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자리의 분위기가 뜨악하는 분위기다.
"정말로요?"
뱉은 순간 후회했지만, '이런 흐름이라면' 하고 내뱉은 내가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네, 38년 동안 살면서 단 한번도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어요"
그 말에 곧바로 최 주임이 물어본다.
"그럼 여자랑 어디까지 가 봤어요? 모태솔로라고 해서 꼭 동정이라는 법은 없잖아요"
곧바로 이랑이랑 연희씨로부터 "어후~" 하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최 주임은 "아니 그게 뭐. 사랑해도 사귈 수 없는 상황이라는게 있잖아" 하고 어색하게 수습한다. 그리고 사실 뭐 '남자들 사이에서는' 적당히 면을 세우는 회피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귀지는 않았지만 그거는 해봤다구, 하고 둘러대는 식의. 뭐 이 나이 먹고 정말로 여자 경험이 단 한번도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 나쁜 일이기도 하고 말이지. 하지만 거짓말을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경험도 없어요. 그냥, 손 잡은거 정도? 뭐 그것도 대학교 때 일이에요"
그 말에 또 "와~" 하는 감탄이 터져나온다. "천연기념물이네 천연기념물" 하고 주 팀장님이 맥주 잔을 든다.
"그럼, 우리 강 대리 올해에는 꼭 연애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건배!"
이런저런 이야기가 더 나오면, 이런 이야기의 결말은 꼭 우울한 나에 대한 비난으로 끝나는 법인데 적절한 타이밍에 팀장님이 끊어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에이"
그럼 그렇지, 헬조선의 술자리에서 약점 털어놓은 인간이 안 씹히고 끝나는 경우가 있나. 하, 개븅신 찐따 모지리 호구 등신 천치 새끼. 뭐한다고, 뭐가 자랑이라고 그걸 털어놓아 븅신아.
"하, 진짜"
신나게 독설파티가 시작됐다. 술자리에서 성질 부릴 수도 없고, 그저 이렇게 화장실에서 욕 한 마디 하고 세수 한번 하는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다시 문을 열고 나서자 모두의 이야기가 내 귀를 다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실은 나도 저번에 강 대리님이랑 우리 다같이 강촌 갔을 때 있잖아요. 그때 나랑 같은 조 됐었잖아요. 그때 나랑 이인삼각하는데 다리에서부터 막 바르르 떠시더라구요. 나는 그때도 조금 그냥 혹시 강 대리님이 나한테 관심 있나? 그래서 긴장했나? 했는데"
이미 최 주임에 주 팀장이 신랄하게 한 마디씩 하고 나니, 현지 대리까지 웃으며 슬슬 포문을 연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를 받았다.
"아 그럼, 모쏠이 여자 맨 다리에 다리 묶었는데 안 떨리겠어? 다리 뿐이 아니라 그때 달리는데 이렇게 막 다들 부둥켜 안듯이 뛰더라고. 나도 그렇게 해야되나? 해서 막 쿵쾅댔지 가슴이"
초연한 듯 말했지만 속이 쓰리다. 나만의 조금 설레였던 기분 좋은 추억이, 뭔가 묘하게 웃음거리가 되는 느낌이라서.
"그럼 그때 두 분은 어떻게 달렸어요? 나는 그때 그 마케팅팀 윤정씨랑 이렇게 서로 허리 안고 뛰었는데. 허리 엄청 가늘더라고, 윤정씨 완전 말랐어. 보기에도 그렇지만 진짜… 어휴. 근데 어떻게 참. 대단해. 막 위에는 이런 분이, 어? 허리는 또 그렇게나. 여튼, 두 분은?"
최 주임이 기분 나쁜 섹드립까지 치면서-그러나 다들 그의 과장된 손동작에 오히려 웃기까지 한다- 끼어들자, 현지 대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우리는 디게 어색하게 자세 안 나오게 이러고 뛰었죠. 그래서 우리 꼴찌했잖아요"
입을 가리며 웃는 현지씨가, 더이상은 예쁘지 않다.
"이게 사람이 …그런게 있어. 외모라는게 중요한거거든. 아니 막말로, 어? 외모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도 막상 지가 누구 사귀자고 할 때는 외모 보잖아? 안 그래?"
동의를 구하며 포문을 연 주 팀장님.
"그래, 사람이 옷을 왜 몇 만 원 몇 십만원씩 들이며 사입어? 그냥 추위 피할라고? 그럴라면 그냥 짐승 가죽 뒤집어쓰고 말지. 근데 왜 입어? 기왕이면 멋있으면 좋으니까. 디자인팀이 왜 있어? 기왕이면 같은 제품 더 이쁘면 잘 팔리니까. 왜 광고모델을 써? 잘난 사람이 광고하면 눈길 한번을 줘도 더 주고 상품 이미지도 좋아지니까. 하물며 사람도 어? 인물이 나으면 하는 짓도 더 이뻐보이고 똑똑해보이고 그런게 있거든. 같은 그거라도."
진지하게 파고 드는 그의 논조에 나는 어느새 안주만 입에 퍼넣고 있다.
