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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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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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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분한 내가 정신없이 몰아붙이던 도중 터져나온 그녀의 한 마디.

"뭐?'

당황하면서도 애써 그 당혹감을 감추며 거칠게 되물은 나에게, 그녀는 문 밖을 향해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말했다.

"나가라고. 짐싸서, 당장 나가"

내가 무어라 대꾸도 하기 전, 그녀는 옷장 위에 올려놓은 나의 캐리어를 끌어내리더니 내 앞에 내팽겨치며 선언했다.

"이 집에서 나가. 나 너랑 같이 못 살아"

일방적인 통보. 처음 보는 그녀의 차가운 얼굴.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된, 서로의 아픈 구석을 후벼판 큰 싸움. 그리고 급기야 우리 엄마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폭언. 실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선언된 이별의 한 마디.

"나 정말 힘들어, 이제 우리 그만하자. 나가줘. 지금 흥분해서 하는 소리 아냐.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거야."

'우리의 보금자리'라고 생각했던 이 집은 그저 그녀의 명의로 된 원룸 전세였을 뿐이고, '예비 부부 생활' 혹은 '동거'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일상은 착한 그녀가 베푼 동정이었을 따름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창업 실패 덕분에 여친 집 빌붙어 사는 찌질이'라는 내 차가운 현실을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다.

"무슨…"




바닥에 내팽겨쳐진 캐리어와 "나가"라는 말, 그리고 캐리어 안에서 쏟아져 나온 옷가지 몇 벌을 보는 순간, 십 수 년도 더 된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화단에서 개미를 잡아와 지하층의 우리집 창문으로 자꾸 들여보내던 그 밉상스러운 주인집 아들내미.

녀석와의 시비 끝에 녀석은 우리 엄마 욕을 했고, 나는 곧바로 주먹을 날렸다. 세상 그 누구도, 내 앞에서 불쌍한 우리 엄마를 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서로 뒤얽혀 코피 터지게 싸웠던 그 날 밤.

체구도 작고 싸움도 못해, 맞기도 내가 더 많이 맞았고 잘못도 그 놈이 했건만 고개를 숙여야 했던 것은 나와 엄마였다. 나가라고 소리치는 그 옴팡지게 생긴 주인집 아주머니의 성화에 엄마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건만, 그 극성 맞은 아주머니는 우리 집까지 들어와서 집안 살림들과 빨아놓은 새 옷을 밖으로 내팽겨치면서까지 화를 냈다.

골목길의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와 구경을 시작했고, 그 사람들을 향해 "사람이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아줌마.

급기야 아줌마가 근 4년째 갱신을 하지 않은 계약서까지 꺼내들고 나오자, 다급해진 엄마는 "엄마가 기웅이랑 잘 지내라고 했어, 안 했어!" 하고 크게 소리치며 내 뺨을 몇 번이고 올려붙었다. 외가의 7남매 중에서도 유난히 억척스러웠던 엄마의 손은 매웠다. 한 대에 뺨이 벌개지고 두 대에 입술이 터졌다. 그리고는 몇 대인지 모르게 맞았다. 나는 움츠리되 울지는 않았다. 아주머니가 당황해서 되려 말릴 즈음이 되어서야 끝난 그 한바탕의 지랄굿.

방으로 돌아와, 시뻘개지고 퉁퉁 부운 뺨을 매만지며 방구석에 말없이 앉은 나와 역시 등을 돌리고 앉아 울던 엄마. 참 많이 아팠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아팠던 것은 뺨도 아니요, 엄마에 대한 서운함도 아니었다.

그 놈의 없는 살림 때문에 끔찍히도 사랑하는 아들의 뺨을 독하게 후려칠 수 밖에 없었을 그 엄마의 마음이, 그 누구보다 찢어지게 아팠을 그 마음이, 흐느끼며 돌아앉은 외로운 뒷모습 너머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것일까.

엄마의 돌아앉아 울던 그 모습은 아주 오랫동안 나의 악몽에 나왔고, 다양한 변주가 되어 십 년도 넘는 세월동안 틈만 나면 나의 꿈자리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다행히 언젠가부터는 그 모습도 익숙해졌고 드디어는 웃긴 꿈에서까지 활용되어 그렇게 나는 그 트라우마를 긴 세월 끝에 극복할 수 있었다.




"그래"

순식간에 차가워진 머리. 그리고 그보다 더 차가워진 가슴. 주섬주섬 캐리어에 쏟아진 내 옷가지들을 다시 집어넣으며 그 와중에도 반복되는 가난의 굴레에 씁쓸함을 느끼는 나. 그렇지만 왜 지금 그 기억이 떠올랐을까.

돈 때문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때문이었을까.

