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나를 데리고 온 곳은 허름한 상가골목 끝자락의 작은 곱창집. 평소 곱창을 먹지 않는 나는 잠시
주저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가게의 미닫이 문 유리창에 붙어있는, '곱창'이라고 쓰인 큼지막한 글
자는 비닐 테이핑이 벗겨져 돌돌 말린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꺼내놓은 짐승의 창자를 연
상시켜서 오히려 획이 무너졌음에도 '곱창'이라는 뜻을 더욱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하고 있었다.
"아, 진이씨 혹시 곱창…못 먹고 그런건 아니죠?"
남자의 질문. 나는 확실히 곱창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것이 '못 먹는' 것인가 하면 잘 모르겠다. 애초에
곱창집이라는 곳에 들어가 본 적도, 당연히 곱창을 입에 대 본 적도 없으니까. 나는 "아니요" 하고 조금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없음이 갖는 미지의 음식에 대한 불안의 뉘앙스까지 전달받지는
못한 듯, 남자는 자신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들어가시죠"
낡아서 문고리가 덜렁거리는 쇠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장님인 듯 "어서오세요"하고 백발이 성성한
한 할머니가 칼칼한 목소리로 우리를 맞이하였다. 다섯 테이블이 간신히 들어선 좁은 가게. 키가 많이 큰
남자라면 꽤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낮은 천장. 벽 곳곳은 검뎅인지 때인지 모를 검은 물
들이 들어 있고, 간밤에 이 가게 안 전체를 뒤덮었을 고소한 냄새 이면에 제법 강한 고기 비린내와 묘하게
퀴퀴한 악취가 미미하게 내 코를 간지럽혔다.
"이쪽에 앉으세요"
이제 영업을 준비하는 모양인지 할머니는 주방에서 행주를 가져와 우리 테이블을 슥슥 닦아주었다. 아마도
분명 제대로 빨았겠지만 기분 탓인지 행주의 궤적을 따라 올라오는 것만 같은 희미한 쉰 냄새가 속을 조금
메스껍게 했다.
"어떻게 드릴까, 두 개? 술은?"
"네, 술은 처음이슬로 주세요"
"네"
남자는 주문을 마친 후 슬몃 내 안색을 살폈다.
"그러고보니 진이씨한테 안 물어봤네요. 혹시 곱창 좋아하세요? 난 완전 좋아하는데"
어쩌면 한참 전에, 하다못해 가게 앞에서라도 물어봤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 질문을 이제서야 하는 그.
하지만 난 불편함을 호소하기 전에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남자는 만면에 크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냥이라고 하시면서 막 곱창 나오면 마구마구 드시는거 아니에요? 하하하하"
…조금 어처구니 없었지만, 이 답답할 정도의 눈치없음과 시원시원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곱창이 익어가고 남자도 나도 제법…둘이 함께 마신 술이 벌써 세 병째. 결론적으로 말해 곱창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물론 나중에라도 굳이 내 돈 주고 사먹을 카테고리의 음식은 결코 아닌 것이 분명했지만 윤미나
도경이와 함께 술 마실 때 항상 곱창집 앞에서 나에게 투덜대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아 넌 다른건 다 잘 먹으면서 꼭 이런 거는 안 먹더라?"
"야, 순대나 곱창이나! 비쥬얼만 놓고 보면 몇 배는 더 쎈 번데기도 잘만 먹으면서 곱창은 왜? 왜!"
적어도 다음에는 그녀들과 함께 다른 곱창집에 가주리라. 그녀들이 원한다면. 그러나 내가 이런 쓸데없는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남자는 내 젓가락질이 그다지 분주하지 않자 뒤늦게 물었다.
"아, 별로 많이 못 드시네요. 원래 정말 곱창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신거죠? 그래도 여기 맛있는 가게인데"
순간 '맛있는 곳'이 이 정도라면 평균 내지 맛 없는 가게의 경우에는 어쩌면 영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보다는 남자의 질문에 답하는게 더 급했다.
"아니에요. 맛있어요. 많이 먹고 있는데요 뭐"
내 말에 남자는 조금 위로받은 듯 씩 미소를 짓고 다시 소주 한잔을 비웠다. 그래도 그는 얼굴 빛 하나 변하
지 않았다. 술을 잘 마시는 듯 했다.
우리가 나올 즈음해서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금방 가게 안은 시끌벅적해졌다. 아마도 가게의 주요
고객들은 중장년 아저씨들인 듯 했다. 나와 그는 곧 가게를 나와 걸었다.
"시원하네요"
기름진 냄새로 가득한 가게를 나와 조금 걷노라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옷 구석구석 머리카락에까지 잔뜩
배인 기름 냄새가 불편했지만 의외로 그리 썩 나쁘진 않았다.
