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김박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바텐더 테이블에 앉아있던 김주형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잡지에서 몇 번인가 사진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보다는 전형적인 룸펜 느낌이 났으니까. 다가가서 손을 내밀며 인사를 하자 그는 "오우"
하고 살짝 과장된 표정으로 놀라면서 내 악수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김주형입니다, 빨리 오셨네요, 저쪽으로 자리를 옮기죠"
내가 올 것을 대비해서 미리 테이블을 세팅해놓았던지 그는 구석의 좋은 자리로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던 승주와,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 하나도 함께 자리를 옮겼다.
"오빠 안녕, 이쪽은 내 친구 혜미"
"반갑습니다"
"승주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엄청 재밌으시다면서요?"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기대하시면 또 영 재미없어요"
나의 말에 그녀도 미소지어주었다.
구석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야근을 하고 출출해서 우동이나 한 그릇 먹고 갈까 하고 회사 앞의 심야
일식집으로 향하던 차, 간만에 승주한테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고 전화를 받았는데 지금 서초역 근처인데
혹시 올 수 있냐는 것이다. 알았노라며 가겠다니까 통화가 끝나자마자 카톡으로
[ 나 지금 누구랑 술 마시는 줄 알아? 김주형이랑 마시고 있어ㅋㅋ 빨리 와 오빠 이야기하니까 보고 싶대 ]
라는 것이 아닌가. 순간 김주형이 누군가, 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노라니 그녀가 [ 그, '에드쉬버'의 섹스
칼럼니스트 있잖아 ] 하고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허.
남성잡지 애드쉬버의 김주형이라… 평소 가끔 잡지를 보다가도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한편으로는 '섹스 칼럼니스트' 곁에 승주가 있다니 조금 기분이 껄쩍지근한 것이 묘한 질투가 일었다.
하지만 질투는 열등의 감정이다. 나는 "후!"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쉰 후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가 기다리는
바 '리버스'로 향한 것이다.
"뭐 드시겠어요?"
"음, 저는 그냥 진 토닉이요. 저 오기 전에 많이 드셨나요?"
"아뇨, 겨우 우리도 칵테일 한잔씩 했을 뿐이에요 그쵸 승주씨?"
섹스 칼럼니스트 김주형. 여자들이 보는 눈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남자가 보기에는 글쎄. 뭐…음.
뭐 보통, 아니 뭐 그래, 확실히 깔끔하고…매력적인 외모인 것 같다. 키는 180 중반의 훤칠한 키에 살짝
폄하하지면 '삐쩍 꼻은' 마른 몸, 하지만 하얗고 뽀얀 피부에 살짝 유들유들하게 장난끼 있어보이는
얼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깔끔하게 갈무리하면서도 글쟁이 특유의 곤조를 보여주는 검은 뿔테.
오래 입었음이 분명한 청바지에 살짝 접어신은 구두도… 흠, 이 날씨에 맨발, 구두를 접어신다니 컨셉
인지 뭔지 조금은 실소가 나왔고, 또 묘하게 아직은 조금 미숙한 간지, 조잡하게 스타일을 꾸며낸 티가
조금은 났지만, 그래도 여튼 이 정도면 적당히 '섹스 칼럼니스트'에 어울리는 외모였다.
'흠'
하지만 어느 틈엔가 승주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은근하게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이, 글쎄. 꽤나 눈에
거슬렸다. 물론 재빠르게 슬쩍 쇼파 뒤로 팔을 뻗었다가 다시 그 스킨십을 거두고는 휴대폰을 확인하긴
했지만 그런 적절한 치고 빠지기도 거슬렸다.
'처음부터 적대할 필요 없잖아'
나는 조금 빙 둘러서, 맞은 편의 그 둘보다는 내 옆 자리에 앉은 혜미에게 다시 시선을 주기로 했다.
승주보다도 더 키도 크고 늘씬한데다 금발로 염색한 긴 머리를 살짝 틀어올린 스타일이 조금은 이국
적이기까지 한 그녀. 바로 옆 자리인데다 조금 부담스러운 의상을 입어서 시선을 주기가 어려웠지만
일단은 김주형에게 어떤 식으로 접근할까 정하기 전까지는 혜미와 물꼬를 트자.
"혜미씨? 둘이 어떻게 친구에요? 대학교?"
혜미와 승주를 번갈아가며 물어보자 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같은 과야. 맨날 같이 다니는 단짝. 저번에 말했던 그 파티녀가 얘야"
"어머 너 무슨 말을 하고 다닌거야ㅋㅋ 박스 오빠 저 그런 애 아니에요ㅋㅋ"
내가 '씨'라고 말을 걸었음에도 바로 '오빠'로 상황 정리를 하는 그녀의 스킬에 나는 내심 속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센스 좋네.
"별 말 못 들었는데? 파티녀의 전설이 뭔데? 어?"
웃으며 묻자 "어머 진짜 별 거 아니에요ㅋㅋ 야, 너 왜 그런 말을 해" 하고 혜미는 당황하며 웃고,
승주는 "아, 내가 제대로 말 안했나? 얘 대박이에요. 작년 연말에, 12월 20일부터 31일까지 거의 2주를 계속
클럽에 호텔 파티에 맨날 파티, 행사는 다 찾아다니다가 기어코 무리해서 쓰러졌는데 그 쓰러진 날도
링겔 3시간 맞고 또 클럽 가서…"
승주의 폭로에 우리는 내심 살짝 놀라면서도 너무 즐겁게 웃었다. 혜미는 손부채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너 진짜 자꾸 나 이미지 망가뜨린다? 그럼 나도 너 맨날…"
주거니 받거니 폭로전이 시작될 조짐에 마침 내 웨이터가 내 진토닉을 한잔 가져다주었고 그 즈음해서 난
주형에게 말했다. 조금 뻔하고 새삼스럽지만.