"내가 강대리를 뭐라고 하는게 아니라, 이게 본인이 뭐, 어? 하루 아침에 달라질 수야 없지 당연히. 근데 이게 조금이라도 노력을 하면, 본인한테도 좋고, 뭐 그 본인을 보는 다른 사람들 눈에도 좋고, 두루두루 좋은거 아니겠어? 퉁퉁한 사람은 살도 좀 빼고, 너무 마른 사람은 좀 찌우고, 너무 작은 사람은 깔창을 깔고, 너무 큰 사람은 좀 자르고…"
뜬금없는 아재 개그에 분위기는 싸하지만 주 팀장은 그걸 무마하려고 오히려 논조를 좀 더 강조한다.
"나도 뭐 그렇게 잘나서 떠들 입장은 아니긴 하다만 그래도 뭐, 강대리 정말 좋아해. 인간적으로. 다 좋아. 착하고 성실하고, 어? 여기 다른 직원들도 다 열심히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강 대리를 특별히 믿는게 뭐냐면, 사람이 됐어. 됐거든. 어떻게 됐냐? 지난 번 이브 때 그 납기 빵꾸 났다고 지역사에서 올라와서 다 뒤집어 엎을 뻔한거 있잖아. 그때 사실 그때도 먼저, 혼자 나와서 그냥 수습하겠다고, 그렇게 나와서 혼자 다 수습하고 크리스마스 전전날부터 철야해서 이브에 밤 9시에 퇴근하고… 내가 그 마음을 어디 모르겠어? 그니까 다들 다음에 강 대리 뭐 진급 이야기 나오면 입 싹 다물어. 알겠어? 또 뭔 씨 진급연한보다 이르네 뭐네 그딴 소리 하면 다 연휴 출근 시킬테니 그리 알어. 그리고 뭐냐, 내가 뭔 이야기 하다 여기까지 왔어?"
그랬구나. 다들 잘했다 고맙다 했지만 사실 뒤에서는 말들이 나왔었구나. 하, 참.
"하여튼, 맞어. 강 대리는 다 좋은데 뭐랄까 그거 하나. 자기를 꾸밀 줄을 몰라. 이게 외모만이 아니라, 사회생활이라는게 기름칠도 조금 하고 그래야 되는데, 이게 또 그런 면에서 사람이 잘나 보이고 뭐 좀 그런게 있으면 플러스로 더 받는게 있단 말이야. 당장 우리 인턴들도 봐. 이제 갓 대학 졸업하는 애들이 뭐 꾸미기는 또 얼마나 다들 이쁘고 멋지게 꾸몄어. 걔들이 뭐 여기서 소개팅하려고 꾸며? 아니잖아. 좋은 인상 주려고 그러는 거잖아. 아니 강대리도 당장 처음에 어? 입사할 때 입사면접 때 옷 뭐 입고 왔어? 정장 딱 멋있게 입고 왔잖아"
그때 나 정장 안 입고 왔었는데. 여튼 굳이 토 달고 싶진 않다. 그보다 내가 그렇게나 좀 그랬구나. 그랬어. 허허.
"팀장님, 술잔 비었는데 한잔 제가… 다들 잔들 채우시죠?"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던 모양인지, 최 주임이 힐끔 내 눈치를 보다가 팀장님의 잔을 채우며 살짝 맥을 끊는다.
"제 친구 중에 하나도 인스타그램에서 디엠 보낸 사람이랑 몇 번 보다가 사귄 적 있거든요"
취미 생활과 그것을 통한 연애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이랑씨가 주변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게 온라인에서 만나서 뭐가 되기는 돼? 도통 막 인터넷 사진은 딱 믿을 수가 없잖아? 특히 여자들 셀카는"
주 팀장의 말에 이랑 씨가 "아 왜요. 여자들 셀카가 뭐 어때서" 하고 애교를 부리더니 "나도 좀 그런가? 근데 원판이 구리면 셀카도 구린건데" 하며 혀를 쏙 내민다. 과연 스물 여섯살 여자애라 뭘해도 귀엽다.
"어? 강 대리님 아빠 미소 짓는다 아빠 미소"
최 주임이 또 끼어들어 나를 공격한다. 나는 얼른 표정을 수습하며 "아니에요 무슨" 하고 입을 슥 닦지만 얼굴은 화끈 달아오른다. 그러자 주 팀장이 묻는다.
"이랑씨 남친 있다고 했나?"
"있어요"
현지 대리가 대신 곧바로 대답한다. 그랬구나, 역시. 그게 내가 아쉬울 일은 당연히 아니지만.
"음, 일단! 강 대리님은 체형이나 패션 이런건 둘째치고, 그 좀 제가 되게 교정해주고 싶었는게, 이거 목 있는데 이렇게 좀 등 굽어서 걷는거랑 안경 이렇게 막 이상하게 고쳐 쓸 때랑 팔자 걸음이랑… 그리고 가방?"
가방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모두들 까르르 웃는다. 아 그랬구나. 이 가방이 뭔가 문제였구나. 뭐 말하는지는 알겠지만. 이랑 씨가 언제부턴가 제일 매섭고 아프게 나를 공격한다. 어쩌면 아직 어려서, 사회경험이 그리 많지 않아서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고, 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맨날 보면서 저 가방에 뭐가 들었길래 그렇게 무거운 캠핑가방 같은걸 들고 다닐까 했거든요. 뭐 들었어요?"
뭐 안에 들은거야 별 거 없는데.
"노트북이랑 아이패드랑, 어, 책 이것저것이랑, 닌텐도 스위치랑, 3DS랑, 마우스랑, 블루투스 키보드랑 음, 마우스랑… 뭐 크게는 없어요"
"그게 이미 많은거죠!"
