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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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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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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가 넘은 시간, 혼자 작은 방 책상 위 모니터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중년의 남자. 한참을 빨다 지릿한 텁텀함을 느끼곤 뒤늦게 전자담배 액상을 교체한 그는 여전히 겨우 두 문장 적어놓은 모니터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푸후…"

길게 연기를 내뿜은 그는 쯧 혀를 차더니 다시 모니터를 껐다. 그리고는 노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그는 또 한 줄의 글도 더 쓰지 못하고 하루를 보낸다. 마침 자다가 깬 아내가 화장실로 향하다가 "또 그 놈의 글 쓴다고 모니터 앞에서 허송세월 하셨소?" 하고 핀찬을 준다. 

"아냐, 그냥 인터넷 좀 하느라고"
"아니긴 뭐가 아냐"

양치를 하는 남자의 옆으로 오더니 변기에 털썩 앉아 쇳소리를 내며 소변을 본 그녀는 "나도 늙었어. 이제는 그냥 자다가 오줌만 잦아져" 하고 혼잣말인지 건네는 말인지 알 수 없이 중얼거리더니 볼일을 마무리하더니 다시 침대에 눕는다. 

세수를 하고 눈을 끔뻑이던 남자는 거울에 비친, 피로에 지친 자신의 얼굴을 새삼 바라보다 한참 후에야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침대에 눕는다. 

"병원 가봐"
"나이 먹으면 다 그런거지 뭘 병원을 가"
"그거 말고, 머리 말이야. MRI 찍어보자고 했다면서"
"돈이 있어야 찍지, 돈이. 평생 죽도록 모은 돈 한 번에 다 털어먹고 빚이 6천인데 무슨 돈으로 찍어 무슨 돈으로! 으휴 속 터져"

아내의 핀찬에 남자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는다.  








박스맨







"그럼 먼저 들어가볼께"
"수고하셨습니다"

부하 직원들을 뒤로 하고 모처럼 칼퇴근을 한 그. 아내는 오늘 회식이라고 늦을거라며 식사는 알아서 때우라고 미리 연락을 주었다. 남자는 역으로 향하던 도중 패스트푸드 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카드 결제 부탁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잠시 이쪽에서 기다려주세요"

발랄한 여자 알바생의 안내에 따라 몇 분 후 햄버거 세트 하나를 받아들고 그는 2층으로 향한다. 조금 볼륨이 높다고 느껴지는 여자 아이돌 그룹의 유행가가 시끄럽게 느껴진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다. 마침 구석 쪽 자리를 발견하고는 얼른 가서 앉았다. 그러나 곧 엉덩이쪽에 불쾌한 축축함을 느끼고는 엉덩이 한쪽을 떼어 확인했더니 하필이면 의자에 콜라를 누가 쏟아놓았다. 검은 가죽 의자라서 확인을 못한 것이다. 

"망할"

자리를 옮기고 몇 장의 티슈와 손수건으로 엉덩이를 닦아냈지만 팬티까지 축축하게 젖어버린 불쾌함은 어쩔 수 없다. 바지가 검은 바지라 크게 티가 안 나는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길게 한숨을 내쉬고 애써 짜증을 참아내며 햄버거를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허기도 꽤나 졌지만 그다지 맛을 모르겠다. 이제는 입맛까지 늙어버린 것인지. 





집에 돌아와 거실 서재, 작은 나만의 공간에 앉는다. 컴퓨터를 부팅하고 어제 쓰다만 글을 다시 이어 쓴다. 한달 반 째 쓰고 있지만 아직 챕터 1도 완성을 못 했다. 회사 일로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는 있지만 사실은 재주가 다한 것인지 슬럼프인지 당최 글에 진도가 안 나간다.

"슬럼프라고"

전성기도 없었는데 무슨 놈의 슬럼프. 요즘 무슨 일인지 자꾸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정수기에 물 한 컵을 담아 한 모금 넘기고는 다시 집중한다.



[ …태형의 손을 잡아 이끈 상희는 작게 혼자 중얼거렸다. 이러는 것도 지긋지긋해. 언제까지 이래야하는지도 모르겠어. 태형은 그 말에 화답하듯 말했다. 그러면 관두면 되잖아. 상희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


"아니야"

간신히 쓴 두 줄을 지워버렸다.