"잡지는 잘 보고 있습니다. 매달은 못 봐도, 손에 잡히는대로 자주 보고 있어요. 글 보면 참 기가 막히게
여자들 꼬시시더라구요, 항상 존경하고 있습니다, 하하"
사실은 미용실 갈 때마다 보니까 거의 매달 꼬박꼬박 보는 셈이지만. 그리고 이어서 뻔한 빈 말로 살짝
똥꼬를 긁어주었다.
"아휴 아니에요, 그거 다 태반은 적당히 구라에요, 구라. 아 정말 그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무슨 뭐 완전
바람둥이처럼 생각해서 정작 실제로는 연애도 하기 힘들어요"
하기사 한낱 블로그 운영하는 나도 가끔은 블로그 때문에 생 엉뚱한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하물며 잡지에
대놓고 섹스 칼럼을 쓰는 사람에 대한 오해야 오죽할까.
"아니 그래도 저같은 찌질이보다는 훨씬 많은 '경험'과 '경륜'이 있으시지 않겠어요?"
여성편력에 대한 남자들의 그 어쩔 수 없는 '허세'를 한번 툭 찔러보았다. "어머 오빠가 무슨 찌질이야.
…완전 매력남이지" 하고 승주가 도움 안 되는 내 편을 들어주었지만-기분은 좋았다- 바로 그 덕분인가
김주형이 고개를 저으며 '자랑'을 했다.
"어휴 아니에요. 뭐 그냥, 남들만큼, 어쩌면 남들보다 쪼금 더 많은 경험을 했을 뿐이죠 뭐. 그냥 마음이
맞으면 길게 사랑도 하고, 몸이 맞으면 짧게 만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 뭐 이 정도면 자랑은 아니려나. 여튼 난 한번 더 물어보았다.
"여자친구 분은 있으세요?"
있어도 없다고 할테고, 정말로 없을 수도 있고.
"없습니다. 현재는"
현재는, 이라고 하는 부분이 좀 재수가 없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이며 난 내 잔을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승주가 주형에게 말을 했다.
"우리 박스 오빠도 글 쓰는 사람이에요. 재미나는 글도 많이 쓰고, 막 장르를 넘나들어요, 아 얼마 전에는
책도 냈어요"
나는 보았다. 승주의 자랑에, 그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말에 살짝 눈이 가늘어지며 나를 보는 주형의
자세가 이전의 그 다소 거만하기까지 한-아, 그래 왜 초면부터 기분이 안 좋았나 했더니 이제보니까 그
다리 꼬고 묘하게 건방지게 앉아있는 자세가 거슬렸나보다- 그 자세에서 조금은 진지한 자세로 바뀌
었다. 거기서 살짝 기분이 좋아졌지만…
"아, 전업 작가분이셨나요?"
하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승주가 띄워줬을 뿐입니다. 직업은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고, 가볍게 블로그에 별 실없는
똥글이나 올리는거죠 뭐"
'똥글'이라는 표현에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아 그래도 책까지 내셨다고…" 하고 다시 묻는 그. 아무
래도 나의 글이 궁금한 모양이다.
"뭐 그냥, 기회가 닿아서…좋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기회가 닿았을 뿐입니다"
하고 나는 그저 겸손하게 나를 낮추었다. 그는 싱긋 웃으면서 "그럼 그 블로그 주소라도 나중에 알려주
세요. 꼭 한번 접속할께요" 라고 말했다. '꼭 한번'이라는 말은 '이 말은 빈말' 이라는 말의 축약어. 나는
"그러죠" 하고 다시 한 모금 술을 마셨다.
그때부터 나는 살짝 기운이 빠져 셋과 적당히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바의 잔잔한 음악에 취해갔다. 뭐
야근까지 했던 터라 피곤했던 것도 있고, 승주가 마치 락 스타를 앞에 둔 그루피라도 된 양 어느새 주형
의 어깨동무를 뿌리치지 않고 있기에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살짝 민망했던지 혜미가 또 몇 마디 별 의미
없는 학교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흠'
왠지 괜히 왔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오래간만에 승주와… 아니 뭐, 그거까지 생각은 안 하더라도
그냥 그래, 얼굴이라도 보고 살갑게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이게 뭔가. 무슨 들러리 서로 나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뭐 기깟해야 잡지에 글이나 기고하는 자지 새끼, 뭐 씨팔 연봉이 몇 천씩 돼?
그래봐야 룸펜 나부랭이지. 씨발. 감히, 아니 감히랄 것까진 없겠지만, 승주 어깨에 손을 올리고. 후,
좆같네.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좀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
'취하고 싶다'
내일은 출근해야 되는데. 시계는 뭐 아직 새벽 1시 20분. 시간은 많다. 간만에 끊은 담배가 땡겼다.
살짝 취기가 느껴졌다. 아니 솔직히 좀 취했다. 그것도 나 혼자. 아닌가? 나 혼자 취한거 맞나?
"흠, 그러고보니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가장 기초적인 것도 안 물어보고 있었네. 그래, 너 몇 살이나 쳐먹었냐.
"서른 넷입니다"
서른 넷? 씨팔, 서른 넷이나 쳐먹은 새끼가… 하릴없이 온 국민이 보는, 아니 몇 명이나 본다고 그래 뭐
온 국민은 아니지. 여튼, 사람들 다 보는 잡지에다가 지 섹스 경험이나 쳐찌끄린단 말인가? 순간 나도
조금 찔렸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소설이고, 취미활동이니까… 또 그게 직업은 아니잖아 나는. 하고 애써
변명을 하면서 김주형을 까내리고 싶어졌다.