하긴 나도 요즘 좀 정리 좀 할까 생각을 많이 하기는 했다.
"그리고 게임 같은거, 뭐 취미생활이긴 해도 혼자 하는 취미 생활 갖는건 연애에도 마이너스라고 생각하거든요"
꽤 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국 게임덕후는 싫다, 이거겠지. 물론 이해한다만.
"아냐 진짜 사내연애는 할게 못 돼요. 내가 예전에 전전 직장에서 잠깐 사내 연애 했을 때, 아 진짜 스트레스 받는게 하나둘이 아니고, 또 막 싸우면 하루종일 얼굴 봐야되지, 아 진짜 헤어져도 막 뒷수습 안되지 절대로 하면 안됩니다. 사내연애는"
팀장님이 "정 없으면 회사에서 한번 찾아봐 어? 내가 강 대리 사내연애는 딱 모르는 척 넘어간다!" 하고 너스레를 떨자 최 주임이 끼어들어 한 마디 퉁짜를 놓는다. 어디 뭐 나랑 사귈 여자가 우리 회사에 있긴 하겠냐만.
"아 그러고보니 연희씨는 남친 있다고 했나?"
팀장님이 묻자, 아까부터 계속 이야기만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는 "아뇨, 없어요" 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현지 대리가 웃으며 말한다.
"아 팀장님 연희씨가 몇 살인데요. 강 대리님이랑 띠동갑도 넘어가요"
그러자 팀장님이 웃는다.
"아 누가 뭐래나? 연애 이야기 하니까 물어본거지?"
"그게 근데 나는 솔직히 안 하는게, 정답이라고까지는 말 못 해도 제일 속 편한 길이라고는 봐. 막말로 여기서 술 퍼마시는 저 아저씨들부터 해서 여기서 결혼해서 나 진짜 너무너무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 몇이나 있을까? 신혼부부 한 둘 빼면 없지 없어. 막 애 낳고 지지고 볶고 돈 들어가고 하면 그게 뭐야, 내 인생이라는게 아예 없잖아. 안 그래?"
팀장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슥 떨군다.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애 키우고 집안일로 힘들고, 남자는 남자들대로 처자식 먹여 살릴 부담되고. 어찌보면 혼자 사는게 속 편한거야. 안 그래? 다들 똑똑한 척 하지만, 어찌보면 혼자 사는게 제일 난거야 제일."
어느새 나는 독신주의자처럼 되어 있었다. 물론 '안하는' 이 아닌 '못하는' 의 독신. 사실이기도 하고.
"어후 많이 먹었네요"
"네, 저도 엄청 먹었어요"
그 이후로 한 시간 정도 더 이런저런 수다의 시간이 지나가고, 드디어 술자리가 파한 후 나는 연희씨와 같은 방향으로 아차산을 향해 전철을 달리고 있었다. 내가 조금은 더 재미있는 사람이라면 좋았겠지만, 결국 이 나이 먹도록 솔로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에 대하 초탈하지 못한 나는 결국 연희씨를 무척이나 의식하며 어색하게 말 한마디 겨우 꺼내고 또 한참을 말없이 묵묵히 서서 가기 시작했다. 그녀도 몇 번인가 휴대폰을 꺼냈다 넣었다 하며 그 어색함을 달래는 모양이다.
"집이 원래 이쪽이에요?"
한참 대화가 끊어지고 텀이 길어졌던 터라, 그녀는 내 질문에 또 조금 놀라더니-미안했다- 대답했다.
"네, 대리 님도 이쪽이시죠"
"네. 그럼 보통 몇 시에 나와요?"
별 것 아닌 질문이었지만 대답이 다소 늦어짐에 '아 혹시 내가 일부러 그 시간에 맞춰 나오기라도 할까봐 좀 그래서 그런가보다' 하고 혼자 씁쓸한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그냥 내가 혼자 자격지심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흐.
"보통 7시에 도착해요 역에"
"아 그렇구나"
그러고 나니 할 말이 없어진다. 다행히 마침 우리 앞에 앉아있던 커플이 일어나고 우리는 함께 앉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딱히 할 말은 없고 나는 언제나와 같이 가방에서 게임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제서야 연희씨가 말을 건낸다.
"나 그거 알아요. 스위치, 처음 봤어요 실물로는"
연희씨는 보기와는 달리 나름 덕질 좀 하는 여자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집에 PS4가 있는 여자' 정도로, 내공이 심후한 타입은 아니고 그냥 지브리 애니메이션 좀 좋아하는 수준의 그런. 루리웹 좀 하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회계팀 경진씨가 진짜 내공으로는 우리 회사 최고지. 뭐 별로 이야기를 몇 번 해본 적은 없지만.
연희씨는 어느새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젤다의 전설을 켜주니 한 10분 정도 꽤 재미있게 플레이를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런 여동생이 있었다면 스위치 정도야 얼마든지 양보…까진 힘들어도 그냥 한 대 더 사줄 수는 있지. 그리고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여자 면역이 없어서 이 날 이 때까지 모솔로 지내지는 않았을텐데.
참 수많은 여자들을 짝사랑했다.
조금이라도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면 혼자 가슴 쿵쿵대고, 뭐 하나라도 더 챙겨 줄 수 있으면 챙겨주고. 그렇다고 대담하게 고백은 못 해봤지만-한번 해봤지만 그 당혹스러운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만약에 내가 여자를 사귀게 된다면, 그러면 정말로 정말로 잘해줄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려고 했을텐데.
