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시간, 출근할 즈음부터 한두방울 내리던 비는 어느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양 퍼붓고 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되자 이 편의점을 찾는 손님의 인적은 더욱 드물어지고, 가게 안은 더욱 조용해진다.
"음"
편의점 통유리에 흐르던 빗줄기는 이미 물벼락이 흐르는 수준이고, 편의점 안의 공기는 에어컨 때문에 으실으실함을 느낄 정도로 추워진다. 나는 이윽고 카운터 자리에 앉아 인터넷을 하염없이 훑는다. 오늘의 내 하루가 흐르듯이.
딸랑-
"어서오세요"
딸랑 소리에 맞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밤 12시를 10여분 남겨둔 지금, 언제나처럼 삐쩍 곯은 그 아줌마가 들어온다. 나이는 4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워낙에 곯은 인상에 나이 파악이 어렵다. 어쨌든 가게 안을 비척대는 걸음으로 반바퀴 휘 돌던 그녀는 매대에 남은 김밥 한 줄을 고른다. 아마도 그녀의 딸이 먹을 식사일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삼각김밥 두 개 묶음과 2단 도시락을 고른다. 그리고는 여지없이 소주 한 병과 간식용 소세지 몇 개를 집어든다.
"만 이천원입니다"
그녀는 품에서 카드 한 장과 동전 몇 개를 꺼낸다. 술은 현찰로, 나머지는 그녀의 카드로 결제한다. 신용카드가 아니다. 꿈나무 카드…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식대 지원 복지제도다. 하루 1만원 한도의 식대 지원 카드이지만 나는 그 아줌마의 딸이 저 카드로 만원어치의 식사를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매번 저 아줌마가 와서 천 몇 백원짜리 김밥 나부랭이와 술안주를 사는 모습만을 보았을 뿐이니까.
"감사합니다"
계산을 마치고도 그녀는 가게를 바로 나서지 않는다. 가게 한 켠의 라면 식사대에 가서 언제나처럼 2단 도시락을 분리한다. 밥은 다시 뚜껑을 닫아 챙기고, 반찬만 전자렌지에 돌린다. 2분 여의 시간이 지나자, 익숙한 손길로 그녀는 데운 반찬 등을 들고 가게를 나가 바로 앞의 파라솔 자리에 앉는다.
"또 오세요"
나는 그녀를 계속 눈으로 힐끔힐끔 좆는다. 하류인생들의 모습이다. 그녀는 파라솔 의자에 앉아, 살짝 잦아든 비를 바라보며 소주를 딴다. 그리고는 데운 도시락 반찬과 삼각김밥과 소세지를 안주로 술을 즐긴다. 예전에는 소주에 먹기에는 조금 과한 안주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언젠가 허겁지겁 삼각김밥을 베어무는 모습에 깨달았다. 아마도 저 여자는 저게 하루에 먹는 식사의 전부일 것이다. 술과 삼각김밥과 소세지와 편시락 반찬 몇 가지. 그 짠 반찬들 말이다. 내가 본 것만 근 석달 째니 저 여자의 신장은 멀쩡할까, 아니 그 전에 간은 멀쩡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다시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어서오세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딸랑 하는 소리에 다시 눈을 문으로 돌리지만, 좀 전의 그녀다. "공병이요" 하고 근 30여 분만에 비운 소주 공병을 100원에 받아간다. 공병 값이 오른 뒤로 이 편의점을 찾는 수많은 '주당'들이 소주병을 모아오곤 한다. 가끔은 바코드가 없는 업소용 공병을 들고 와 돈 달라고 빡빡 우기다가 씩씩대며 돌아가는 이들도 있는데,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어디 술집에 가서 술 퍼마시다가 그 놈의 돈 100원 받을라고 소주 공병을 가방에 싸올 생각을 할까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안쓰러울 지경이다.