"여기, 진 토닉 한잔 더요, 그리고 물도 좀 주세요"
"네에"
혀가 꼬여가는 것을 애써 힘주어 또박또박 발음하고, 물도 달라고 했다. 나는 잠시 화장실을 가야겠다
싶어서 몸을 일으켰다. 살짝 심호홉을 하고, 다시 취하지 않은 양 정신을 좀 차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쏴-
세수를 하고 나니 조금 정신이 든다. 후, 방금 나는 무슨 추태를 부린거야. 정신차려 김박스. 이 병신새끼.
계집 하나 때문에 질투에다 흐트러지기까지. 정신챙겨. 그래, 잘하자. 어쨌든 나는 나고, 뭐, 아쉬울 거
없잖아. 원래 1년에 한두번 볼까 말까한 년인데 뭐. 정신차려 임마.
나는 거울을 보며 마음을 새로했다. 화장실 환풍기 틈으로 쌔한 바람이 가늘게 한줄기 흘러들어왔고 난
그제사 정신을 차렸다. 뚜벅뚜벅 제자리로 돌아오자 혜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박스 오빠 정말 바람둥이에요? 정말로?"
아 승주 이 기집애 또 뭔 허풍을 쳐놓은거야. 나는 픽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바람둥이는 무슨. 야 나 완전 개순정남이야 리얼. 21세기에 찾아보기 힘든, 막 호구? 그래 호구야 호구"
그래, 씨발 내 스타일로 간다. 허세 버려. '호구' 라는 말에 혜미와 승주는 웃었고 "아 말도 안돼" 하면서
혜미는 내 팔을 새삼 툭툭 친다. 그러고보니 혜미 얘도 이쁘긴 참 이쁘네. 나는 다시 썰을 풀었다.
"야 근데 진짜 여자들도 너무해 증말. 나쁜 남자 나쁜 남자하는데 솔직히 니네가 찾는 그 나쁜 남자가
막 진짜 나쁜 남자가 아니잖아. 그냥 멋있고 매력적인데 너네한테 잘해주는게 아니니까 나쁜 남자가
되는거지 안 그래?"
나의 말에 혜미는 "으악 정곡이다" 하면서 웃어주었고, 그렇게 테이블의 분위기는 서서히 이쪽으로 다시
넘어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어깨동무를 하며 승주의 반대편 팔뚝을 쓰다듬던 주형의 팔은 어느새 다시
지 무릎 위로 돌아가 있었고, 의자에 푹 앉아있던 승주 역시 이쪽에 몰입을 하기 시작했다.
"야 근데 솔직히 너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아마 너네가 슬슬 직장생활하면 알거야.
호구 같은 남자 하나, 아 물론 암만 호구에 찌질이라도 뭐가 기반은 있어야겠지. 여튼 그런 남자 하나
하나 키워가는 맛도 그거 쏠쏠하다?"
나는 어느새 반 이상 비운 잔을 들이키며 이번에는 얼음물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영화 프리티우먼을 보면, 여자들은 그 멋진 리처드 기어가 줄리아 로버츠 인생을 딱 역전시키는거
보고 그 공주님이 되는 줄리아 로버츠의 삶에 감정이입하며 좋아라 하는데, 사실 프리티우먼은 거
남자들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뭔 소린고 하는 표정의 그녀들에게 나는 또 설명을 해주었다.
"성공해서, 자기 여자 하나 딱 제대로 호강시켜주고 환골탈태 시켜서 세상에서 제일 멋진 공주님으로
만들어주는거, 그게 얼마나 멋있냐? 이거는 남성 판타지기도 하단 말이지. 야, 로또가 딱 된다고 해봐.
나도 진짜 딱 우선 부모님 집 한채 딱 근사한 걸로 사드리고, 차도 기깔라는 걸로 딱 뽑고, 백화점 딱
너네 데리고 오늘 이 오빠가 뭐든 다 사준다! 하고 화려하게 다 카드로 좍좍 카드 다 갈릴 정도로 쏠텐데
말이야"
하고 말을 해놓고서는 곧 "…이래서 내가 호구야" 하고 또 농을 던진다. 승주와 혜미는 "아 오빠같은
호구 좋다 호구 좋아" 하고 내 팔을 붙잡고 조른다. "로또가 되면 말이지" 하는 내 말에 그녀들도 피식
웃었고 혜미는 자기 휴대폰을 내밀었다.
"오빠 번호 좀 찍어줘요"
"내 번호?"
나는 살짝 승주의 눈치를 살폈지만 승주는 개의치 않는 듯 자기 칵테일만 한 모금 쪼옥 빨았다. 또,
여자가 먼저 휴대폰을 내미는 모습에 살짝 나는 내심 뿌듯해하며 주형의 안색을 살폈지만 그 역시
딱히 뭔가 변화는 없었다. 아까의 열패감을 이번에는 놈이 속으로 맛보고 있는건가? 싶었지만 딱히
그럴 리야 없겠지.
혜미에게 번호를 찍어주자 혜미가 물었다.
"나 오빠한테 자주 전화해도 되죠?"
적극적이네.
"그래"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승주는 그때도 잠시 자기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을 뿐. 그때 주형이
"담배 한 대 피워도 되죠?"하고 양해를 구하며 뒤늦게 담배를 꺼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담배 안 피우시나요?" 하고 물었다. 나는 "끊었습니다" 하고 웃었다. 그는 "이야, 대단하시네요"
하고 순순히 감탄하는 듯 했지만 뭐 딱히.
