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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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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와 헤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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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는대로 바로 갈테니까, 먼저 집에 가 있어"
"응, 빨리 와"

7시에 퇴근하는 지혁. 나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 차가 막혀 조금 짜증이 났다. 그렇게
도착했는데 지혁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 차를 댈 곳이 없었다. 주차공간은 꽉 차 있었고 평소에
대던 곳에는 왠 트럭이 서있었다. 거의 20분을 주변을 빙빙 돌다가 공업사 앞에 차를 세웠다.

'주인이 보면 빼라고 할텐데'

하. 정말 오늘따라 왜 이리 짜증이 나는지. 일단 연락 오면 그때 빼자 하는 생각으로 안전밸트를
푸르는데 차창을 누가 두드린다. 아… 주인인가보다. 창문을 내렸다.

"아가씨, 남의 가게 앞에 이렇게 차를 대면 안돼지. 이게 뭐야"
"아 네…;;"

짜증이 왈칵 밀려온다. 일단 차에 시동을 걸고 다시 차 댈 곳을 찾아 헤메다가 문득 생각난 곳이
근처 마트였다. 어차피 먹거리도 사 들고 갈 겸, 마트로 차를 몰고갔다. 지혁의 집에서 걸어서 한
10분 거리라 그냥 거기에 차를 대고 걸어오기로 했다.

일단 차를 대고 보니 6시 55분. 일찍 가서 저녁 거리랑 사들고 지혁이 오기 전에 요리 해놓으려고
했는데 망했다. 후…

마트에 들러 방울 토마토와 포도, 고구마와 라면 한 꾸러미, 양파 2개짜리 세트를 샀다. 오렌지
쥬스도 샀다. 원래는 요리를 하려고 했지만 마트에 오니 그냥 라면이 땡겼다.

"15,600원입니다"

뭐 산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정말 나중에 결혼하면 살림이 만만찮을 것 같다. 카드로 계산을 하고
지혁의 집으로 향했다. 후.

"결혼…"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올해는 안되고 내년 봄은… 후, 무리. 그럼 내후년은? 내 나이 33살이다.
아…

우울한 마음으로 지혁의 집에 도착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방에 들어서자 꼬릿꼬릿한 남자 냄새
가 났다.

"어휴, 내가 환기 좀 하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참…"

남자는 역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창문을 활짝 열고 화장실 불도 켰다. 환기팬이 돌아가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으휴'

팬티에 양말이 구석구석 나온다. 으이구 더러워. 게으름뱅이. 왠지 주부가 된 느낌이라 피식 웃으며
빨래감을 세탁기에 몰아넣었다. 방에도 먼지가 저벅저벅 발에 밟히는게 지저분하다. 시계를 보니까
7시 25분이다. 지혁에게 전화를 할까 했더니 마침 전화가 걸려온다.

"여보세요?"
"응, 은영아 나 지금 끝났는데 차가 좀 막히네? 8시 좀 넘어서 도착할 거 같아. 배고프지? 미안 최대
한 빨리갈께"
"어 알았어. 근데 오빠 방이 왜 이렇게 지저분해"
"ㅋㅋㅋ미안. 어제 그제 술 마시느라 늦게 들어가서 방 청소를 못 했어. 걍 둬 내가 빨리 가서 청소
할께"
"아 됐어. 내가 할테니까 빨리 오기나 해. 운전 조심하구"
"ㅋㅋ알았어"

전화를 끊고 청소기를 돌렸다. 방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나니 허리가 아플 지경이다. 후. 그래도
일단 청소를 마치고 나니 그제사 살만하다. 샤워 좀 할까.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있노라니 문득 쓸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이유없이 우울하고 짜증이
난다.

"어?"

내 칫솔이 그대로 꺼내져있다. 집에 지혁의 어머니가 종종 오시기 때문에 내가 그토록 내 칫솔
같은거 나 쓰고나면 안보이는데 잘 넣어놓으라고 했더니.

"아 진짜…"

확 짜증이 난다.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정말 사람은 바뀌지를 않는다. 갑자기 주체 못할 짜증이
끓어오른다. 아 진짜! 씩씩대는 마음으로 샤워를 마치고 뾰루퉁해져서 라면 물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했다.

"어디야"
"어, 다 왔어. 지금 차 대는 중"
"주차할 데 있어?"
"어. 지금 한 자리 비어서 주차 중. 왜?"
"아냐"

전화를 끊고나니 목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폭발 직전까지 끓어오른다. 자고 갈 생각이었는데 그냥
가야겠다.

삑-삑-삑삑-삑-삑, 띠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지혁이 만면에 미소를 띄고 들어왔다.

"안뇽!"

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라면이나 넣었다. 지혁은 나의 표정을 보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물었
다.

"표정이 왜그래? 뭔 일 있어?"

나는 구구절절한 대답 대신 "씻기나 해" 하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지혁은 어색한 표정으로 떨떠름
하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헤어질까…'

문득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니, 안다. 사실 지난 번에 크게 싸운 이후, 둘이
애써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의 미래에 결혼이라는 결말이 없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한 이후,
나는 어쩌면 헤어질 이유를 애써 찾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심한 남자다. 둔한 남자. 그리고 지혁의 가장 큰 단점이 그것이다. 좀
뭘 한번 말해서는 듣지를 않는다. 가끔은 무슨 중학생이랑 사귀는 느낌이 든다. 사과도 잘하고 나
한테 잘하려고 애쓰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한번 한번이 나를 지치게 한다.