"이거, 포인트 적립해주세요"
아까 꿈나무 카드로 결제한 영수증을 들고 와서 내민다. 나도 순간 아차 싶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편의점 포인트 카드에 아까 구매한 내역을 포인트로 적립한다. 이윽고 여자는 다시 비척비척 저쪽으로 걸어가더니…
"이거 계산해주세요"
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맥주 한 병을 추가로 집어온다. 이번에는 편의점 적립카드로 계산한다. 딸내미의 꿈나무 카드로 이것저것 결제를 하고, 그렇게 적립되는 편의점 포인트로는 술을 산다. 꿈나무 카드로는 술을 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제를 마치고, 여자는 그녀의 딸이 먹을 김밥을 들고 집으로 향한다. 아니 집으로 향하는지조차 확실하진 않다. 저렇게 갔다가 두어 시간 후에 왠 아저씨들이랑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와 술을 또 빨아대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미쳤어, 미친 인간들이야"
그녀가 나가고 나는 중얼거린다. 낮도 아니고 밤 12시 다 된 시각에 와서-절대로 12시를 넘기지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저 카드의 금액이 리셋되니까 1만원을 그냥 허공에 날리는 셈이 되어버린다- 아이의 김밥을 사간다면, 아이는 도대체 이 시간까지 무엇을 먹는 것일까.
"점심 급식을 먹는다고 쳐도 말이지"
하루 한 끼에 김밥 한 줄… 거기에 라면을 끓이고 저 도시락 맨밥을 투하해서 추가로 한 끼? 그야말로 탄수화물 폭탄일텐데. 게다가 이 시간이라면. 여자는 한 눈에 보아도 알콜중독이다. 그리고 이 동네에는 저런 사람이 꽤 된다. 자식의 밥값에 손을 대는 인간들.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생필품을 사는 거라면 이해라도 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입에 들어갈 술안주를 산다. 술은 못 사니까. 가격이 제법 센 육포 같은 것은 못 사고, 그저 편시락 반찬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스마트폰 한 대씩은 들고 있다. 그것도 일종의 복지제도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간에 말이다. 하기사, 가끔 오는 노숙자들도 휴대폰 하나씩은 다들 들고 있는 모습 보고 기가 막힌 적도 있었다.
"여, 담배 줘 봐 담배"
비가 조금 잦아들자 손님들이 다시 늘기 시작한다. 새벽 3시에 만취한 채로 담배를 요구하는 이 아저씨.
"어떤거 드릴까요?"
"담배 달라고"
"어떤 담배 드릴까요?"
"아 담배 달라고!"
…가끔 이런 병신들이 있다. 생각보다 많다. 진상이나 병신들. 전체 편의점 고객이 100명이라고 치면 그 중에 대여섯명은 확실히 병신이다. 특히 이런 심야 시간대는. 가끔은 병신율이 20% 가까이 치솟으며 짜증이 폭발하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은 정말 피곤한 날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의 요구대로 '아무거나' 집어든다. 에쎄 프라임을 집어든다. 이런 경우 보통 던힐 6미리나 팔리아먼트 아쿠아5를 집어들면 대충은 아다리지만, 이런 아재들은 에쎄가 취향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육두문자를 추가로 뱉으며 그제서야 "던힐 육미리"를 외친다. 나는 묵묵히 터져나오는 그의 쌍욕을 몇 마디 더 들으며, 카운터 테이블에 흩뿌려진 동전을 헤아린다.
새벽 3시, 김밥 폐기가 나오는 시간이지만 오늘은 폐기가 없다. 아까 그 아줌마가 집어간게 마지막이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딱 두 달 만에 편시락이나 김밥에는 질려버렸으니까. 이젠 폐기가 나와도 안 먹는다. 그냥 아침 시간대의 민주에게 먹으라고 냅두곤 한다. 문득 나는 이렇게 불과 두달 만에 질려버렸는데, 그걸 몇 달, 어쩌면 몇 년을 먹고 있는 그 아줌마의 딸은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니 조금 소름이 돋는다.
하기사 입맛 나름인지도 모른다. 아침 타임의 알바 민주는 1년 넘게 이 일을 했다고 하면서도 편의점 폐기음식을 없어서 못 먹는다니까. 걔도 집에 아빠가 없는 편모가정이랬다. 아니 그게 편부가정인가? 모르겠다. 아프리카 TV의 광팬인 그녀는 매번 교대 시간이면 그녀가 즐겨보는 몇 개 채널의 BJ 이야기들로 인사를 대신하곤 하는데, 그런 것에 관심이 요만큼도 없는 나로서는 정말 그 이야기 들어주는 것도 곤욕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끔 일이 있어서 근무를 부탁할 사람도 그녀 뿐인 것을. 구태여 척을 질 필요가 없다. 당장 지난 주의 면접도 그녀 덕분에 겨우 볼 수 있었지 않는가.