가끔 주변에서 우연찮게 주워들은 이야기나 혹은 인터넷의 사연들 보면 참 나쁜 놈들도 많은데 나라면 안 그랬을텐데, 정말 일편담심으로 잘해줬을텐데. 아니, 어쩌면 나도 그렇게 되려나.
게임을 열심히 하는 연희 씨의 모습을 보노라니 또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어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아까 회식 때 보니까 은근 그게 티가 나는 모양이다. 앞으로는 조심해야지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그저 게임기 안으로 돌린다. 조금은 서글프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모양 이 꼴로 이렇게 살아온 내 탓을 누구에게 하겠는가. 그리고 또 나름대로는 나는 그럭저럭 최선을 다하고 살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리님, 저 여기서 내릴께요"
한참 딴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그녀가 나에게 조심스레 게임기를 건내며 일어선다.
"아아, 그래요. 그럼 잘 들어가고 월요일에 봐요"
"네, 대리님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래요"
연희씨가 내리고,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귀여운 여자가 내 게임기로 게임을 즐겁게 하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내심 자축한다. 남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나에게는 꽤나 감동적이며 인생에 몇 번 없는 귀중한 경험이기도 한 것이다. 누군가가 알면 경기를 일으킬 변태같은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외롭고 쓸쓸한 삶이라 그런 것이라고 좋게좋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변명해 본다. 오타쿠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라는 격언을 떠올리며. 물론 나는 이제는 그리 진성 덕후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니 맞나? 아니더라도 솔직히 내 외모를 보면 보통 내가 덕후려니 생각하겠지.
"후우"
집에 도착하고 보니 어느새 10시 반이 넘었다. 습관적으로 PC를 발로 켜며, 보일러 불을 올리고 샤워를 시작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많이 불어난 뱃살이 요즘에는 정말 스스로 조금 신경이 쓰인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무엇인가를 하지는 않지만.
"응?"
씻고 나와보니 휴대폰 알림창에 카톡 메세지들이 주르륵 떠있었다. 뭐 회사 일에 문제 생겼나 싶어 토요일 출근을 각오했지만 의외로 그 내용은 꽤 뜻밖이었다. 현지 대리와 최주임과의 단톡방이었다.
[ 대리님ㅋㅋㅋㅋ ]
[ 도착하셨나요? ㅋㅋㅋㅋ ]
[ 상호 대리님 혹시 소개팅 생각 있어요? ]
[ 아까 팀장님도 은근히 강 대리님 소개팅 자리 좀 알아보라고 하셔서 아까 최주임님이랑 같이 집에 가는 길에 좀 알아봤거든요ㅋㅋ ㅋㅋ ]
[ 산본 센터의 아영님이라고 혹시 아세요? ]
[ 아 이제 읽으셨다 ]
둘은 신나서 무어라무어라 써대는데 뭐, 고맙지만 글쎄. 요즘처럼, 아니 원래부터 나처럼 자존감 떨어진 사람이 소개팅을 하는게 과연 맞을까. 조금은 조롱거리가 된 느낌이라 싫기도 하지만 그건 피해의식이겠지.
그보다 회사 사람이면…. 그리고 아영님은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사내망에서 몇 번 산본 센터 워크샵 사진 올라왔을 때 확 눈에 들어오는 귀여운 분, 이라 기억은 하고 있는데. 나야 싫을 이유가 없지만 내가 과연 어울리기나 할까. 나이도 엄청 어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스물 일고 여덟?
[ ㅎㅎ고마운데 회사 사람이면 좀;; 잘 안되면 민망하기도 하구... ]
그러자 또 몇 번인가의 ㅋㅋㅋ 세례가 지나가고 다시 최주임이 말을 건낸다.
[ 아니요ㅋ 아영님 아는 언니가 저번에 소개팅 자리 좀 알아봐달라고 했는데 41살이래요 ]
아. 뭐 내 입장에 누굴 가릴 상황은 당연히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38살과 41살의 소개팅이라니 뭔가 이건 소개팅이 아니라 재혼 만남 쯤은 되야 어울리는 나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부터 든다.
[ 고마워 생각해볼게 근데 나 소개해주고 욕 먹는거 아냐? 막 억지로 소개해주고 그럴 필요 없어ㅋㅋ 괜찮어ㅋㅋ ]
진심으로. 당장 나부터가 내가 매력이 없는데 다른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당장 한껏 꾸미고 소개팅을 나올 그녀가 나를 보고 얼마나 충격을 먹겠으며 얼마나 자기 상황에 대해 자괴감이 들겠는가. '이제 나는 이런 사람이랑 만나야 하나?' 하는 생각.
"음"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한없이 미안하고, 내 자존감이 가라앉으며 그 모두에 앞서서 그냥 괜히 모쏠이라는 것을 고백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여튼 고마워요 다들ㅎ 그럼 주말 잘 보내세요~ ]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아리송한 대답을 남긴 채 나는 머리의 물기를 털었다. 눈가에 맺힌 물기를 애써 수건으로 닦아내며. 그리고 카톡, 카톡, 하는 몇 번의 추가 메세지에 대답을 하는 대신 나는 못 본 체 침대에 누웠다.
"하아"
가볍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문득 꽤 낮게 느껴지는 천장에 깔려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잘못한 사람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다. 심지어 나에게조차도. 그냥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내일은 못다한 호라이존 엔딩이나 봐야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런 주말이다.