"흐, 흐흐…"

그리고 그제서야 웃음 같은 울음이 터졌다. 지난 십 년도 넘는 세월 동안 한번도 안 울었는데. 군대에서도 안 울고. 그때 그 날도, 너무 불쌍한 우리 엄마가, 혹시라도 내가 또 울면 언젠가의 겨울 밤처럼 "수혁아, 엄마랑 같이 죽자" 며 대접에 뭘 타올까봐. 그렇게 조마조마하며 울음을 참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에, 온 방 안이 그저 누렇고 새하얗게 흐려졌지만 먹먹한 가슴에 숨을 고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얼마나 추할까.




"걱정말어. 담주에 줄테니께"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그나마도 역시나 등 돌린 채, 신발을 신던 모습이 전부다. 신발을 다 신고서는, 한번쯤 돌아서서는 엄마에게 고맙다거나, 혹은 나를 보며 "아들" 어쩌고 하는 인사라도 한마디 할 수 있으련만.

그는 그렇게 신발을 다 신더니, 문을 열고 그렇게 바로 나가버렸다. 바람처럼 나갔다가 근 반 년 만에 돌아와서는 그렇게 엄마의 전 재산을 들고 그렇게 사라져버린 인간 쓰레기.

그때는 엄마도 여자였을게다. 그의 마음을 마지막으로 돌려보려고 지난 밤 오만 수를 다 썼을테고, 그 큰 돈을 내준 것도 그렇게라도 마음을 한번 잡아보려는 안타까운 결단. 물론 결과는 대실패였지만. 하지만 머리가 조금 굵어진 이후로는 깨달았다. 진짜 엄마 인생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떠나간 쓰레기야 잊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찾으면 그만일 뿐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엄마는 지금도 나이에 비해 동안이고,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 몇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공장장 아저씨부터 뭐 이 사람 저 사람. 하지만 결국 딸린 애를 책임져야 하니 그렇게 내가 엄마의 족쇄가 되었겠지. 생각해보니, 지영이한테도 내가 족쇄였으리라.

능력 없고 미래 없고 사고만 치고 다닌, 비전 없는 남자친구. 그러나 정 많고 의리도 많아서, 바보 같이 그 외모 그 매력을 갖고 나 같은 놈이나 만나고…. 남들은 잘만 갈아타던데.




"그, 지영아"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나는 캐리어를 집어 들었다. 그래, 어쨌든 지영이와의 일인데 왜 구질구질한 내 지나간 인생 이야기를 혼자 떠올리고 있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녀를 위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어…"

정리되지 않는 머릿 속과 해야 할 말을 한참을 애써 정리했건만, 결국 건조한 내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흔해 빠진 말이었다.

"행복해라"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선 후에야 생각했다. 나 역시도, 우리 아버지처럼, 남겨지는 사람에게 마지막 떠나는 얼굴을 안 보여줬구나, 하고.





오피스텔을 나와, 골목을 돌아, 큰 길로 가기 전, 다시 옆 골목으로 돌아 들어가, 벽에 몸을 기대고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눈을 감고 소리없이 끅끅대며 울었다.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만약… 그냥 그때 그 계약에 싸인을 했더라면. 아니면 그냥 아예 뻘스러운 사업이 아니라 다니던 회사나 잘 다녔으면. 처음에 대금 들어왔을 때 그걸로 일 더 안 벌리고 만족했더라면. 그랬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그럭저럭 살맛나게 살았을텐데.

지영이한테 손을 안 벌렸더라면. 아니면 진작에 좀, 아니 그냥 차라리 5년 전 그 날 고백을 하지 말았더라면. 그랬다면 명훈인가 정훈인가 하는 그 대기업 다닌다던 남자랑 다시 잘 만났을텐데. 너 걔 그때도 좋아했었잖아. 나랑 사귀면서도 몇 년을 못 잊고 힘들어 한 거, 사실 다 안다.

흐.

나도 다 잘해볼려고 그런건데. 조금이라도 더, 너도 호강시켜주고, 엄마도 더 고생 안 할 수 있게. 잘 될 줄 알았는데. 난 진짜 잘할 수 있었는데.

다 좋은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들 다 힘들고 고생만 하고 잘 안 풀리는지. 하면 안되는 약속을 너무 많이 했다. 내년에는 결혼 꼭 하자, 내년에는 엄마 내가 가게 하나 차려줄께, 내년에는 내년에는 내년에는.

그랬지.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며 얼어붙은 마음을 한층 더 공허하게 만들지만, 그 차가운 기분이 차라리 더 좋았다. 눈을 떴을 때,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큰 길로 나와 버스를 기다린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진눈개비가 휘내리기 시작하는 겨울 밤, 저 멀리서 버스의 불빛이 보인다. 지갑을 가방에서 꺼내고, 캐리어를 다시 손에 쥔 순간 울리는 지영의 전화.

진동이 몇 번을 울리는 것일까.

버스가 정류장에 서고, 버스에 오를까 말까 망설이는 나. 그리고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나. 캐리어를 쥔 손에 힘을 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우리 다 행복하자'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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