"이렇게 무겁게 나갈 이야기가 아니야"

니코틴이 부족해서일까. 담배를 찾는다. 코트 주머니에도 없고, 벗어놓은 바지 주머니에도 없고, 바지 이렇게 해놓으면 또 마누라가 지랄하겠지. 치우고, 가방에, 어디갔지. 아 잠깐. 혹시 아까 햄버거 집에 놓고 왔나. 아닌데. 아니야, 그러면 안 돼. 잠깐만, 어디에 있나. 가방을 다시 뒤진다. 망할! 어디 있는거야. 짜증이 샘솟는다. 분을 삭히는 가벼운 콧바람을 흘리고 다시 가방을 조심스레 뒤적인다.

"아빠 왔네"

작은 방 문이 열리고 딸 진경이가 눈을 부비며 말을 건낸다.

"어. 집에 있는 줄도 몰랐네. 밥 먹었냐"
"아니"

나는 다시 가방을 뒤진다. 그리고 그제서야 아까 버스 기다리다 코트 안 주머니에 넣은걸 떠올렸다. 순간 터무니 없는 짜증에 쌍욕을 뱉을 뻔 했지만 겨우 참고는 코트를 뒤진다.

"아빠 밥 먹었어? 같이 먹을까"
"난 먹었어"

전자담배를 입에 물고 몇 번 뻐끔 거린 후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다시, 태형이 의자에 앉아서 한숨을 내쉰다 부분에 마우스 커서를 내고… 뒤에서 진경이 어느새 다가와 묻는다.

"근데 아빠 이거 왜 쓰는거야"

모르겠다. 아니, 그렇지.

"작가가 글 쓰는게 당연하지"

진경은 풉 하고 웃는다.

"아빠가 무슨 작가야"

그러나 그녀도 곧 아빠의 책장 한 켠에 꽂힌 오래된 책을 떠올렸는지 중얼거렸다.

"맞어. 아빠 작가 맞지"
"물 끓는다"

진경은 라면에 스프와 면을 넣으며 묻는다.

"내 말은, 왜 안 쓰던 글을 다시 쓰냐는 말이야"

모르겠다. 그냥…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다고나 할까. 그런 거창한 명분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삶은, 그러니까 그저 하루하루 흘러가는대로 사는건 아니라는 생각을 해서일까.

"저번에 엄마랑 싸워서 그런거야?"

그래, 직설적으로 말해줘서 고맙다. 내가 대답을 하는대신 모니터에 집중하자 진경은 "너무 신경쓰지마. 엄마 화나면 말 좀 막하는거 있잖아. 그리고 집에서 놀고 먹는 아빠들도 많은데 회사 생활 하는거만으로도 훌륭하지. 근데 아빠 옛날에 인터넷에서 인기 많았다며. 얼굴 없는 작가 뭐 그런거 하면서. 여자 팬도 많았겠네? 그치?" 하고 물어왔다.

"아냐"

나는 짧게 대답하고 "라면 불겠다. 김치 꺼내줄까?" 하고 되물었다. 진경은 "나 라면 먹을 때 김치 안 먹는거 알잖아" 하면서 가스렌지에 불을 껐다.





"그럼 들어가볼께"
"네 들어가세요"

요 며칠 연이어 칼퇴를 하니 직장 부하들이 묻는다. 요즘 뭐 좋은 일 있으시냐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맨날 야근 하시다가 요즘 칼퇴하시길래 사모님이랑 금슬이라도 좋아지신거냐고 웃으며 답한다. 나 역시 실없이 웃음을 흘리며 적당히 "진경이 동생 하나 만들어볼까" 하고 대꾸해준다. "그럼 부장님 이제 완전 열심히 일하셔야겠네요" 하고 최 과장은 크게 웃는다.

회사를 빠져 나와 버스를 기다린다. 전자 담배를 뻐끔거리며 어느새 많이 밝아진 밤 풍경을 즐긴다. 언젠가는 이런 풍경이 설레이고 즐거웠던 때도 있었지. 누군가를 만나고, 기다리며.

버스가 온다. 버스에 올라타며 생각했다. 어제 진경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오늘은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좀 올려볼 생각이다. 신선한 댓글로 피드백을 좀 받으면 슬럼프 탈출에도 도움이 될 듯 했다.