'그 담배를 끊은 사연을 알면 더 놀랄 것이다' 하고 나는 속으로 씁쓸해 생각을 마치고는 잠시 휴대폰
을 확인했다. 어느새 새벽 2시가 넘었다.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내일 출근하자면. 물론 당연히
묘한 생각을 안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허튼 생각부터 하면 될 일도 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 잘
안다.
"그나저나 둘은 대딩이고, 내일 출근 안 하시나요? 저는 내일 회사가 있어서 슬슬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은데"
하고 주형에게 묻자, 주형도 "아 저는 뭐, 출근은 제 마음대로라서요" 하고 고개를 까딱했다. 쓰벌.
끝까지 얘네들하고 놀다 가겠다, 아니, 승주와 뭐 어떻게 해보겠다는건가? 하고 속으로 조금 띠꺼웠
지만 여튼 깔끔하게 일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아니 뭐 그럼 저희도 일어나죠. 오래 마셨는데"
승주가 자리를 정리하는 한 마디를 했다. 호오. 주형은 다소 낭패한 표정이었고 혜미도 갑작스럽지만
승주가 일어나자는데야. 그리고 내심 그녀도 차라리 그게 더 낫다고 생각했으리라.
"아 그럴까요?"
주형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넷은 카운터로 향했고 제일 카운터에 가까웠던 나는 어쩔 수
없이 계산을 했다. 내심 씨팔 김주형 이 새끼 돈도 잘 벌지 않나? 하면서 그 새끼가 계산해야 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티는 안 내고 그냥 내가 계산했다. 아 씨발 짠돌이 개새끼.
"7만 4천원입니다"
"여깄습니다"
카드로 결제하면서도 생각보다 많이 안 나왔지만 그래도 조금은 진짜 '호구짓' 한 거 같아서 기분이
뭐했다.
가게를 나와 "잘 마셨습니다", "잘 마셨어요", "오빠 잘 마셨어" 하는 인사들을 받고, 나는 또 따로 주형
에게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기회가 될지 모르겠지만 또 언제 이런 자리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냈다. 그 역시 "저도요" 하고 악수를 건냈다.
"다들 어느 방향으로 가시죠?"
주형은 그 말에-아마 분명히 승주와의 썸씽을 그 순간까지도 기대했으리라- 잠시 망설였지만 승주가
아무 반응이 없자 곧 "아 저는 강남쪽으로 갑니다" 하고 말을 했다. 혜미도 "저는 잠실이요" 하고 말했
고, 승주는 "난 여기서 금방이야. 방배동" 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럼 나랑 승주는 건너가서 타야되고,
둘은…아, 택시 온다. 혜미야 저거 타" 하고 택시를 잡았다.
"아싸, 그럼 다들 담에 또 봐요~"
하고 혜미는 재빨리 택시에 올랐다. 주형은 멍하니 서있다가 "아, 여튼 오늘 반가웠습니다. 그럼" 하고
곧이어 또 온 택시를 잡아타고 갔다. 나와 승주는 말없이 횡단보도 앞으로 걸어가서 신호를 기다렸다.
'…'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승주는 물었다.
"오빠 아까 왜 화났었어?"
"화? 내가?"
"어"
티가 났나. 표정 관리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승주는 픽 웃으면서 말했다.
"혹시 나 때문이야?"
나는 빼도박도 못하겠다 싶어서 나 역시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아까 그, 김주형이가 니 팔뚝 계속 쓰다듬길래 짜증나서 그랬다 왜"
그러자 승주는 빵 터져서 웃었다.
"아 웃겨, 아 오빠가 왜 질투를 하는데. 내 남자친구도 아니면서"
"그냥, 음, 나 너 좋아하잖니"
그러자 승주는 어느새 슬그머니 내 팔짱을 끼면서, 바뀐 신호등에 길을 함께 건너며 말했다. "내가 비밀
한가지 알려줄까?" 비밀?
"김주형이 누군지 알아?"
뭔소리야. 김주형이 김주형이지.
"칼럼니스트잖아"
그러자 그녀는 "땡!" 하더니 "혜미 사촌오빠야. 사실 나도 오늘 알았어" 하고 대반전을 말했다. 헐.
'하지만'
사촌이던 뭐. 어쨌든 느끼하게 니 팔뚝 만지작댄건 마찬가지잖아. 하지만 승주는 마치 내 속마음을 읽기
라도 하는 듯 말했다.
"내가 맨날 오빠랑 이렇게 만나도 오빠가 뭐 소 닭보 듯 해서, 맨날 나랑 잠만 자지 나랑 연애할 생각은 안
하길래 그 주혁이 오빠한테 물어보니까 질투심 자극해보라더라. 그러니까 단칼에 오빠가 땅!"
하…나를 시험해본건가. 조금은 부아도 나고, 문득 아까 모든 내 말부터 행동거지까지 모두 다 손발이 오그
라들고 민망해졌지만 그래도 내 옆에 승주가 있으니 싫진 않았다.
"너 대단하다"
"그럼, 내가 어떤 여잔데"
"나보다 몇 수는 고단수구나 너"
"그럼ㅋㅋㅋ"
길을 건너온 우리는 새벽의 서초역 앞에서,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키스를 나누었다.
"오빠는 내가 오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지?"
"그런 애가 분기에 한번이나 겨우 연락 하냐?"
"그건 오빠가 연락을 안 하니까"
우리는 손을 깍지껴서 잡고 택시를 기다렸다.
"이제는 자주 할께. 연락"
나의 그 말에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말했다.
