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마음으로 차를 몬다. 차창을 조금 내리고 심야의 뻥 뚫린 한강대교를 달리며 쐬는 바람은 그 마음을
조금 달래주기도 하지만 차갑다 못해 시린 바람에 금방 다시 차창을 올릴 수 밖에 없고, 그러자 답답함은 그
두 배가 된다.
'씨발'
회사를 관두고, 아니 잘리고 여기저기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돌렸건만, 전화 받는 년도 없고 있어도 죄 다
지금 남친이랑 있다니느니 뭐니 하니 헛물만 켜게 만든다.
"씨발!"
새삼스럽지만 문득 혜정이 생각이 다시 난다. 그 많은 연애를 거쳤건만 가장 애틋한 연애였다. 아니 뭐
이제와서 뭐 어쩌랴 하겠지만 남자는 결국 힘들 때면, '자신의 그 힘든 마음'을 받아준 여자가 제일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찌질함이라고 해도 좋고, 엄마 품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해도 좋다. 어쨌든 남자는
그런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혼자 있으면 찌질해지는 생물…그게 남자고 그래서 홀애비들이 추해지는
것이다. 뭐, 내가 홀애비가 아니니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 지론은 그렇다.
'남자는 곁에 여자가 있어야 빛나는 법이야'
우우우우우웅-
전화가 울린다. 윤주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받았다. 사실 망설일 이유도 없지만 그래도 망설였다.
그만큼 내 마음이 지금 혼란스러워서일까. 암담한 마음에 옅은 기대, 뭐 그런 거 말이다. 받기 직전
"어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받았다.
"여보세요"
"아 오빠, 아까 전화했었어?"
"어"
전화를 항상 옆에 끼고 사는 애니까 확인이야 아까했을테고. 아까는 전화 안 받더니 12시 다 되니 이제야
전화질이다. 하기사 그래도 뒤늦은 연락조차 없는 것보다야 100배 낫지. 아니 고맙지.
"왜? 무슨 일 있어? 그러고보니 오빠 얼굴 본 지도 꽤 됐네. 요새 잘 지내?"
마음 쓸쓸할 때, 곁에서 술 한잔 곁들이며 그녀 몸에서 나는 향긋한 향수 냄새 맡아가매 있노라면 그
활달한 목소리에 힘이 났겠지만, 지금 마음 상태로, 그것도 전화 속에서 들리는 하이톤 목소리는 솔직히
그저 피곤할 따름이다.
"아니, 뭐 요새…아니, 그보다, 넌 잘 지내?"
"나? 나도 요새 걍 그래. 똑같아"
파리에서 유학을 하다가 집이 휘청하는 바람에 한국에 다시 들어온 그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리 오래지나지 않아 그녀의 부모님은 다시 집을 일으켜 세웠건만, 그 잠시의 방황 기간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지금의 윤주는 과거의 그 빛나던 모습을 잃고 그저… 아니, 뭐 일단은 남의 이야기다. 또
머리도 멍해져서 적당히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고 싶어졌다. 그냥 그랬다.
"그래, 조간만 한번 보자"
"어 그래 오빠. 그럼 쉬어"
"어… 그래"
"…응"
그래도 이렇게 전화를 끊으면 안되는데, 뭔가 진한 아쉬움을 남기며 아무래도 당분간은 찾아오지 않을
'조만간'이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여운이 남았다. 아니, 어쩌면 이게 더 나은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 사이 감정의 인연이 남아있다는 소리니까.
그래, 최악은 실컷 30분이고 1시간이고 떠들고 나서 전화 끊고 싹 당분간 기억에서 아예 소멸되어버리는
그런 관계다. 차라리 이렇게 15초를 이야기하고 말아도, 여운이 남는다면 그게 차라리 낫다. 물론 그녀도
그렇게 느꼈을지는 별개라도 말이다.
'하아'
어쨌든 그래도 낭랑한 윤주 목소리를 들어서일까. 마음의 짐은 아까보다 덜하다. 하지만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보건데 현실은 그저 막막하기만 할 따름이다. 나는 직장을 잃었고, 당장 대출금과 월세와 카드값
은 무슨 수로 감당하나. 두달치 봉급 분량의 퇴직금이 있다. 나는 그 시간 내에 재취업을 해야한다.