[ …택시에서 내린 후 상훈은 미야케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리나가 기다리고 있다. - 終 - ]

아주 예전에 써둔 원고. 원고라는 말을 쓰니 조금은 쑥스럽지만 예전에 두 번째 책을 준비하면서 썼던 글이다.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는 글. 이런 학생들이나 올리는 아마추어 게시판에 올리기에는 조금 아깝다 생각도 했지만 여기가 아니라면 또 어디에서 뭘? 하는 반문에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글을 올리고 한참을 기다렸다. 조회수가 37, 48, 72, 180 계속 올라갔지만 댓글은 달리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저녁을 먹고 TV를 조금 보다 와도, 아내가 설거지와 빨래를 다 끝내고 빨래를 넌 후 "나 먼저 자요" 하고 방에 들어가서 잘 시간이 되었지만 댓글은 달리지 않았다.

"허"

역시 애들이나 보는 게시판이라 조금 어려웠던 걸까. 씁쓸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차에 진경이가 삑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새삼스러운 반가움에 너스레를 떨었다.

"어, 늦었구나. 밥 먹었냐"
"아니. 안 먹을래"
"음"

피곤한 것인지 무슨 일이 있는지 별로 표정이 좋아보이지 않아서 무어라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남보다, 회사 직원들보다 가족과의 이야기가 더 힘들어진 것은.

전자담배를 입에 물었지만 차라리 그냥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곧이어 물소리가 들리고, 진경이 씻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의자 앞에 앉았다.

"하아…"

어느새 로그인이 풀린 인터넷 창을 보며 그냥 글을 삭제할 요량으로 글을 마지막으로 한번 훑어보느라는데 댓글이 달려있다.


 stella : 존나게 재미업ㅅ네 ㅄ글  --넌 글쓰지마라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없이 피식 웃었다. 첫 댓글이 악플이라니. 헛기침을 한 후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어쨌든 댓글이 하나 달렸으니까 다른 댓글도 곧 달리겠지 싶어서.

한참을 심야토론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노라니 진경이 씻고 나왔다.

"아빠 안 자?"

11시 반이 넘어간 시간. 진경이 다가오더니 물었다. 그리고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어? 아빠 글 썼어?" 하고는 마우스로 스크롤을 조금씩 나려간다. 한 3분 여, 글을 다 읽은 진경이 댓글까지 읽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아 뭐야"
"니 엄마 깨겠다"

한참을 깔깔대며 웃던 그녀는 "아 무슨 애들 사이트에 저런 글을 올렸어. 그러니까 악플이나 달리지. 아 웃기다, 오늘 기분 안 좋았는데 완전 빵 터졌네" 하고 웃는 통에 글썽인 눈물을 닦는다.

"무슨 일 있었어?"

그제서야 조심스레 묻자 진경은 "아니, 그냥" 하고 말을 얼버무린다. 하지만 캐묻기에는 내가 진력이 빠졌다. "나 잔다" 하고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경이 등 뒤에서 말했다.

"아빠 근데 진짜 글 잘 쓴다"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았다. 그러나 기분은 좋았다.





금요일 임원회의에서 난데없는 핵폭탄이 터졌다. 전격적으로 구조조정이 실시된다는 내용이었다. 요 한동안 좀 안 좋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 분기 실적은 예상보다 괜찮았고 브라질 건도 성사되면 자금 사정도 꽤 좋아질텐데 구조조정이라니. 그나마 정보를 하나라도 더 쥐고 있는 당장 나부터가 전혀 뜻밖의 소식에 이해가 안 가는데 부하 직원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한두 시간이 지나자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회장님 지시사항이다, 모 기업 쪽에 문제가 생겼다, 상무 라인 견제용이다 등등 어디서들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오는지 부하 직원들은 나에게 확인을 원했다.

"자세한 사항은 조만간 다시 전파할테니까 일단은 일들 하고 있어"

그러나 사실 나야말로 아무 들은 이야기가 없다. 아무리 이 회사가 민 회장 좆대로 굴러가는 회사라지만 세상에 이렇게 하루 아침에 구조조정안을 발표하는 회사가 어디있나. 그나마 내가 유일하게 같이 머리를 맞댈만한 현 이사에게 가서 물었다.

"둥지가 부서지는데 새끼들이라고 멀쩡하겠나. 우리만 하는게 아니라 동명 그룹 전체가 다 할거야. 지금 본사 쪽에서는 500명 넘게 감원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아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대빵이 골골한데 어쩌겠어. 가뜩이나 그룹 전체가 위태위태한데, 아예 드러눕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어느 정도 경쟁력 만들어놓고 가겠다는 이야기지. 다들 당분간 몸 사리라고 해"


구조조정 소식이 전해지자 누구 하나 감히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없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다들 저녁을 먹으러 나갔고, 입맛이 사라진 나는 그저 옥상에서 진경이에게 전화를 했다.