"그 말, 믿어보겠어"
나는 픽 웃었고, 곧이어 도착한 택시에 우리는 함께 올랐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바텐더 테이블에 앉아있던 김주형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잡지에서 몇 번인가 사진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보다는 전형적인 룸펜 느낌이 났으니까. 다가가서 손을 내밀며 인사를 하자 그는 "오우"
하고 살짝 과장된 표정으로 놀라면서 내 악수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김주형입니다, 빨리 오셨네요, 저쪽으로 자리를 옮기죠"
내가 올 것을 대비해서 미리 테이블을 세팅해놓았던지 그는 구석의 좋은 자리로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던 승주와,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 하나도 함께 자리를 옮겼다.
"오빠 안녕, 이쪽은 내 친구 혜미"
"반갑습니다"
"승주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엄청 재밌으시다면서요?"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기대하시면 또 영 재미없어요"
나의 말에 그녀도 미소지어주었다.
구석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야근을 하고 출출해서 우동이나 한 그릇 먹고 갈까 하고 회사 앞의 심야
일식집으로 향하던 차, 간만에 승주한테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고 전화를 받았는데 지금 서초역 근처인데
혹시 올 수 있냐는 것이다. 알았노라며 가겠다니까 통화가 끝나자마자 카톡으로
[ 나 지금 누구랑 술 마시는 줄 알아? 김주형이랑 마시고 있어ㅋㅋ 빨리 와 오빠 이야기하니까 보고 싶대 ]
라는 것이 아닌가. 순간 김주형이 누군가, 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노라니 그녀가 [ 그, '에드쉬버'의 섹스
칼럼니스트 있잖아 ] 하고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허.
남성잡지 애드쉬버의 김주형이라… 평소 가끔 잡지를 보다가도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한편으로는 '섹스 칼럼니스트' 곁에 승주가 있다니 조금 기분이 껄쩍지근한 것이 묘한 질투가 일었다.
하지만 질투는 열등의 감정이다. 나는 "후!"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쉰 후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가 기다리는
바 '리버스'로 향한 것이다.
"뭐 드시겠어요?"
"음, 저는 그냥 진 토닉이요. 저 오기 전에 많이 드셨나요?"
"아뇨, 겨우 우리도 칵테일 한잔씩 했을 뿐이에요 그쵸 승주씨?"
섹스 칼럼니스트 김주형. 여자들이 보는 눈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남자가 보기에는 글쎄. 뭐…음.
뭐 보통, 아니 뭐 그래, 확실히 깔끔하고…매력적인 외모인 것 같다. 키는 180 중반의 훤칠한 키에 살짝
폄하하지면 '삐쩍 꼻은' 마른 몸, 하지만 하얗고 뽀얀 피부에 살짝 유들유들하게 장난끼 있어보이는
얼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깔끔하게 갈무리하면서도 글쟁이 특유의 곤조를 보여주는 검은 뿔테.
오래 입었음이 분명한 청바지에 살짝 접어신은 구두도… 흠, 이 날씨에 맨발, 구두를 접어신다니 컨셉
인지 뭔지 조금은 실소가 나왔고, 또 묘하게 아직은 조금 미숙한 간지, 조잡하게 스타일을 꾸며낸 티가
조금은 났지만, 그래도 여튼 이 정도면 적당히 '섹스 칼럼니스트'에 어울리는 외모였다.
'흠'
하지만 어느 틈엔가 승주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은근하게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이, 글쎄. 꽤나 눈에
거슬렸다. 물론 재빠르게 슬쩍 쇼파 뒤로 팔을 뻗었다가 다시 그 스킨십을 거두고는 휴대폰을 확인하긴
했지만 그런 적절한 치고 빠지기도 거슬렸다.
'처음부터 적대할 필요 없잖아'
나는 조금 빙 둘러서, 맞은 편의 그 둘보다는 내 옆 자리에 앉은 혜미에게 다시 시선을 주기로 했다.
승주보다도 더 키도 크고 늘씬한데다 금발로 염색한 긴 머리를 살짝 틀어올린 스타일이 조금은 이국
적이기까지 한 그녀. 바로 옆 자리인데다 조금 부담스러운 의상을 입어서 시선을 주기가 어려웠지만
일단은 김주형에게 어떤 식으로 접근할까 정하기 전까지는 혜미와 물꼬를 트자.
"혜미씨? 둘이 어떻게 친구에요? 대학교?"
혜미와 승주를 번갈아가며 물어보자 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같은 과야. 맨날 같이 다니는 단짝. 저번에 말했던 그 파티녀가 얘야"
"어머 너 무슨 말을 하고 다닌거야ㅋㅋ 박스 오빠 저 그런 애 아니에요ㅋㅋ"
내가 '씨'라고 말을 걸었음에도 바로 '오빠'로 상황 정리를 하는 그녀의 스킬에 나는 내심 속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센스 좋네.
"별 말 못 들었는데? 파티녀의 전설이 뭔데? 어?"
웃으며 묻자 "어머 진짜 별 거 아니에요ㅋㅋ 야, 너 왜 그런 말을 해" 하고 혜미는 당황하며 웃고,
승주는 "아, 내가 제대로 말 안했나? 얘 대박이에요. 작년 연말에, 12월 20일부터 31일까지 거의 2주를 계속
클럽에 호텔 파티에 맨날 파티, 행사는 다 찾아다니다가 기어코 무리해서 쓰러졌는데 그 쓰러진 날도
링겔 3시간 맞고 또 클럽 가서…"
승주의 폭로에 우리는 내심 살짝 놀라면서도 너무 즐겁게 웃었다. 혜미는 손부채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너 진짜 자꾸 나 이미지 망가뜨린다? 그럼 나도 너 맨날…"
주거니 받거니 폭로전이 시작될 조짐에 마침 내 웨이터가 내 진토닉을 한잔 가져다주었고 그 즈음해서 난
주형에게 말했다. 조금 뻔하고 새삼스럽지만.
