에게 흔적처럼 남기게 될까를 생각했다. 또 주리는 어떤 흔적을 나에게 남기게 될까를 생각하며.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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