"어 오늘 아빠 늦으니까 엄마랑 먹고 치워"

진경은 "어 알았어. 아! 아빠 댓글들 봤어? 댓글 장난 아냐. 꼭 봐봐. 완전 대박 났…어머! 엄마 수건 좀. 나 물 쏟았어. 아빠 담에 전화할께" 하고 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댓글? 어제 그 글에 댓글이 많이 달렸나.


 stella : 존나게 재미업ㅅ네 ㅄ글  --넌 글쓰지마라
   ㄴtensents : 니나 스지 마셈
   ㄴstella : 는 니 애미
   ㄴtensents : 는 신고ㅋㅋㅋㅋㅋㅋ
데빌마신 : 와 필력......  [+3]
다비니 : 재밌게 봤어영! 뒷 이야기도 써주세요
eggman : 근데 그럼 중간에 나오는 수철이는 걍 나가리 된거임?ㅋㅋ 불쌍;
idol2 : ㅊㅊ
warms : 소설보는 줄ㅋ
투봉기레쓰 : 혹시 소설가세요? 꿀잼ㅋ
SDvise : 리나 같은 여친 구합니다 [+2]
ff2gundam : 추천합니당
bananaMK : 잘 봤습니다 요 근래 올라온 신작 단편 중에서 제일 재밌게 본 듯 ㅊㅊ합니다
kingsgirl : 다음 작품 기대할께여 박스맨님 짱짱


…전체 댓글이 200개가 넘게 달렸다. 일간, 주간 베스트 글에 동시에 올라갔고, 조회수도 3만이 넘었다. 아직 나 죽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한참 좋았던 시절, 출판사에서 500만원에 대필작가 제안을 받았다. 한달 여 만에 완성한 대필원고를 본 출판사 측에서는 "그냥 박스맨님 이름으로 낼까요? 작품 좋은데?" 라고 제안도 해왔지만 대신 '원고료 500 대신에 인세 1%, 플러스 5만부 이상부터는 인세 3.5%'로 하자는 조건을 걸었다. 그러나 당시 카드빚에도 쫒기고 있었고, 몇 부나 팔릴까 싶은데 1%라는 낮은 인세에다 5만부 이상부터 3.5%라는 조건은 무슨 조롱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 소설을 500만원에 대필원고로 팔아치웠다.

"그때 그걸 파는게 아니었는데"

그 원고는 대박이 났다. 출판계 불황 속에서 14만 부를 팔았고 마침 뉴 페이스를 필요로 했던 평단에서도 새로운 스타작가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인물도 원칠했던 작가는 방송에도 수시로 얼굴을 내밀었고 구름 같은 팬들을 몰고 다녔다. 그의 이후 작품들은 (적어도 내가 보았을 때는) 형편 없었지만, 그래도 잘만 팔렸다. 녀석의 얼굴을 볼 때마다 분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4년을 신춘문예에 매달렸지만 잘 되지 않았다.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내밀었고 내 돈까지 들여가며 겨우 출판을 했지만 채 천 부를 못 팔았다. 악성 재고가 엄청나게 쌓였다. 현재 책장에도 꽂혀있는 그 책이 바로 그거다. 이후 소설 쓰는 것을 포기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쓸 수가 없었다. 창작을 위해 컴퓨터 앞에 앉으면 이유 모를 분한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아서. 쓰는 글마다 졸작만 나왔다.

이후로는 직장에 충실했고, 몇 군데 이직을 거쳐 모 대기업 계열사의 자회사에서 뿌리를 박았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승진도 하고 그렇게 20년. 손해 본 인생을 거의 만회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부동산 사기를 당했다. 평생 모은 돈 대부분을 날린 것은 물론, 법적으로 꼬여 제 3의 피해자 돈까지 내 돈으로 물어주어야 했다. 이후 아내와도 불화가 잦아졌고 가정 내에서의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얼마 전 진경의 "아빠 글 잘쓴다"는 참 오래간만에 누군가에게서 들어본 칭찬이었다. 지금의 댓글들도 마찬가지고.




이후 몇 주 일간 꾸준히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목적도 없이 쓰고 있던 글은 다시 다듬어서 인터넷 게시판용으로 회당 분량을 조절해서 연재를 시작했다. 한달 반을 써도 챕터 하나 넘기는 것이 어려웠던 글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연재를 시작하자 쭉쭉 풀려나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는 [ 이 달의 주목할 작가 ], [ 베스트 작가 ], [ 유료 베스트 작가 ] 등으로 등급업을 해서 회당 원고료를 받게 되었다. 그래봐야 푼돈이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용돈으로 쏠쏠했다. 부하 직원들 간식비로 요긴했다.