"잡지는 잘 보고 있습니다. 매달은 못 봐도, 손에 잡히는대로 자주 보고 있어요. 글 보면 참 기가 막히게
여자들 꼬시시더라구요, 항상 존경하고 있습니다, 하하"
사실은 미용실 갈 때마다 보니까 거의 매달 꼬박꼬박 보는 셈이지만. 그리고 이어서 뻔한 빈 말로 살짝
똥꼬를 긁어주었다.
"아휴 아니에요, 그거 다 태반은 적당히 구라에요, 구라. 아 정말 그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무슨 뭐 완전
바람둥이처럼 생각해서 정작 실제로는 연애도 하기 힘들어요"
하기사 한낱 블로그 운영하는 나도 가끔은 블로그 때문에 생 엉뚱한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하물며 잡지에
대놓고 섹스 칼럼을 쓰는 사람에 대한 오해야 오죽할까.
"아니 그래도 저같은 찌질이보다는 훨씬 많은 '경험'과 '경륜'이 있으시지 않겠어요?"
여성편력에 대한 남자들의 그 어쩔 수 없는 '허세'를 한번 툭 찔러보았다. "어머 오빠가 무슨 찌질이야.
…완전 매력남이지" 하고 승주가 도움 안 되는 내 편을 들어주었지만-기분은 좋았다- 바로 그 덕분인가
김주형이 고개를 저으며 '자랑'을 했다.
"어휴 아니에요. 뭐 그냥, 남들만큼, 어쩌면 남들보다 쪼금 더 많은 경험을 했을 뿐이죠 뭐. 그냥 마음이
맞으면 길게 사랑도 하고, 몸이 맞으면 짧게 만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 뭐 이 정도면 자랑은 아니려나. 여튼 난 한번 더 물어보았다.
"여자친구 분은 있으세요?"
있어도 없다고 할테고, 정말로 없을 수도 있고.
"없습니다. 현재는"
현재는, 이라고 하는 부분이 좀 재수가 없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이며 난 내 잔을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승주가 주형에게 말을 했다.
"우리 박스 오빠도 글 쓰는 사람이에요. 재미나는 글도 많이 쓰고, 막 장르를 넘나들어요, 아 얼마 전에는
책도 냈어요"
나는 보았다. 승주의 자랑에, 그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말에 살짝 눈이 가늘어지며 나를 보는 주형의
자세가 이전의 그 다소 거만하기까지 한-아, 그래 왜 초면부터 기분이 안 좋았나 했더니 이제보니까 그
다리 꼬고 묘하게 건방지게 앉아있는 자세가 거슬렸나보다- 그 자세에서 조금은 진지한 자세로 바뀌
었다. 거기서 살짝 기분이 좋아졌지만…
"아, 전업 작가분이셨나요?"
하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승주가 띄워줬을 뿐입니다. 직업은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고, 가볍게 블로그에 별 실없는
똥글이나 올리는거죠 뭐"
'똥글'이라는 표현에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아 그래도 책까지 내셨다고…" 하고 다시 묻는 그. 아무
래도 나의 글이 궁금한 모양이다.
"뭐 그냥, 기회가 닿아서…좋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기회가 닿았을 뿐입니다"
하고 나는 그저 겸손하게 나를 낮추었다. 그는 싱긋 웃으면서 "그럼 그 블로그 주소라도 나중에 알려주
세요. 꼭 한번 접속할께요" 라고 말했다. '꼭 한번'이라는 말은 '이 말은 빈말' 이라는 말의 축약어. 나는
"그러죠" 하고 다시 한 모금 술을 마셨다.
그때부터 나는 살짝 기운이 빠져 셋과 적당히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바의 잔잔한 음악에 취해갔다. 뭐
야근까지 했던 터라 피곤했던 것도 있고, 승주가 마치 락 스타를 앞에 둔 그루피라도 된 양 어느새 주형
의 어깨동무를 뿌리치지 않고 있기에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살짝 민망했던지 혜미가 또 몇 마디 별 의미
없는 학교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흠'
왠지 괜히 왔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오래간만에 승주와… 아니 뭐, 그거까지 생각은 안 하더라도
그냥 그래, 얼굴이라도 보고 살갑게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이게 뭔가. 무슨 들러리 서로 나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뭐 기깟해야 잡지에 글이나 기고하는 자지 새끼, 뭐 씨팔 연봉이 몇 천씩 돼?
그래봐야 룸펜 나부랭이지. 씨발. 감히, 아니 감히랄 것까진 없겠지만, 승주 어깨에 손을 올리고. 후,
좆같네.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좀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
'취하고 싶다'
내일은 출근해야 되는데. 시계는 뭐 아직 새벽 1시 20분. 시간은 많다. 간만에 끊은 담배가 땡겼다.
살짝 취기가 느껴졌다. 아니 솔직히 좀 취했다. 그것도 나 혼자. 아닌가? 나 혼자 취한거 맞나?
"흠, 그러고보니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가장 기초적인 것도 안 물어보고 있었네. 그래, 너 몇 살이나 쳐먹었냐.
"서른 넷입니다"
서른 넷? 씨팔, 서른 넷이나 쳐먹은 새끼가… 하릴없이 온 국민이 보는, 아니 몇 명이나 본다고 그래 뭐
온 국민은 아니지. 여튼, 사람들 다 보는 잡지에다가 지 섹스 경험이나 쳐찌끄린단 말인가? 순간 나도
조금 찔렸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소설이고, 취미활동이니까… 또 그게 직업은 아니잖아 나는. 하고 애써
변명을 하면서 김주형을 까내리고 싶어졌다.