"아까 보니 많이 안 드시던데 별로 입맛에 안 맞으시는거 같네요. 다음에는요, 제가 정말 맛있는 데서 크게
한턱 쏠께요. 미안해요"
머리를 긁적이는 그. 나는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맛있게 먹었어요. 사실 곱창 먹어본 건 처음인데 괜찮았어요. 친구들도 곱창 좋아하는데 맨날
저 때문에 못 먹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같이 가줄 수도 있고 좋은 거 같아요"
뭔가 곱창 싫어하는 사람이 곱창집 아들내미한테 억지로 괜찮다고 설명하는 느낌이었지만 그게 사실인걸.
양복 소매에 배인 기름냄새를 맡으며 머리를 넘기던 그는 말했다.
"어떻게, 술 한잔 더하러 갈까요? 어차피 옷에서 이렇게 냄새 나는데 까페 가기는 좀 그렇잖아요"
나는 잠시 고민했다. 시계를 보니 8시 반. 애매했다. 난 조금 주저하다가 이미 한 병 가까이 술을 마셔서
조금 힘든데 더 마시면 안되지 싶었다.
"아, 오늘 술을 아까 좀 과하게 마셔서… 죄송한데 오늘은 들어가보는게 좋을 거 같아요"
조금 이른 시간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뭔가 피곤했다. 하지만 남자는 내 일찍 헤어지자는 말이 뭔가 내 감정
이라도 상해서 그런건가 싶어서 그런지 당황해했다.
"저 혹시 저녁 메뉴가 영 별로라서 기분이라도 상하신건가요? 그러면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제 위주로
코스를 짰죠. 아니 매번 비슷한 거만 먹는 거 같아서 간만에 고른건데, 아…그, 참. 미안합니다"
조금 귀여웠다. 그리고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아니, 아니에요. 정말로 그런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원래 술이 좀 약한데 아까 좀 급하게 마시다보니까
술도 그렇고, 좀 피곤하기도 하고 옷에서 냄새도 나고 어디 딱히 갈 곳도 없으니깐…"
그러자 남자는 내 손을 잡아 이끌며 말했다.
"그럼 진이씨, 저기, 저기 놀이터에서 잠깐만 이야기해요. 술도 깨고 옷에서 돼지 냄새도 빼고"
"사실 제가 원래 여자들하고는 좀… 하하, 남자 형제만 삼형제인데다 직장도 다 시커먼 남자들 뿐이고 제가
또 원래 촌 사람이라 여자들 좋아하는 그런거를 잘 못하긴 못해요. 무드 잡고 그런 거도 잘 못 하고"
아마 평소 같았다면 속으로 '지금 저런 이야기를 왜 하는거지. 별로 자랑도 아닌 이야기를 무슨 이유로?'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술의 힘인지, 그저 마냥 순진한 남자의 얼굴 때문인지 '그게 뭐 어때서' 하고 나는
속으로 그를 대신해서 변명해주고 있었다.
소개팅 후 세 번째 만남. 키도 크고 조금 말랐지만 단단한 체형의 그는 나쁘지 않았다. 두 번째 만남 자리에
왠 등산복을 입고 나온건 놀라긴 했지만 그게 돌발행동이 아니라 '요즘 산 옷 중에 그나마 제일 비싸고 이쁜
옷'이라는 그의 말이 그리 썩 나쁘지 않았다. 요새 등산복도 많이들 평상복으로 입으니까. 무엇보다 잘 어울
렸으니까. 원피스에 코트를 걸친 나랑은 전혀 안 어울리는 룩이었지만.
어쨌든 이래저래 삐걱대기는 해도, 불과 세 번째 소개팅만에 어느 정도 그가 나한테 호감을 가진 것은 느꼈다.
그리고 이렇게 동네의 공립 어린이 놀이터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꼭 분위기가 고백하는 분위기로 흘러간다는 것을. 별로 그런 생각까지는 해본 적 없는데. 무엇보다 그리고…
성별로서의 '남자'로는 분명 남자다운 면도 있고 호감도 가고 매력적이기는 해도 '연인'으로서는 글쎄. 별로
나와 코드가 맞는 것도 아니고, 일단 지금 내가 윤미의 부탁에 소개팅을 하기는 했다만 별로 연애를 하고 싶은
상황은 더욱 아니니까.
"저기, 진이씨…저 어때요?"
