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결에 돌리던 채널 속에서 남녀의 격렬한 말다툼이 벌어지는 드라마 장면이 나온다. 남의 싸움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기에 채널을 멈췄지만 바로 그것이 함정이었다.
"너는 실수였다고 말하지만… 그건 나한테 피가 쓸려나가는 고통이었어. 알아? 한번이라도… 단 한번이라도! 내 마음 이해해 본 적 있어?"
한참을 소리치던 여주인공은 털썩 주저앉으며 비명에 가까운 한탄을 쏟아낸다. 피같은 눈물이 그녀의 아이라인을 망치며 줄줄 흘러내리고 남자 주인공은 당혹스러워 하는데, 상황을 휘어잡는 그 살아있는 연기가 TV를 넘어 너와 내가 있는 공간마저 얼려 버리고야 만다.
"흠"
나는 스윽 채널을 돌리지만 뒤에서 "왜 돌려! 다시 틀어 봐, 그거" 하고, 어느새 차가워진 목소리의 네가 입을 연다. 대답 대신 다시 채널을 돌리노라니 여주인공은 주저 앉아 엉엉 울고 있고, 남자 주인공은 "아, 제발 좀. 그만 좀 해!" 하고 소리치며 걸어가는데, 드라마답게 비가 쏟아지고 여주인공의 비참함은 극대화 된다.
방금 전까지 더워 죽을 것 같았던 열기가, 당장이라도 덮쳐서 운우의 정을 나누기 직전이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단박에 날아가고 나는 어느새 에어컨 바람이 혹한기의 칼바람마냥 춥게 느껴져 팔과 등에 소름이 돋고 있다. TV 속 드라마도 이미 장면이 전환되어 식사 장면이 되어 있건만, 나는 아직도 고개를 돌려 너를 보기가 두렵다.
"뭐라도 시켜먹을까"
식사를 제안하지만 수연은 여전히 대답 대신 고개를 젓는다. 나는 마른 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리지만 무어라 할 말은 없다.
"흐음"
나는 그저 말 없이 휴대폰을 만지지만, 딱히 무엇을 할 수도 없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어느새 오전 11시 반이던 시간은 오후 2시가 다 되어간다. 피곤함과 배고픔과 짜증이 함께 하는 시간.
"미안해"
뜬금없이 던지는 나의 사과. 그럴 수 밖에. 물론 대답은 없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앉은 그녀는 그 후로도 한참을 그러고 있다 입을 연다.
"배고프면 너 혼자 뭐 사먹어"
그리고 수연은 침대로 가서 눕는다. 나는 여전히 침대 옆에 걸터앉아 아무 말 없이 그냥 그렇게, 허무한 시간을 흘려보낸다. 오후 3시가 되었을 무렵, 나는 어쩔 수 없이 냉장고 앞 중국집 번호를 확인하고 주문을 한다.
"예, 1번 세트로, 탕수육에 짜장 하나, 짬뽕 하…"
하지만 나의 주문은 완성되지 못했다. "안 먹는다고!"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 네 목소리에 나 뿐 아니라 전화기 너머의 사장님까지 놀랐을테니까. 나는 다시 "미안합니다. 나중에 다시 할께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그냥 나는 니가 배고플 거 같아서, 그래서 주문했던건데…"
"오빠는 내가 어떤 것 같아?"
지금껏 수천번 가까이 들었던 질문. 그리고 그 어떤 답을 해도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었던 질문. 나는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아까 그 드라마 보면서 또 안 좋은 생각… 났겠지. 그… 크흠, 미안해"
어느새 나는 손까지 모으고 있다. 수연은 차가운 눈으로 날 바라보다 또 그 대사를 꺼낸다.