"정말로요?"
뱉은 순간 후회했지만, '이런 흐름이라면' 하고 내뱉은 내가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네, 38년 동안 살면서 단 한번도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어요"
그 말에 곧바로 최 주임이 물어본다.
"그럼 여자랑 어디까지 가 봤어요? 모태솔로라고 해서 꼭 동정이라는 법은 없잖아요"
곧바로 이랑이랑 연희씨로부터 "어후~" 하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최 주임은 "아니 그게 뭐. 사랑해도 사귈 수 없는 상황이라는게 있잖아" 하고 어색하게 수습한다. 그리고 사실 뭐 '남자들 사이에서는' 적당히 면을 세우는 회피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귀지는 않았지만 그거는 해봤다구, 하고 둘러대는 식의. 뭐 이 나이 먹고 정말로 여자 경험이 단 한번도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 나쁜 일이기도 하고 말이지. 하지만 거짓말을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경험도 없어요. 그냥, 손 잡은거 정도? 뭐 그것도 대학교 때 일이에요"
그 말에 또 "와~" 하는 감탄이 터져나온다. "천연기념물이네 천연기념물" 하고 주 팀장님이 맥주 잔을 든다.
"그럼, 우리 강 대리 올해에는 꼭 연애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건배!"
이런저런 이야기가 더 나오면, 이런 이야기의 결말은 꼭 우울한 나에 대한 비난으로 끝나는 법인데 적절한 타이밍에 팀장님이 끊어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모태솔로
"에이"
그럼 그렇지, 헬조선의 술자리에서 약점 털어놓은 인간이 안 씹히고 끝나는 경우가 있나. 하, 개븅신 찐따 모지리 호구 등신 천치 새끼. 뭐한다고, 뭐가 자랑이라고 그걸 털어놓아 븅신아.
"하, 진짜"
신나게 독설파티가 시작됐다. 술자리에서 성질 부릴 수도 없고, 그저 이렇게 화장실에서 욕 한 마디 하고 세수 한번 하는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다시 문을 열고 나서자 모두의 이야기가 내 귀를 다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실은 나도 저번에 강 대리님이랑 우리 다같이 강촌 갔을 때 있잖아요. 그때 나랑 같은 조 됐었잖아요. 그때 나랑 이인삼각하는데 다리에서부터 막 바르르 떠시더라구요. 나는 그때도 조금 그냥 혹시 강 대리님이 나한테 관심 있나? 그래서 긴장했나? 했는데"
이미 최 주임에 주 팀장이 신랄하게 한 마디씩 하고 나니, 현지 대리까지 웃으며 슬슬 포문을 연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를 받았다.
"아 그럼, 모쏠이 여자 맨 다리에 다리 묶었는데 안 떨리겠어? 다리 뿐이 아니라 그때 달리는데 이렇게 막 다들 부둥켜 안듯이 뛰더라고. 나도 그렇게 해야되나? 해서 막 쿵쾅댔지 가슴이"
초연한 듯 말했지만 속이 쓰리다. 나만의 조금 설레였던 기분 좋은 추억이, 뭔가 묘하게 웃음거리가 되는 느낌이라서.
"그럼 그때 두 분은 어떻게 달렸어요? 나는 그때 그 마케팅팀 윤정씨랑 이렇게 서로 허리 안고 뛰었는데. 허리 엄청 가늘더라고, 윤정씨 완전 말랐어. 보기에도 그렇지만 진짜… 어휴. 근데 어떻게 참. 대단해. 막 위에는 이런 분이, 어? 허리는 또 그렇게나. 여튼, 두 분은?"
최 주임이 기분 나쁜 섹드립까지 치면서-그러나 다들 그의 과장된 손동작에 오히려 웃기까지 한다- 끼어들자, 현지 대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우리는 디게 어색하게 자세 안 나오게 이러고 뛰었죠. 그래서 우리 꼴찌했잖아요"
입을 가리며 웃는 현지씨가, 더이상은 예쁘지 않다.
"이게 사람이 …그런게 있어. 외모라는게 중요한거거든. 아니 막말로, 어? 외모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도 막상 지가 누구 사귀자고 할 때는 외모 보잖아? 안 그래?"
동의를 구하며 포문을 연 주 팀장님.
"그래, 사람이 옷을 왜 몇 만 원 몇 십만원씩 들이며 사입어? 그냥 추위 피할라고? 그럴라면 그냥 짐승 가죽 뒤집어쓰고 말지. 근데 왜 입어? 기왕이면 멋있으면 좋으니까. 디자인팀이 왜 있어? 기왕이면 같은 제품 더 이쁘면 잘 팔리니까. 왜 광고모델을 써? 잘난 사람이 광고하면 눈길 한번을 줘도 더 주고 상품 이미지도 좋아지니까. 하물며 사람도 어? 인물이 나으면 하는 짓도 더 이뻐보이고 똑똑해보이고 그런게 있거든. 같은 그거라도."
진지하게 파고 드는 그의 논조에 나는 어느새 안주만 입에 퍼넣고 있다.
"내가 강대리를 뭐라고 하는게 아니라, 이게 본인이 뭐, 어? 하루 아침에 달라질 수야 없지 당연히. 근데 이게 조금이라도 노력을 하면, 본인한테도 좋고, 뭐 그 본인을 보는 다른 사람들 눈에도 좋고, 두루두루 좋은거 아니겠어? 퉁퉁한 사람은 살도 좀 빼고, 너무 마른 사람은 좀 찌우고, 너무 작은 사람은 깔창을 깔고, 너무 큰 사람은 좀 자르고…"
뜬금없는 아재 개그에 분위기는 싸하지만 주 팀장은 그걸 무마하려고 오히려 논조를 좀 더 강조한다.
