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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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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유곡(深山幽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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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깊은 밤의 산이란 무서운 법이다.

깊은 산 칠흙 같은 밤에 주변의 동서남북조차 가늠할 수 없고 여기가 높은 곳인지 낮은 곳인지 구분하기 힘든 잡목 수풀 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노라면 이미 사람의 혼은 반쯤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차라리 울음이라도 터뜨려 나 스스로에게 무책임해지고 싶지만 거칠어진 숨소리 만큼이나 짐승처럼 예민해진 나의 신경은 철저히 사방으로 뻗치고 있다.

온 사방에서 바람에 스치우는 스산한 나뭇잎 소리들이 들려오노라니 이 암적한 산은 하나의 발정한 괴수에 가깝다. 어슴푸레한 달빛에 비쳐보이는 나뭇가지들은 요염한 요괴의 손모가지요, 낮에는 도통 들을 수 없는 밤 벌레와 밤 새들의 그 음울한 울음소리는 산의 신음성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어느새 차갑게 내리앉은 추위가 그렇잖아도 오싹한 등골을 숨조차 쉬기 힘들게 조여오는데 바짝 긴장한 채 점점 더 또렷해지는 나의 정신은 지금의 상황이 갈수록 위태롭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고, 점점 더 깊어지기만 하는 밤은 아직도 아침이 오기에는 천년과도 같은 기다림이 남았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후우"

당초에 섣부른 짓이었다. 생면부지의 타지에서 무슨 자신감으로 정상을 찍고 오겠노라고 현지인조차 말리는 늦은 시간에 험한 등산로를 택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내 등산모임에서 잘 닦인 등산로로 명산 몇 개 둘러본 것에 과도하게 자신을 얻은 탓이렸다. 고집스레 정상을 찍고 내려올 참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고, 달리듯 서둘렀음에도 결국 눈으로 익혀둔 주요 포인트까지는 도착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길치는 길을 못찾아서 길치가 아니라 틀린 길임을 알고도 걸어서 길치라고 했던가. 과연 이 길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음에도 고집스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결국 내 한 몸 걷기도 힘든 가시덤불과 빽빽한 잡목의 수풀 속까지 기어들어오고 말았다.

이미 한참 전에 허리 춤에 둘렀던 경량화 다운점퍼를 제대로 갖추어 입고도 서서히 서늘해지는 등줄기는 차오르는 가뿐 숨이 정말 힘들어서 그런 것인지 절망감에 그런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나를 몰아붙이고 있었고, 몇 번이나 올려다 본 하늘의 달은 계속해서 이쪽 하늘, 저쪽 하늘로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아무래도 길을 단단히 잘못들었다는 생각에 점점 공포심이 나를 얽죄이기 시작하는데 가만히 앉아있노라니 어디선가 무엇인가라도 마구 달려와 나를 해할 것 같다는 미칠듯한 망상과 환각이 가뜩이나 피폐한 정신을 더욱 쇠하게 만든다. 결국 억지로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계속해서 어디론가 이동하는데 달의 위치가 계속해서 바뀌는 것은 좋은 징조일가 나쁜 징조일까.

"허어"

손끝부터 마디마디 차가워지는 손을 억지로 쥐었다 폈다 하노라니 뻐근한 마디 관절이 어느새 전신에 걸쳐 안 아픈 곳이 없도록 나를 몰아붙이고 있는데 특히나 이미 한참 전에 한계에 이르렀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발바닥과 발가락 끝은 어쩌면 지금 내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이 어딘가 이승의 것이 아닌 듯 느껴지는 음산한 숲이니…. 나처럼 길을 잃고 산 속을 맴돌다 하루 만에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렸다는 아무개의 설화가 문득 생각나 내 머리도 그리 되는 것은 아닌가 떨게된다. 앞뒤 분간을 할 수 없게 빽빽하게 들어찬 잡목은 이미 얼굴에 몇 줄기의 상처를 내고도 부족해 계속해서 팔다리를 괴롭히고 있다.

빠득 빠득 파삭 파삭 바싹 마른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는 수시로 가슴을 철렁이게 만들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기이한 밤의 풀벌레 소리는 갈수록 모골이 송연하게 만든다. 겁에 질린 채 산 속을 방향도 없이 헤메는 나를 어디선가 고요히 계속해서 쳐다보는 어떤 진한 시선을 느낀지는 한참이 지난지 오래다. 그것이 무엇의 시선인지는 감히 짐작조차 하기 두렵지만 그것의 이름이 혹여라도 '산'이 아닐까 싶어 이 짐승같이 살아 움직이는 숲의 공포에 막막함을 느낀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쳐버렸지만 그 와중에도 그 어떠한 육감의 경계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까지 감았음에도 온 사방을 휘저으며 내 마음의 체력을 갉아대고 있다.

이 즈음해서는 내가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놀란 마음에 하늘을 쳐다보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저 아득하게 깊은 구름 속에 가리워진 달의 지극히도 미약한 불빛인데 달빛마저 가리워지는 것은 오늘 무슨 일이 기어코 나고야 말 것이라는 불안한 심리를 자극하고 고개를 다시 낮추자 세상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나 눈 앞에 정말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노라니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건만 그랬더니 보이는 것은 섬뜩한 귀신의 그 무엇이라.

소스라치게 놀라 헉 하는 비명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니 어느새 이 숲을 뒤덮던 풀벌레소리조차 사라지고 급기야는 적막한 고독이 어지러히 정신을 휘젖은 완벽한 어둠 속의 환각만이 나를 떨게 만든다.

"허어, 허억"

겁에 질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나는 급한 마음에 주변에 손을 뻗어 그것이 나무던 나뭇가지던 무엇이던 잡고자 했지만 잡히는 것은 없고 모두 내 팔뚝과 손등만을 희롱하듯 할퀼 뿐이고, 어지러워진 발걸음만 어지러이 계속하여 움직이는데 내가 지금 걷고 있는지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된 나는 그렇게 섬뜩한 차가움에 눈을 뜬다.

여전히 깊은 밤은 암적응을 요하는 짙은 어둠에 쌓인 채였지만 하늘의 반쯤 고개를 내민 달은 그것이 혼절한 것인지, 아니면 잠에 빠져든 것인지 알 수 없는 어떤 혼란의 미망임을 가르쳐주었고, 정신을 차린 나는 얼굴에 스친 가시덩굴의 상처를 손으로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정말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가 답을 찾기 어려운 두려움에 새까맣게 변해버린 온 세상은 더이상은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겹게 하고 있었고 이것 또한 꿈은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끝없는 의심 속에 가늘게 이어가던 이성은 저 아득히 먼 하늘로 날아가버리니 내가 구조된 것은 그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뜬 다음이었다.

얼굴과 팔다리에 수십군데 긁힌 상처가 나고 이미 탈진이 된 상태에서 혼절한 나는 저체온증 증상까지 보이고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큰 이상은 없었고, 나를 구한 그 동네 주민 할아버지에게는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나는 무엇인가에 쫒기듯 집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도 밤에 불을 끄면 이 좁은 내 방이 어느새 그 끝도 없이 펼쳐진 어둠 속의 산 속이 되어 나를 괴롭히노라니, 여지껏 두려운 것은 어둠 속에서 본 섬뜩한 귀신의 무엇인데 겁에 질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불을 켠 이후에 간신히 바닥에 주저앉아 그 정체를 더듬어보면 그것이 바로 밤의 산이요, 요망한 홀림이니 날로 쇠약해져가는 내 말짱한 정신과 건강은 이미 진즉에 그 산에서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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