칫솔만 해도 그렇다. 지난 번에 분명, 아니 그 전에도 한번 내가 이미 칫솔이며 내 옷가지며 뭐며
어쩌다 어머니 집에 오시면 다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어머니 앞에서 내가 뭐가 되냐면서 크게
싸웠는데도 또 이런 식이다.

고개를 저었다. 입을 다물었다. 한숨이 나왔다. 솔직히 나는 이제 지혁을 사랑하지 않는다.

"아 개운하다. 라면이야? 허허 감자라면? 맛있겠는데?"

나는 대답 대신 불을 끄고 냄비받침을 바닥에 놓고 라면냄비를 옮겼다. 지혁은 군말 없이 그릇과
접시, 김치를 꺼냈다.

"오 맛있겠는데? 빨리 먹자. 배고프지? 벌써 8시가 넘었어 어이쿠"
"나 밥 먹고 바로 갈거야"

어색한 분위기를 달래려 지혁이 애써 과장된 말투로 말했지만 나는 단칼에 잘랐다. 그제사 지혁은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느끼고 말했다.

"아 왜 그래 아까부터. 뭔데"

삽시간에 공기가 얼어버린다. 나는 라면을 뜨다가 그냥 놓아버리고 말했다.

"칫솔. 내가 분명히 저번에 그렇게 말했지. 어머니 올 수도 있다고, 어머니가 내 칫솔이며, 아까
청소할 때 보니까 책상 구석에 콘돔도 그냥 있더라. 저번에 쓰고 그냥 구석에 던져둔거지? 칫솔은
내가 분명히 저번에 싸우면서, 내가 울면서까지 말한건데. 그런데도 그렇게 그게 힘들어?"

나의 몰아붙이는 말에 지혁은 잠시 당황하며 할 말을 찾더니 곧 사과를 했다.

"미안해 내가 치운다는걸 깜빡했네"
"깜빡? 저거 걸려있는거 언제부터야? 내가 여기 온거 2주도 더 됐어. 해도 너무하지 않아? 어?
지난 주에 어머니 오셨다며. 콘돔도 다 봤겠네? 청소를 하기는 해? 어?"

지혁은 더욱 당황하며 어설프게 변명을 했다.

"하지 당연히. 다 하지. 근데 콘돔은… 미안 내가 그냥 치운다 치운다 하고 그냥 놔뒀나 보네.
그냥 화 좀 풀어라 응? 미안. 내가 안 그럴께"

아… 정말 이런게 제일 싫다. 적당히 사과하고 넘어가려는 이런 모습. 아 정말 싫다 정말.

"아 됐어. 아 이젠 진짜… 아 나 이제 못하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혁의 옷장 구석에 잘 숨겨둔-가끔 와서 자고 갈 때 입곤
했던- 내 속옷과 스타킹, 티를 꺼냈다.

"야 지금 밥 먹다 뭐하는거야. 하… 미안해 알았어 안 그럴께. 어? 화 좀 풀어라"

지혁도 일어나 나를 만류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짐을 챙겼다. 그러자 지혁이 잠시 화를
내려다가 곧 안색을 풀며 다시 만류했다.

"아 은영아 미안, 응? 미안해. 안 그럴께"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종이가방에 그 옷가지들을 대충 남고, 코트를 걸친 후 가방을 들었다.

"따라나오지 마"

지혁은 짜증과 당혹감이 어우러진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았지만 나는 거세게 뿌리쳤다.

"내 성격 알지? 내가 분명히 그렇게 몇 번이나 말했잖아. 특히 저번에 그거 때문에 헤어지네 마네
소리까지 나왔던거 몰라? 그런데도 또 이래? 왜 그래 정말. 어? 말해봐. 말해보라고, 아냐 됐어.
그냥… 사람은 역시 안 바뀌어"

나는 신발을 신고 문을 닫지도 않고 바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안에서 지혁이 츄리
닝 바람으로 급하게 슬리퍼만 신고 나왔다.

"은영아, 은영아 미안해 잠깐만, 잠깐만, 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지혁은 "미안해 어? 근데 오늘 왜 이래. 앞으로 진짜루, 다시는 칫솔 절대로
안 꺼내놓을께. 니 물건 다 아예 특별관리할께 어? 미안해 은영아 어?"

지난 번 싸움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별'에 대한 공포와 당혹감이 어우러져 지혁의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났다.

"따라나오지 말라구!"

나는 대답 대신 소리를 지르고 마트에 세워둔 차를 향해 갔다. 지혁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내 손을
격하게 쥐었다.

"은영아 너 오늘 왜 이래, 무슨 일 있는거야? 어?"

아 이젠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갑자기 서러운 마음 같은 것이 북받쳐올랐다.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왜 그래? 어? 사람이 왜 그러냐구"

지혁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이 남자는 절대 안 된다.

"따라오지마. 제발 좀 놔두라구! 제발 좀!"

골목길에 오가던 여고생 몇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저씨 하나도 우리 둘을 향해 흥미있다는 듯
쳐다보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마트로 향했다. 지혁은 더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정말,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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