"나도 뭐 그렇게 잘나서 떠들 입장은 아니긴 하다만 그래도 뭐, 강대리 정말 좋아해. 인간적으로. 다 좋아. 착하고 성실하고, 어? 여기 다른 직원들도 다 열심히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강 대리를 특별히 믿는게 뭐냐면, 사람이 됐어. 됐거든. 어떻게 됐냐? 지난 번 이브 때 그 납기 빵꾸 났다고 지역사에서 올라와서 다 뒤집어 엎을 뻔한거 있잖아. 그때 사실 그때도 먼저, 혼자 나와서 그냥 수습하겠다고, 그렇게 나와서 혼자 다 수습하고 크리스마스 전전날부터 철야해서 이브에 밤 9시에 퇴근하고… 내가 그 마음을 어디 모르겠어? 그니까 다들 다음에 강 대리 뭐 진급 이야기 나오면 입 싹 다물어. 알겠어? 또 뭔 씨 진급연한보다 이르네 뭐네 그딴 소리 하면 다 연휴 출근 시킬테니 그리 알어. 그리고 뭐냐, 내가 뭔 이야기 하다 여기까지 왔어?"
그랬구나. 다들 잘했다 고맙다 했지만 사실 뒤에서는 말들이 나왔었구나. 하, 참.
"하여튼, 맞어. 강 대리는 다 좋은데 뭐랄까 그거 하나. 자기를 꾸밀 줄을 몰라. 이게 외모만이 아니라, 사회생활이라는게 기름칠도 조금 하고 그래야 되는데, 이게 또 그런 면에서 사람이 잘나 보이고 뭐 좀 그런게 있으면 플러스로 더 받는게 있단 말이야. 당장 우리 인턴들도 봐. 이제 갓 대학 졸업하는 애들이 뭐 꾸미기는 또 얼마나 다들 이쁘고 멋지게 꾸몄어. 걔들이 뭐 여기서 소개팅하려고 꾸며? 아니잖아. 좋은 인상 주려고 그러는 거잖아. 아니 강대리도 당장 처음에 어? 입사할 때 입사면접 때 옷 뭐 입고 왔어? 정장 딱 멋있게 입고 왔잖아"
그때 나 정장 안 입고 왔었는데. 여튼 굳이 토 달고 싶진 않다. 그보다 내가 그렇게나 좀 그랬구나. 그랬어. 허허.
"팀장님, 술잔 비었는데 한잔 제가… 다들 잔들 채우시죠?"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던 모양인지, 최 주임이 힐끔 내 눈치를 보다가 팀장님의 잔을 채우며 살짝 맥을 끊는다.
"제 친구 중에 하나도 인스타그램에서 디엠 보낸 사람이랑 몇 번 보다가 사귄 적 있거든요"
취미 생활과 그것을 통한 연애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이랑씨가 주변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게 온라인에서 만나서 뭐가 되기는 돼? 도통 막 인터넷 사진은 딱 믿을 수가 없잖아? 특히 여자들 셀카는"
주 팀장의 말에 이랑 씨가 "아 왜요. 여자들 셀카가 뭐 어때서" 하고 애교를 부리더니 "나도 좀 그런가? 근데 원판이 구리면 셀카도 구린건데" 하며 혀를 쏙 내민다. 과연 스물 여섯살 여자애라 뭘해도 귀엽다.
"어? 강 대리님 아빠 미소 짓는다 아빠 미소"
최 주임이 또 끼어들어 나를 공격한다. 나는 얼른 표정을 수습하며 "아니에요 무슨" 하고 입을 슥 닦지만 얼굴은 화끈 달아오른다. 그러자 주 팀장이 묻는다.
"이랑씨 남친 있다고 했나?"
"있어요"
현지 대리가 대신 곧바로 대답한다. 그랬구나, 역시. 그게 내가 아쉬울 일은 당연히 아니지만.
"음, 일단! 강 대리님은 체형이나 패션 이런건 둘째치고, 그 좀 제가 되게 교정해주고 싶었는게, 이거 목 있는데 이렇게 좀 등 굽어서 걷는거랑 안경 이렇게 막 이상하게 고쳐 쓸 때랑 팔자 걸음이랑… 그리고 가방?"
가방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모두들 까르르 웃는다. 아 그랬구나. 이 가방이 뭔가 문제였구나. 뭐 말하는지는 알겠지만. 이랑 씨가 언제부턴가 제일 매섭고 아프게 나를 공격한다. 어쩌면 아직 어려서, 사회경험이 그리 많지 않아서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고, 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맨날 보면서 저 가방에 뭐가 들었길래 그렇게 무거운 캠핑가방 같은걸 들고 다닐까 했거든요. 뭐 들었어요?"
뭐 안에 들은거야 별 거 없는데.
"노트북이랑 아이패드랑, 어, 책 이것저것이랑, 닌텐도 스위치랑, 3DS랑, 마우스랑, 블루투스 키보드랑 음, 마우스랑… 뭐 크게는 없어요"
"그게 이미 많은거죠!"