딸랑-
"어서오세요"
또 손님이다. 이번에는 제법, 섹시하게 입은 만취 손님 셋이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과한 화장…. 아마도 20대 초반쯤? 무어가 그리도 웃긴지 물건 고르면서도 지들끼리 한참을 깔깔대다가 결국 생리대와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골라 나간다.
사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그저 계속 서서 바코드만 찍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온갖 잡무가 많다. 물건 들어오는거 채워넣는 것도 제법 큰 일이다. 엄청 귀찮은. 청소도 그렇고. 종종 민주가 빵꾸를 내는 날 갑자기 주인 아줌마나 아저씨가 올 때가 있는데, 아줌마는 꽤나 꼼꼼하게 청소 상태를 본다.
어쨌거나 청소를 시작할 시간이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 가까워진 시간. 일하는 중간중간, 졸음이나 입이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군것질거리를 종종 사먹곤 한다. 초콜렛이나 빵 같은. 사실 이거 때문에 살도 조금 쪘다. 3킬로 정도. 다시 빼면 되지 뭐, 하는데 저번에 민주가 그랬다.
"편의점 음식으로 찐 살은 진짜 안 빠져요. 알아요? 나 이 일 하기 전에 오십이킬로였어요"
뭘 얼마나 먹었기에, 하고 되묻고 싶었지만 당연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단지 조금 군것질거리를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할 뿐.
일출을 본다. 언제나처럼. 그리고 새삼 아침에 바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해가 뜬 직후인데도 벌써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게에 와서 편시락을 집어 들기도 하고, 담배도 찾고,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도 산다. 물티슈도 사고, 라면을 먹고 가기도 하고.
이제 몇 시간 후면, 민주가 온다. 교대를 하고, 나는 피곤한 몸을 뉘이러 갈 것이다. 달콤한 잠을. 달콤함 속에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있지만, 오늘은, 아니 어쩌면 내일은… 조금 다르다. 지난 번의 면접은 좀 잘 봤으니까.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하며, 오늘은 정말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 단잠을 이룰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 fin -
"음"
편의점 통유리에 흐르던 빗줄기는 이미 물벼락이 흐르는 수준이고, 편의점 안의 공기는 에어컨 때문에 으실으실함을 느낄 정도로 추워진다. 나는 이윽고 카운터 자리에 앉아 인터넷을 하염없이 훑는다. 오늘의 내 하루가 흐르듯이.
밤의 편의점에는
딸랑-
"어서오세요"
딸랑 소리에 맞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밤 12시를 10여분 남겨둔 지금, 언제나처럼 삐쩍 곯은 그 아줌마가 들어온다. 나이는 4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워낙에 곯은 인상에 나이 파악이 어렵다. 어쨌든 가게 안을 비척대는 걸음으로 반바퀴 휘 돌던 그녀는 매대에 남은 김밥 한 줄을 고른다. 아마도 그녀의 딸이 먹을 식사일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삼각김밥 두 개 묶음과 2단 도시락을 고른다. 그리고는 여지없이 소주 한 병과 간식용 소세지 몇 개를 집어든다.
"만 이천원입니다"
그녀는 품에서 카드 한 장과 동전 몇 개를 꺼낸다. 술은 현찰로, 나머지는 그녀의 카드로 결제한다. 신용카드가 아니다. 꿈나무 카드…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식대 지원 복지제도다. 하루 1만원 한도의 식대 지원 카드이지만 나는 그 아줌마의 딸이 저 카드로 만원어치의 식사를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매번 저 아줌마가 와서 천 몇 백원짜리 김밥 나부랭이와 술안주를 사는 모습만을 보았을 뿐이니까.
"감사합니다"
계산을 마치고도 그녀는 가게를 바로 나서지 않는다. 가게 한 켠의 라면 식사대에 가서 언제나처럼 2단 도시락을 분리한다. 밥은 다시 뚜껑을 닫아 챙기고, 반찬만 전자렌지에 돌린다. 2분 여의 시간이 지나자, 익숙한 손길로 그녀는 데운 반찬 등을 들고 가게를 나가 바로 앞의 파라솔 자리에 앉는다.