가급적 숨긴다고 숨겼지만 티가 좀 났던지 오래된 독자가 쪽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 실례인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예전에 김박스라는 닉네임으로 집필활동하시던 분 아니신가요. 닉네임도 비슷하고, 글도 비슷해서. 아니면 죄송했습니다. 여튼 글은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근 이십여 년 만의 인연인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답장을 따로 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좋았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아내는 내 등 뒤에서 핀찬 아닌 핀찬을 던졌다.

"어휴, 그 놈의 글은 신나게 쓰시네. 마누라 얼굴보다 모니터 보는 시간이 더 많겠구만"
"다음 편이 마지막 편이야. 이거 완결 내고 출판사에도 한번 가져가 볼라고"
"잘해보셔. 나 잘께"
"뭔 잠은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벌써 자"
"피곤해. 맨날 일하느라니 힘들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죽도록 일하는데"

아내가 자러가고, 메일을 확인해보니 모 컨텐츠 포털의 소설 게시판 담당자가 메일을 보내온게 있었다. 혹시 자사 포털에서 연재가 가능할지에 대한 문의였다.




구조조정 명단이 발표되었다. 다행히 그 안에 나는 없었다. 그러나 평균 2~3명이 짤리는 것에 비해 우리 부서에서는 6명이 짤리게 되었다. 그야말로 반토막이 났다. 원망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기 혼자 살아남으려고 부서 직원들 포기한거 아니냐고. 대꾸할 수 없었다. 미안했다. 현 이사는 "돈 벌어오는 부서랑 돈 쓰는 부서랑 아무래도 대우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지 않겠어? 어쩔 수 없는거잖아. 힘내. 주변 소리 신경쓰지 말고"하고 위로해주었지만 힘이 조금 빠졌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살아남아서 기뻤다.




"괜찮아. 밥 꼬박 챙겨먹고"
"아 우리 걱정일랑 말고 본인 몸이나 챙겨. 환자가 무슨 멀쩡한 사람들 걱정이야"
"엄마…"

퇴근길, 진경에게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내가 쓰러졌다. 뇌종양이라고 했다. 수술을 할 수는 있지만 성공확률을 장담하기 힘들단다. 또 성공해도 후유증이나 장애가 남을 수 있다고 했다. 진작에 MRI를 찍었다면 어땠을까. 맨날 어지럽다고 하고, 나랑 이야기 한번 나누는 대신 일찍 자기 바쁘며 짜증만 내는 그녀가 아파서 그렇다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 부동산 사기야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원고료로 받은 돈에 조금 더 보태서 MRI를 찍었더라면.

병원 계단에 멍하니 앉았다.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이 떠올랐다. 눈물이 자꾸 나왔다. 속이 많이 상했다. 전자담배를 회사에 두고 왔는지 잃어버렸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담배를 사왔다. 얼마만의 담배인지 모른다.

"하아…"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하고 아렸다. 진경을 집에 들여보내고, 아내가 잠든 이후 병원 휴게실의 컴퓨터에 500원짜리를 넣고 켰다. 뉴 이지웍 에디터에 저장되어 있던 마지막 편을 게시판에 업로드 했고, 컨텐츠 포털의 게시판 담당자한테는 당분간은 연재 시작이 어려울 것 같다고 답장을 보냈다. 조만간 여유가 되면 재차 연락을 드리겠다고, 좋은 기회 주신 점 감사하다는 말도 덧붙여서.




다시 아내의 병실로 돌아와 잠든 그녀의 손에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아프지마라…"

그녀의 구박이 아니었다면 쓰지 않았을 글이다. 글을 쓰는 시간동안 행복했다. 휴대폰으로 게시판에 접속했다. 마지막 편 작가의 말을 보고 많은 이들이 답글을 달아주었다.

[ 작가의 말 :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완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내가 많이 아픕니다. 쾌유를 비는 응원 한 마디씩이라도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



게시판에는 수백개의 응원댓글이 달리기 시작했고, 잠든 아내 곁에서 나는 조용히 병원 창 밖을 바라보았다.

새카맣게 어두운 밤하늘이건만 그 안에서도 점점히 빛나는 별처럼 내 삶에도 작은 희망 몇 조각은 있어야 되는거 아니냐고 알 수 없는 그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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