하긴 나도 요즘 좀 정리 좀 할까 생각을 많이 하기는 했다.
"그리고 게임 같은거, 뭐 취미생활이긴 해도 혼자 하는 취미 생활 갖는건 연애에도 마이너스라고 생각하거든요"
꽤 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국 게임덕후는 싫다, 이거겠지. 물론 이해한다만.
"아냐 진짜 사내연애는 할게 못 돼요. 내가 예전에 전전 직장에서 잠깐 사내 연애 했을 때, 아 진짜 스트레스 받는게 하나둘이 아니고, 또 막 싸우면 하루종일 얼굴 봐야되지, 아 진짜 헤어져도 막 뒷수습 안되지 절대로 하면 안됩니다. 사내연애는"
팀장님이 "정 없으면 회사에서 한번 찾아봐 어? 내가 강 대리 사내연애는 딱 모르는 척 넘어간다!" 하고 너스레를 떨자 최 주임이 끼어들어 한 마디 퉁짜를 놓는다. 어디 뭐 나랑 사귈 여자가 우리 회사에 있긴 하겠냐만.
"아 그러고보니 연희씨는 남친 있다고 했나?"
팀장님이 묻자, 아까부터 계속 이야기만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는 "아뇨, 없어요" 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현지 대리가 웃으며 말한다.
"아 팀장님 연희씨가 몇 살인데요. 강 대리님이랑 띠동갑도 넘어가요"
그러자 팀장님이 웃는다.
"아 누가 뭐래나? 연애 이야기 하니까 물어본거지?"
"그게 근데 나는 솔직히 안 하는게, 정답이라고까지는 말 못 해도 제일 속 편한 길이라고는 봐. 막말로 여기서 술 퍼마시는 저 아저씨들부터 해서 여기서 결혼해서 나 진짜 너무너무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 몇이나 있을까? 신혼부부 한 둘 빼면 없지 없어. 막 애 낳고 지지고 볶고 돈 들어가고 하면 그게 뭐야, 내 인생이라는게 아예 없잖아. 안 그래?"
팀장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슥 떨군다.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애 키우고 집안일로 힘들고, 남자는 남자들대로 처자식 먹여 살릴 부담되고. 어찌보면 혼자 사는게 속 편한거야. 안 그래? 다들 똑똑한 척 하지만, 어찌보면 혼자 사는게 제일 난거야 제일."
어느새 나는 독신주의자처럼 되어 있었다. 물론 '안하는' 이 아닌 '못하는' 의 독신. 사실이기도 하고.
"어후 많이 먹었네요"
"네, 저도 엄청 먹었어요"
그 이후로 한 시간 정도 더 이런저런 수다의 시간이 지나가고, 드디어 술자리가 파한 후 나는 연희씨와 같은 방향으로 아차산을 향해 전철을 달리고 있었다. 내가 조금은 더 재미있는 사람이라면 좋았겠지만, 결국 이 나이 먹도록 솔로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에 대하 초탈하지 못한 나는 결국 연희씨를 무척이나 의식하며 어색하게 말 한마디 겨우 꺼내고 또 한참을 말없이 묵묵히 서서 가기 시작했다. 그녀도 몇 번인가 휴대폰을 꺼냈다 넣었다 하며 그 어색함을 달래는 모양이다.
"집이 원래 이쪽이에요?"
한참 대화가 끊어지고 텀이 길어졌던 터라, 그녀는 내 질문에 또 조금 놀라더니-미안했다- 대답했다.
"네, 대리 님도 이쪽이시죠"
"네. 그럼 보통 몇 시에 나와요?"
별 것 아닌 질문이었지만 대답이 다소 늦어짐에 '아 혹시 내가 일부러 그 시간에 맞춰 나오기라도 할까봐 좀 그래서 그런가보다' 하고 혼자 씁쓸한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그냥 내가 혼자 자격지심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흐.
"보통 7시에 도착해요 역에"
"아 그렇구나"
그러고 나니 할 말이 없어진다. 다행히 마침 우리 앞에 앉아있던 커플이 일어나고 우리는 함께 앉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딱히 할 말은 없고 나는 언제나와 같이 가방에서 게임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제서야 연희씨가 말을 건낸다.
"나 그거 알아요. 스위치, 처음 봤어요 실물로는"
연희씨는 보기와는 달리 나름 덕질 좀 하는 여자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집에 PS4가 있는 여자' 정도로, 내공이 심후한 타입은 아니고 그냥 지브리 애니메이션 좀 좋아하는 수준의 그런. 루리웹 좀 하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회계팀 경진씨가 진짜 내공으로는 우리 회사 최고지. 뭐 별로 이야기를 몇 번 해본 적은 없지만.
연희씨는 어느새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젤다의 전설을 켜주니 한 10분 정도 꽤 재미있게 플레이를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런 여동생이 있었다면 스위치 정도야 얼마든지 양보…까진 힘들어도 그냥 한 대 더 사줄 수는 있지. 그리고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여자 면역이 없어서 이 날 이 때까지 모솔로 지내지는 않았을텐데.
참 수많은 여자들을 짝사랑했다.
조금이라도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면 혼자 가슴 쿵쿵대고, 뭐 하나라도 더 챙겨 줄 수 있으면 챙겨주고. 그렇다고 대담하게 고백은 못 해봤지만-한번 해봤지만 그 당혹스러운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만약에 내가 여자를 사귀게 된다면, 그러면 정말로 정말로 잘해줄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려고 했을텐데.