"또 오세요"
나는 그녀를 계속 눈으로 힐끔힐끔 좆는다. 하류인생들의 모습이다. 그녀는 파라솔 의자에 앉아, 살짝 잦아든 비를 바라보며 소주를 딴다. 그리고는 데운 도시락 반찬과 삼각김밥과 소세지를 안주로 술을 즐긴다. 예전에는 소주에 먹기에는 조금 과한 안주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언젠가 허겁지겁 삼각김밥을 베어무는 모습에 깨달았다. 아마도 저 여자는 저게 하루에 먹는 식사의 전부일 것이다. 술과 삼각김밥과 소세지와 편시락 반찬 몇 가지. 그 짠 반찬들 말이다. 내가 본 것만 근 석달 째니 저 여자의 신장은 멀쩡할까, 아니 그 전에 간은 멀쩡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다시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어서오세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딸랑 하는 소리에 다시 눈을 문으로 돌리지만, 좀 전의 그녀다. "공병이요" 하고 근 30여 분만에 비운 소주 공병을 100원에 받아간다. 공병 값이 오른 뒤로 이 편의점을 찾는 수많은 '주당'들이 소주병을 모아오곤 한다. 가끔은 바코드가 없는 업소용 공병을 들고 와 돈 달라고 빡빡 우기다가 씩씩대며 돌아가는 이들도 있는데,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어디 술집에 가서 술 퍼마시다가 그 놈의 돈 100원 받을라고 소주 공병을 가방에 싸올 생각을 할까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안쓰러울 지경이다.
"이거, 포인트 적립해주세요"
아까 꿈나무 카드로 결제한 영수증을 들고 와서 내민다. 나도 순간 아차 싶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편의점 포인트 카드에 아까 구매한 내역을 포인트로 적립한다. 이윽고 여자는 다시 비척비척 저쪽으로 걸어가더니…
"이거 계산해주세요"
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맥주 한 병을 추가로 집어온다. 이번에는 편의점 적립카드로 계산한다. 딸내미의 꿈나무 카드로 이것저것 결제를 하고, 그렇게 적립되는 편의점 포인트로는 술을 산다. 꿈나무 카드로는 술을 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제를 마치고, 여자는 그녀의 딸이 먹을 김밥을 들고 집으로 향한다. 아니 집으로 향하는지조차 확실하진 않다. 저렇게 갔다가 두어 시간 후에 왠 아저씨들이랑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와 술을 또 빨아대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미쳤어, 미친 인간들이야"
그녀가 나가고 나는 중얼거린다. 낮도 아니고 밤 12시 다 된 시각에 와서-절대로 12시를 넘기지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저 카드의 금액이 리셋되니까 1만원을 그냥 허공에 날리는 셈이 되어버린다- 아이의 김밥을 사간다면, 아이는 도대체 이 시간까지 무엇을 먹는 것일까.
"점심 급식을 먹는다고 쳐도 말이지"
하루 한 끼에 김밥 한 줄… 거기에 라면을 끓이고 저 도시락 맨밥을 투하해서 추가로 한 끼? 그야말로 탄수화물 폭탄일텐데. 게다가 이 시간이라면. 여자는 한 눈에 보아도 알콜중독이다. 그리고 이 동네에는 저런 사람이 꽤 된다. 자식의 밥값에 손을 대는 인간들.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생필품을 사는 거라면 이해라도 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입에 들어갈 술안주를 산다. 술은 못 사니까. 가격이 제법 센 육포 같은 것은 못 사고, 그저 편시락 반찬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스마트폰 한 대씩은 들고 있다. 그것도 일종의 복지제도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간에 말이다. 하기사, 가끔 오는 노숙자들도 휴대폰 하나씩은 다들 들고 있는 모습 보고 기가 막힌 적도 있었다.
"여, 담배 줘 봐 담배"
비가 조금 잦아들자 손님들이 다시 늘기 시작한다. 새벽 3시에 만취한 채로 담배를 요구하는 이 아저씨.
"어떤거 드릴까요?"
"담배 달라고"
"어떤 담배 드릴까요?"
"아 담배 달라고!"