우우우우웅-
또 전화다. 누구지, 엄만가? 하고 전화를 보는 순간 조금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차를 잠깐 옆으로 대고
전화를 받았다.
"어, 성아야"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성아의 낮은, 그래 그 고혹적인 보이스가 내 귀를 간지럽힌다.
"아 오빠. 미안해. 아까 전화 못 받아서"
"남자친구랑 노는 거 방해했다면 미안해"
먼저 선수를 쳤다. 하지만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 나 2년째 솔로라고 무시하지 마. 나 진짜 이제 남자 만날거야"
중간에 나와 만난 2주는 연애기간에 포함 안 하는건가. 굉장히 새삼스럽지만 그녀의 '연애'의 기준은
무엇인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묻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야? 회사야?"
그러자 그녀는 웃음을 흘린다.
"나는 진짜 오빠가 맨날 그거 물어볼 때가 제일 웃겨. 바를 회사라고 부르는 거 같아서 뭔가 되게 좀
이상해"
"월급 주는 데가 회사 맞지 뭐. 야, 경찰들은 경찰서도 회사라고 부른대. 황정민이 그 영화 뭐야, 거
경찰영화…아, 부정거래 찍을 때 인터뷰로 그랬어. 그게 되게 신선했대. 자기도"
별 의미없는 이야기로 한 마디 샜다. 그저 조용히 쿡쿡 웃으며 웃던 성아는 한 템포 쉬더니 나의 그
이야기를 받아주었다.
"부정거래가 아니라 부당거래 아니야?"
"넌 꼭 그런거 짚고 넘어내더라. 야, 너 손님들한테도 그러지?"
사실은, 아는데 일부러 빈틈을 내보인거다. 그녀는 또 그런 것을 잘 찝어내는 편이라 간만에 그 감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어쨌거나, 나의 정색하는 말투의 반문에 그녀는 또 그저 쿡쿡 웃으며 답을 흘리다
뒤늦게 이야기한다. 아 얘 지금 담배 피우고 있구나.
"아 그…"
"야 너 지금 담배피우지?"
이번 나의 말에 그녀는 더 빵 터지며 말했다.
"아 진짜 오빠가 더 예리하네. 그런거 어떻게 알아 맨날?"
"전화기에서 담배 냄새가 나더라고"
실없는 흰 소리를 하며 대화를 주고 받는다. 시간은 어느새 12시 15분.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야겠다.
시시한 농담 따먹기는 귀찮다.
"성아야, 오늘 집 비니?"
그녀는 잠시 또 한참을-순간 전화가 끊어졌나 의심했을 정도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올 때 맥주 좀 사와"
정적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저 순간적인 망설임이라면 좋겠지만, 부담스러움? 혹은 자신이 가볍게
느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 그리고 그를 통한 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뭐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더 불안해졌지만 나도 그녀도 애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면서 서로 활달한 목소
리로 말했다. 그보다 맥주를 뭐하러 사오래. 맨날 나한테 자랑하는 주제에.
"가게에서 좀 가져오면 되잖아"
"무겁잖아"
뭐, 그 말에는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시계를 확인했는지 찰나의 뜸을 들이던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 그럼 적당히 정리하고 20분 내로 퇴근할테니까 픽업하러 와"
"알았습니다. 갈께용"
"어 그럼 오빠 이따 봐"
싸해진 마음을 오늘 밤은 이렇게 잠시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마음을 달랜다고 하여 그녀에게 내가
회사를 관두었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우리는 그런 사이도 아니고, 하루종일 남자들의
찌질한 이야기, 구라 섞인 허세나 질리도록 들었을 그녀에게 나까지 그러는건 또 그건 우리 관계의 룰
위반이다. '우리 관계'가 뭔지에 대해 딱히 정의 내리긴 힘들어도 말이다.
다시 차를 몰았다. 신림으로 향한다. 쾌감 섞인 안락을 찾아서… 마음의 자욱한 안개는 가실 줄을 모르
지만, 가끔은 그저 안개 속을 헤메는 것도 좋겠지. '누군가를 지켜줘야한다' 라는 부담 없이 그저 적당히
내 몸만 잘 건사하는 채 적당한 거리에서 손잡고 걸을 사람만 있다면. 그렇다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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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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