"여기, 진 토닉 한잔 더요, 그리고 물도 좀 주세요"
"네에"
혀가 꼬여가는 것을 애써 힘주어 또박또박 발음하고, 물도 달라고 했다. 나는 잠시 화장실을 가야겠다
싶어서 몸을 일으켰다. 살짝 심호홉을 하고, 다시 취하지 않은 양 정신을 좀 차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쏴-
세수를 하고 나니 조금 정신이 든다. 후, 방금 나는 무슨 추태를 부린거야. 정신차려 김박스. 이 병신새끼.
계집 하나 때문에 질투에다 흐트러지기까지. 정신챙겨. 그래, 잘하자. 어쨌든 나는 나고, 뭐, 아쉬울 거
없잖아. 원래 1년에 한두번 볼까 말까한 년인데 뭐. 정신차려 임마.
나는 거울을 보며 마음을 새로했다. 화장실 환풍기 틈으로 쌔한 바람이 가늘게 한줄기 흘러들어왔고 난
그제사 정신을 차렸다. 뚜벅뚜벅 제자리로 돌아오자 혜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박스 오빠 정말 바람둥이에요? 정말로?"
아 승주 이 기집애 또 뭔 허풍을 쳐놓은거야. 나는 픽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바람둥이는 무슨. 야 나 완전 개순정남이야 리얼. 21세기에 찾아보기 힘든, 막 호구? 그래 호구야 호구"
그래, 씨발 내 스타일로 간다. 허세 버려. '호구' 라는 말에 혜미와 승주는 웃었고 "아 말도 안돼" 하면서
혜미는 내 팔을 새삼 툭툭 친다. 그러고보니 혜미 얘도 이쁘긴 참 이쁘네. 나는 다시 썰을 풀었다.
"야 근데 진짜 여자들도 너무해 증말. 나쁜 남자 나쁜 남자하는데 솔직히 니네가 찾는 그 나쁜 남자가
막 진짜 나쁜 남자가 아니잖아. 그냥 멋있고 매력적인데 너네한테 잘해주는게 아니니까 나쁜 남자가
되는거지 안 그래?"
나의 말에 혜미는 "으악 정곡이다" 하면서 웃어주었고, 그렇게 테이블의 분위기는 서서히 이쪽으로 다시
넘어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어깨동무를 하며 승주의 반대편 팔뚝을 쓰다듬던 주형의 팔은 어느새 다시
지 무릎 위로 돌아가 있었고, 의자에 푹 앉아있던 승주 역시 이쪽에 몰입을 하기 시작했다.
"야 근데 솔직히 너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아마 너네가 슬슬 직장생활하면 알거야.
호구 같은 남자 하나, 아 물론 암만 호구에 찌질이라도 뭐가 기반은 있어야겠지. 여튼 그런 남자 하나
하나 키워가는 맛도 그거 쏠쏠하다?"
나는 어느새 반 이상 비운 잔을 들이키며 이번에는 얼음물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영화 프리티우먼을 보면, 여자들은 그 멋진 리처드 기어가 줄리아 로버츠 인생을 딱 역전시키는거
보고 그 공주님이 되는 줄리아 로버츠의 삶에 감정이입하며 좋아라 하는데, 사실 프리티우먼은 거
남자들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뭔 소린고 하는 표정의 그녀들에게 나는 또 설명을 해주었다.
"성공해서, 자기 여자 하나 딱 제대로 호강시켜주고 환골탈태 시켜서 세상에서 제일 멋진 공주님으로
만들어주는거, 그게 얼마나 멋있냐? 이거는 남성 판타지기도 하단 말이지. 야, 로또가 딱 된다고 해봐.
나도 진짜 딱 우선 부모님 집 한채 딱 근사한 걸로 사드리고, 차도 기깔라는 걸로 딱 뽑고, 백화점 딱
너네 데리고 오늘 이 오빠가 뭐든 다 사준다! 하고 화려하게 다 카드로 좍좍 카드 다 갈릴 정도로 쏠텐데
말이야"
하고 말을 해놓고서는 곧 "…이래서 내가 호구야" 하고 또 농을 던진다. 승주와 혜미는 "아 오빠같은
호구 좋다 호구 좋아" 하고 내 팔을 붙잡고 조른다. "로또가 되면 말이지" 하는 내 말에 그녀들도 피식
웃었고 혜미는 자기 휴대폰을 내밀었다.
"오빠 번호 좀 찍어줘요"
"내 번호?"
나는 살짝 승주의 눈치를 살폈지만 승주는 개의치 않는 듯 자기 칵테일만 한 모금 쪼옥 빨았다. 또,
여자가 먼저 휴대폰을 내미는 모습에 살짝 나는 내심 뿌듯해하며 주형의 안색을 살폈지만 그 역시
딱히 뭔가 변화는 없었다. 아까의 열패감을 이번에는 놈이 속으로 맛보고 있는건가? 싶었지만 딱히
그럴 리야 없겠지.
혜미에게 번호를 찍어주자 혜미가 물었다.
"나 오빠한테 자주 전화해도 되죠?"
적극적이네.
"그래"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승주는 그때도 잠시 자기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을 뿐. 그때 주형이
"담배 한 대 피워도 되죠?"하고 양해를 구하며 뒤늦게 담배를 꺼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담배 안 피우시나요?" 하고 물었다. 나는 "끊었습니다" 하고 웃었다. 그는 "이야, 대단하시네요"
하고 순순히 감탄하는 듯 했지만 뭐 딱히.