"오빠는 몰라, 정말 하나도 몰라. 내가 어떤 기분이었고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렇게, 아침 11시에 우연찮게 TV 드라마의 30초 장면 때문에 시작되어 지금 이렇게 밤 11시까지 이어지고 있는 냉전과 834차 세계대전과 이후의 신냉전, 그리고 이 우울한 기분. 그녀는 울다 지쳐 침대 구석에 얼굴을 묻고 자는지 자는 척 하는 것인지 모를 상황이고, 나는 침대에 몸을 기댄 채로 가만히 저 장판 한 구석을 쫒는다.
아까 그녀는 급기야 그런 말까지 했었다.
"내 친구들이 다 그래. 오빠랑 그냥 헤어지라고. 한번 바람 피운 새끼는 또 바람 피운다고. 그리고 깨진 신뢰는 복구 되는게 아니라고. 그리고 기억들이 잊혀지지를 않아. 점점 더 선명해진다고. 매일 매일이 죽을 것 같이 힘들어. 나 이러다 죽을 것 같다고!"
다시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래서 몇 번인가 너를 놓으려 했다. 다 내 잘못이고, 어차피 다 끝난 거, 미련으로 붙잡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뭐해. 바닥에서 그러고 잘거면 올라와서 자"
어느새 나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쓰읍 침을 닦고, "응 자야지" 하고 침대 위로 오른다. 수연은 내 배게를 건내고, 나는 눕는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그녀가 사과한다.
"미안해"
하지만 그녀가 사과할 일 자체가 아니다.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있다면 나같은 놈을 좋아했다는 것이 죄겠지.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자 수연이 말했다.
"오늘 못 간 에버랜드는 내일 가자"
나는 대답 대신 그저 어둠 속에서 고개만 끄덕인다. 그리곤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는다. 그렇게 십여 분, 하루종일 울다 지친 수연은 금새 다시 잠이 든다.
깨진 유리잔은 다시 붙지 않는다. 하지만 너와 나의 인연은 유리보다 강하다. 그리고 부러진 뼈는 다시 붙었을 때 더 강하다고 하지 않는가. 다시는, 다시는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렇게 잡은 손을 부드럽게 다시 꼬옥 쥐어본다.
설령 언젠가 네가 힘들어 나를 놓아버린다 해도, 결코 내가 먼저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짐하며 말이다.
"너는 실수였다고 말하지만… 그건 나한테 피가 쓸려나가는 고통이었어. 알아? 한번이라도… 단 한번이라도! 내 마음 이해해 본 적 있어?"
한참을 소리치던 여주인공은 털썩 주저앉으며 비명에 가까운 한탄을 쏟아낸다. 피같은 눈물이 그녀의 아이라인을 망치며 줄줄 흘러내리고 남자 주인공은 당혹스러워 하는데, 상황을 휘어잡는 그 살아있는 연기가 TV를 넘어 너와 내가 있는 공간마저 얼려 버리고야 만다.
"흠"
나는 스윽 채널을 돌리지만 뒤에서 "왜 돌려! 다시 틀어 봐, 그거" 하고, 어느새 차가워진 목소리의 네가 입을 연다. 대답 대신 다시 채널을 돌리노라니 여주인공은 주저 앉아 엉엉 울고 있고, 남자 주인공은 "아, 제발 좀. 그만 좀 해!" 하고 소리치며 걸어가는데, 드라마답게 비가 쏟아지고 여주인공의 비참함은 극대화 된다.
방금 전까지 더워 죽을 것 같았던 열기가, 당장이라도 덮쳐서 운우의 정을 나누기 직전이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단박에 날아가고 나는 어느새 에어컨 바람이 혹한기의 칼바람마냥 춥게 느껴져 팔과 등에 소름이 돋고 있다. TV 속 드라마도 이미 장면이 전환되어 식사 장면이 되어 있건만, 나는 아직도 고개를 돌려 너를 보기가 두렵다.
깨진 유리잔
"뭐라도 시켜먹을까"
식사를 제안하지만 수연은 여전히 대답 대신 고개를 젓는다. 나는 마른 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리지만 무어라 할 말은 없다.