가끔 주변에서 우연찮게 주워들은 이야기나 혹은 인터넷의 사연들 보면 참 나쁜 놈들도 많은데 나라면 안 그랬을텐데, 정말 일편담심으로 잘해줬을텐데. 아니, 어쩌면 나도 그렇게 되려나.
게임을 열심히 하는 연희 씨의 모습을 보노라니 또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어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아까 회식 때 보니까 은근 그게 티가 나는 모양이다. 앞으로는 조심해야지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그저 게임기 안으로 돌린다. 조금은 서글프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모양 이 꼴로 이렇게 살아온 내 탓을 누구에게 하겠는가. 그리고 또 나름대로는 나는 그럭저럭 최선을 다하고 살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리님, 저 여기서 내릴께요"
한참 딴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그녀가 나에게 조심스레 게임기를 건내며 일어선다.
"아아, 그래요. 그럼 잘 들어가고 월요일에 봐요"
"네, 대리님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래요"
연희씨가 내리고,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귀여운 여자가 내 게임기로 게임을 즐겁게 하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내심 자축한다. 남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나에게는 꽤나 감동적이며 인생에 몇 번 없는 귀중한 경험이기도 한 것이다. 누군가가 알면 경기를 일으킬 변태같은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외롭고 쓸쓸한 삶이라 그런 것이라고 좋게좋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변명해 본다. 오타쿠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라는 격언을 떠올리며. 물론 나는 이제는 그리 진성 덕후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니 맞나? 아니더라도 솔직히 내 외모를 보면 보통 내가 덕후려니 생각하겠지.
"후우"
집에 도착하고 보니 어느새 10시 반이 넘었다. 습관적으로 PC를 발로 켜며, 보일러 불을 올리고 샤워를 시작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많이 불어난 뱃살이 요즘에는 정말 스스로 조금 신경이 쓰인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무엇인가를 하지는 않지만.
"응?"
씻고 나와보니 휴대폰 알림창에 카톡 메세지들이 주르륵 떠있었다. 뭐 회사 일에 문제 생겼나 싶어 토요일 출근을 각오했지만 의외로 그 내용은 꽤 뜻밖이었다. 현지 대리와 최주임과의 단톡방이었다.
[ 대리님ㅋㅋㅋㅋ ]
[ 도착하셨나요? ㅋㅋㅋㅋ ]
[ 상호 대리님 혹시 소개팅 생각 있어요? ]
[ 아까 팀장님도 은근히 강 대리님 소개팅 자리 좀 알아보라고 하셔서 아까 최주임님이랑 같이 집에 가는 길에 좀 알아봤거든요ㅋㅋ ㅋㅋ ]
[ 산본 센터의 아영님이라고 혹시 아세요? ]
[ 아 이제 읽으셨다 ]
둘은 신나서 무어라무어라 써대는데 뭐, 고맙지만 글쎄. 요즘처럼, 아니 원래부터 나처럼 자존감 떨어진 사람이 소개팅을 하는게 과연 맞을까. 조금은 조롱거리가 된 느낌이라 싫기도 하지만 그건 피해의식이겠지.
그보다 회사 사람이면…. 그리고 아영님은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사내망에서 몇 번 산본 센터 워크샵 사진 올라왔을 때 확 눈에 들어오는 귀여운 분, 이라 기억은 하고 있는데. 나야 싫을 이유가 없지만 내가 과연 어울리기나 할까. 나이도 엄청 어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스물 일고 여덟?
[ ㅎㅎ고마운데 회사 사람이면 좀;; 잘 안되면 민망하기도 하구... ]
그러자 또 몇 번인가의 ㅋㅋㅋ 세례가 지나가고 다시 최주임이 말을 건낸다.
[ 아니요ㅋ 아영님 아는 언니가 저번에 소개팅 자리 좀 알아봐달라고 했는데 41살이래요 ]
아. 뭐 내 입장에 누굴 가릴 상황은 당연히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38살과 41살의 소개팅이라니 뭔가 이건 소개팅이 아니라 재혼 만남 쯤은 되야 어울리는 나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부터 든다.
[ 고마워 생각해볼게 근데 나 소개해주고 욕 먹는거 아냐? 막 억지로 소개해주고 그럴 필요 없어ㅋㅋ 괜찮어ㅋㅋ ]
진심으로. 당장 나부터가 내가 매력이 없는데 다른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당장 한껏 꾸미고 소개팅을 나올 그녀가 나를 보고 얼마나 충격을 먹겠으며 얼마나 자기 상황에 대해 자괴감이 들겠는가. '이제 나는 이런 사람이랑 만나야 하나?' 하는 생각.
"음"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한없이 미안하고, 내 자존감이 가라앉으며 그 모두에 앞서서 그냥 괜히 모쏠이라는 것을 고백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여튼 고마워요 다들ㅎ 그럼 주말 잘 보내세요~ ]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아리송한 대답을 남긴 채 나는 머리의 물기를 털었다. 눈가에 맺힌 물기를 애써 수건으로 닦아내며. 그리고 카톡, 카톡, 하는 몇 번의 추가 메세지에 대답을 하는 대신 나는 못 본 체 침대에 누웠다.
"하아"
가볍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문득 꽤 낮게 느껴지는 천장에 깔려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잘못한 사람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다. 심지어 나에게조차도. 그냥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내일은 못다한 호라이존 엔딩이나 봐야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런 주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