'그 담배를 끊은 사연을 알면 더 놀랄 것이다' 하고 나는 속으로 씁쓸해 생각을 마치고는 잠시 휴대폰
을 확인했다. 어느새 새벽 2시가 넘었다.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내일 출근하자면. 물론 당연히
묘한 생각을 안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허튼 생각부터 하면 될 일도 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 잘
안다.
"그나저나 둘은 대딩이고, 내일 출근 안 하시나요? 저는 내일 회사가 있어서 슬슬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은데"
하고 주형에게 묻자, 주형도 "아 저는 뭐, 출근은 제 마음대로라서요" 하고 고개를 까딱했다. 쓰벌.
끝까지 얘네들하고 놀다 가겠다, 아니, 승주와 뭐 어떻게 해보겠다는건가? 하고 속으로 조금 띠꺼웠
지만 여튼 깔끔하게 일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아니 뭐 그럼 저희도 일어나죠. 오래 마셨는데"
승주가 자리를 정리하는 한 마디를 했다. 호오. 주형은 다소 낭패한 표정이었고 혜미도 갑작스럽지만
승주가 일어나자는데야. 그리고 내심 그녀도 차라리 그게 더 낫다고 생각했으리라.
"아 그럴까요?"
주형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넷은 카운터로 향했고 제일 카운터에 가까웠던 나는 어쩔 수
없이 계산을 했다. 내심 씨팔 김주형 이 새끼 돈도 잘 벌지 않나? 하면서 그 새끼가 계산해야 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티는 안 내고 그냥 내가 계산했다. 아 씨발 짠돌이 개새끼.
"7만 4천원입니다"
"여깄습니다"
카드로 결제하면서도 생각보다 많이 안 나왔지만 그래도 조금은 진짜 '호구짓' 한 거 같아서 기분이
뭐했다.
가게를 나와 "잘 마셨습니다", "잘 마셨어요", "오빠 잘 마셨어" 하는 인사들을 받고, 나는 또 따로 주형
에게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기회가 될지 모르겠지만 또 언제 이런 자리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냈다. 그 역시 "저도요" 하고 악수를 건냈다.
"다들 어느 방향으로 가시죠?"
주형은 그 말에-아마 분명히 승주와의 썸씽을 그 순간까지도 기대했으리라- 잠시 망설였지만 승주가
아무 반응이 없자 곧 "아 저는 강남쪽으로 갑니다" 하고 말을 했다. 혜미도 "저는 잠실이요" 하고 말했
고, 승주는 "난 여기서 금방이야. 방배동" 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럼 나랑 승주는 건너가서 타야되고,
둘은…아, 택시 온다. 혜미야 저거 타" 하고 택시를 잡았다.
"아싸, 그럼 다들 담에 또 봐요~"
하고 혜미는 재빨리 택시에 올랐다. 주형은 멍하니 서있다가 "아, 여튼 오늘 반가웠습니다. 그럼" 하고
곧이어 또 온 택시를 잡아타고 갔다. 나와 승주는 말없이 횡단보도 앞으로 걸어가서 신호를 기다렸다.
'…'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승주는 물었다.
"오빠 아까 왜 화났었어?"
"화? 내가?"
"어"
티가 났나. 표정 관리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승주는 픽 웃으면서 말했다.
"혹시 나 때문이야?"
나는 빼도박도 못하겠다 싶어서 나 역시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아까 그, 김주형이가 니 팔뚝 계속 쓰다듬길래 짜증나서 그랬다 왜"
그러자 승주는 빵 터져서 웃었다.
"아 웃겨, 아 오빠가 왜 질투를 하는데. 내 남자친구도 아니면서"
"그냥, 음, 나 너 좋아하잖니"
그러자 승주는 어느새 슬그머니 내 팔짱을 끼면서, 바뀐 신호등에 길을 함께 건너며 말했다. "내가 비밀
한가지 알려줄까?" 비밀?
"김주형이 누군지 알아?"
뭔소리야. 김주형이 김주형이지.
"칼럼니스트잖아"
그러자 그녀는 "땡!" 하더니 "혜미 사촌오빠야. 사실 나도 오늘 알았어" 하고 대반전을 말했다. 헐.
'하지만'
사촌이던 뭐. 어쨌든 느끼하게 니 팔뚝 만지작댄건 마찬가지잖아. 하지만 승주는 마치 내 속마음을 읽기
라도 하는 듯 말했다.
"내가 맨날 오빠랑 이렇게 만나도 오빠가 뭐 소 닭보 듯 해서, 맨날 나랑 잠만 자지 나랑 연애할 생각은 안
하길래 그 주혁이 오빠한테 물어보니까 질투심 자극해보라더라. 그러니까 단칼에 오빠가 땅!"
하…나를 시험해본건가. 조금은 부아도 나고, 문득 아까 모든 내 말부터 행동거지까지 모두 다 손발이 오그
라들고 민망해졌지만 그래도 내 옆에 승주가 있으니 싫진 않았다.
"너 대단하다"
"그럼, 내가 어떤 여잔데"
"나보다 몇 수는 고단수구나 너"
"그럼ㅋㅋㅋ"
길을 건너온 우리는 새벽의 서초역 앞에서,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키스를 나누었다.
"오빠는 내가 오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지?"
"그런 애가 분기에 한번이나 겨우 연락 하냐?"
"그건 오빠가 연락을 안 하니까"
우리는 손을 깍지껴서 잡고 택시를 기다렸다.
"이제는 자주 할께. 연락"
나의 그 말에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말했다.
"그 말, 믿어보겠어"
나는 픽 웃었고, 곧이어 도착한 택시에 우리는 함께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