"흐음"
나는 그저 말 없이 휴대폰을 만지지만, 딱히 무엇을 할 수도 없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어느새 오전 11시 반이던 시간은 오후 2시가 다 되어간다. 피곤함과 배고픔과 짜증이 함께 하는 시간.
"미안해"
뜬금없이 던지는 나의 사과. 그럴 수 밖에. 물론 대답은 없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앉은 그녀는 그 후로도 한참을 그러고 있다 입을 연다.
"배고프면 너 혼자 뭐 사먹어"
그리고 수연은 침대로 가서 눕는다. 나는 여전히 침대 옆에 걸터앉아 아무 말 없이 그냥 그렇게, 허무한 시간을 흘려보낸다. 오후 3시가 되었을 무렵, 나는 어쩔 수 없이 냉장고 앞 중국집 번호를 확인하고 주문을 한다.
"예, 1번 세트로, 탕수육에 짜장 하나, 짬뽕 하…"
하지만 나의 주문은 완성되지 못했다. "안 먹는다고!"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 네 목소리에 나 뿐 아니라 전화기 너머의 사장님까지 놀랐을테니까. 나는 다시 "미안합니다. 나중에 다시 할께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그냥 나는 니가 배고플 거 같아서, 그래서 주문했던건데…"
"오빠는 내가 어떤 것 같아?"
지금껏 수천번 가까이 들었던 질문. 그리고 그 어떤 답을 해도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었던 질문. 나는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아까 그 드라마 보면서 또 안 좋은 생각… 났겠지. 그… 크흠, 미안해"
어느새 나는 손까지 모으고 있다. 수연은 차가운 눈으로 날 바라보다 또 그 대사를 꺼낸다.
"오빠는 몰라, 정말 하나도 몰라. 내가 어떤 기분이었고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렇게, 아침 11시에 우연찮게 TV 드라마의 30초 장면 때문에 시작되어 지금 이렇게 밤 11시까지 이어지고 있는 냉전과 834차 세계대전과 이후의 신냉전, 그리고 이 우울한 기분. 그녀는 울다 지쳐 침대 구석에 얼굴을 묻고 자는지 자는 척 하는 것인지 모를 상황이고, 나는 침대에 몸을 기댄 채로 가만히 저 장판 한 구석을 쫒는다.
아까 그녀는 급기야 그런 말까지 했었다.
"내 친구들이 다 그래. 오빠랑 그냥 헤어지라고. 한번 바람 피운 새끼는 또 바람 피운다고. 그리고 깨진 신뢰는 복구 되는게 아니라고. 그리고 기억들이 잊혀지지를 않아. 점점 더 선명해진다고. 매일 매일이 죽을 것 같이 힘들어. 나 이러다 죽을 것 같다고!"
다시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래서 몇 번인가 너를 놓으려 했다. 다 내 잘못이고, 어차피 다 끝난 거, 미련으로 붙잡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뭐해. 바닥에서 그러고 잘거면 올라와서 자"
어느새 나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쓰읍 침을 닦고, "응 자야지" 하고 침대 위로 오른다. 수연은 내 배게를 건내고, 나는 눕는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그녀가 사과한다.
"미안해"
하지만 그녀가 사과할 일 자체가 아니다.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있다면 나같은 놈을 좋아했다는 것이 죄겠지.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자 수연이 말했다.
"오늘 못 간 에버랜드는 내일 가자"
나는 대답 대신 그저 어둠 속에서 고개만 끄덕인다. 그리곤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는다. 그렇게 십여 분, 하루종일 울다 지친 수연은 금새 다시 잠이 든다.
깨진 유리잔은 다시 붙지 않는다. 하지만 너와 나의 인연은 유리보다 강하다. 그리고 부러진 뼈는 다시 붙었을 때 더 강하다고 하지 않는가. 다시는, 다시는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렇게 잡은 손을 부드럽게 다시 꼬옥 쥐어본다.
설령 언젠가 네가 힘들어 나를 놓아버린다 해도, 결코 내가 먼저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짐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