…가끔 이런 병신들이 있다. 생각보다 많다. 진상이나 병신들. 전체 편의점 고객이 100명이라고 치면 그 중에 대여섯명은 확실히 병신이다. 특히 이런 심야 시간대는. 가끔은 병신율이 20% 가까이 치솟으며 짜증이 폭발하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은 정말 피곤한 날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의 요구대로 '아무거나' 집어든다. 에쎄 프라임을 집어든다. 이런 경우 보통 던힐 6미리나 팔리아먼트 아쿠아5를 집어들면 대충은 아다리지만, 이런 아재들은 에쎄가 취향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육두문자를 추가로 뱉으며 그제서야 "던힐 육미리"를 외친다. 나는 묵묵히 터져나오는 그의 쌍욕을 몇 마디 더 들으며, 카운터 테이블에 흩뿌려진 동전을 헤아린다.
새벽 3시, 김밥 폐기가 나오는 시간이지만 오늘은 폐기가 없다. 아까 그 아줌마가 집어간게 마지막이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딱 두 달 만에 편시락이나 김밥에는 질려버렸으니까. 이젠 폐기가 나와도 안 먹는다. 그냥 아침 시간대의 민주에게 먹으라고 냅두곤 한다. 문득 나는 이렇게 불과 두달 만에 질려버렸는데, 그걸 몇 달, 어쩌면 몇 년을 먹고 있는 그 아줌마의 딸은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니 조금 소름이 돋는다.
하기사 입맛 나름인지도 모른다. 아침 타임의 알바 민주는 1년 넘게 이 일을 했다고 하면서도 편의점 폐기음식을 없어서 못 먹는다니까. 걔도 집에 아빠가 없는 편모가정이랬다. 아니 그게 편부가정인가? 모르겠다. 아프리카 TV의 광팬인 그녀는 매번 교대 시간이면 그녀가 즐겨보는 몇 개 채널의 BJ 이야기들로 인사를 대신하곤 하는데, 그런 것에 관심이 요만큼도 없는 나로서는 정말 그 이야기 들어주는 것도 곤욕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끔 일이 있어서 근무를 부탁할 사람도 그녀 뿐인 것을. 구태여 척을 질 필요가 없다. 당장 지난 주의 면접도 그녀 덕분에 겨우 볼 수 있었지 않는가.
딸랑-
"어서오세요"
또 손님이다. 이번에는 제법, 섹시하게 입은 만취 손님 셋이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과한 화장…. 아마도 20대 초반쯤? 무어가 그리도 웃긴지 물건 고르면서도 지들끼리 한참을 깔깔대다가 결국 생리대와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골라 나간다.
사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그저 계속 서서 바코드만 찍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온갖 잡무가 많다. 물건 들어오는거 채워넣는 것도 제법 큰 일이다. 엄청 귀찮은. 청소도 그렇고. 종종 민주가 빵꾸를 내는 날 갑자기 주인 아줌마나 아저씨가 올 때가 있는데, 아줌마는 꽤나 꼼꼼하게 청소 상태를 본다.
어쨌거나 청소를 시작할 시간이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 가까워진 시간. 일하는 중간중간, 졸음이나 입이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군것질거리를 종종 사먹곤 한다. 초콜렛이나 빵 같은. 사실 이거 때문에 살도 조금 쪘다. 3킬로 정도. 다시 빼면 되지 뭐, 하는데 저번에 민주가 그랬다.
"편의점 음식으로 찐 살은 진짜 안 빠져요. 알아요? 나 이 일 하기 전에 오십이킬로였어요"
뭘 얼마나 먹었기에, 하고 되묻고 싶었지만 당연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단지 조금 군것질거리를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할 뿐.
일출을 본다. 언제나처럼. 그리고 새삼 아침에 바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해가 뜬 직후인데도 벌써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게에 와서 편시락을 집어 들기도 하고, 담배도 찾고,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도 산다. 물티슈도 사고, 라면을 먹고 가기도 하고.
이제 몇 시간 후면, 민주가 온다. 교대를 하고, 나는 피곤한 몸을 뉘이러 갈 것이다. 달콤한 잠을. 달콤함 속에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있지만, 오늘은, 아니 어쩌면 내일은… 조금 다르다. 지난 번의 면접은 좀 잘 봤으니까.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하며, 오늘은 정말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 단잠을 이룰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