자기가 말해놓고도 오그라드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그럼에도 긴장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는 그. 그 모습이 참
귀엽다 못해 안쓰러운 느낌까지 올 지경이었지만 나는 안다. 이 순간 웃어 넘기거나 장난스러운 말로 넘기면
남자는 그 자체로 상처 받는다는걸. 참 가끔은 여자보다 섬세한 짐승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안타깝게도 나는 그와 연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단 한 순간도 해본 적이 없다. 굳이 그래서
지금 해본다면, 아마 그와의 연애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남자들 앞에서야 수컷 대장 같은 느낌으로 으르렁대지만 정작 내 앞에서는 이리저리 어설픈 짓도 하고 귀여운
짓도 하고 가끔은 내가 의지도 하고 적어도 어디가서 허튼 짓 할 사람은 아니고 몸도 좋고 운동도 잘한다니까
건강하기도 할테고 말하기 부끄러운 그것도 적당히 기대해 볼만하고 또 완성된 타입이 아니니까 내가 만들어
나가는 재미도 있겠지만…
조금 더 진지해지는 순간부터 많은 차이를 느끼겠지. 생각하는게 다르고, 원하는게 다르고, 느끼는게 다르고,
지향하는게 다르고, 아니 그런 '차이'를 떠나서라도 뭔가 내가 꿈꾸는 어떤 이상이 아닌, 철저히도 현실에서
기반을 두고 현실 속에서만 살아야 하겠지. '상상'마저도 부재한 어떤 그 결정적인 차이.
그게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번까지 세 차례의 짧은 만남에서 얻은 인상으로는 그랬다. 그리고 나는 이
많은 생각을 불과 3초 만에 정리하고 그의 고백에 답했다.
"…좋은 분이세요. 정말로"
긍정의 어감을 가진 단어와는 달리 그 뉘앙스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이번에는 또 어떻게 알아
챈 듯 그의 긴장된 미소에 슬몃 안타까움이 겹친다.
"그렇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사실. 아니… 그리고, 차이가 좀 많은 거 같아요 서진씨와 저는"
서툰 거절. 언제나 거절에는 서툴었다. 머릿 속에서 온갖 독설과 냉정한 말을 쏟아부을 지언정 결국 입에서 나
오는 말은 항상 더듬거리는 서툰 거절.
"그래요"
남자는 생각보다 꽤 쿨하게 내 말을 받았다. 어쩌면 그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자기와 내가 많이 다르다는걸.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제 좀 서서히 일어나야겠다… 생각하던 차에 그가 또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저 '남자로서는' 어때요? '순수히 남자로서는'"
난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윤미 그 기집애 다음에 보면 패죽여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거 윤미가 말해준거죠?"
내가 웃으면서 묻자 남자도 웃었다.
"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첫 사랑은 아니지만 '첫 남자'이자 내 가장 오랜 연인이었던 동네 호구 승남
오빠와의 이야기. 맨날 츄리닝 깃 세워서 입고 다니지만 멋 하나도 없는 그는 우리 옆 집에 산다는 이유로
친하지도 않는 나한테 고등학교 때부터 맨날 나만 보면 괜히 인사하고 아는 척을 해댔고, 그래서 그를 그렇
게도 싫어했건만, 과연 서동요로 검증된 '매일 반복되는 인사의 효과' 덕분인지
대학생 오빠와의 내 인생 첫 연애가 '순결' 문제로 처참하게 끝난 그 날 내가 돌아도 제대로 돌았는지 세상에
남자가 없어도 그리도 없었는지 승남오빠 품에 안겨서 울며 요즘에는 여중딩 팬픽 야설에서도 안 나올 법한
"저를 어른으로 만들어주세요!"라는 대사와 함께 육체적 교류로 시작한 그 기나긴 구린 연애.
그리고 그 날 첫 경험을 마치고 승남 오빠가 도대체 왜 나한테 그런 고백을 한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에게
"오빠도 남자로서는 괜찮아요. 순수히 남자로서는"이라는 그야말로 병신같은 명대사를 쳤고, 싸디 싼 그의
입을 통해 내 주변 오랜 친구들은 그 날의 내 대사를 주구장창 나를 놀리는 개그 레파토리로 근 10년을 우려
먹고 있다는 이야기. 게다가 윤미 그 기집애는 지 사촌오빠 친구씩이 되는 이 남자한테 그 이야기를 해준거고.
"어때요? 저 남자로서는 정말 쓸만한데"
밑도 끝도 없이 배를 까보이는 그의 돌발행동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지만 슬쩍 엿보이는 복근은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들었다.
여기서 무어라고 답을 해야 좋을지 잠깐 고민하는 순간, 남자는 내 손을 가볍게 잡았다.
"꼭 말로 먼저 알아갈 필요는 없잖아요"
무드 없고 센스 없는 남자인데다 이거 꽤 불편하게 듣자면 불편하게 들을 수도 있는 말이지만, 꽤나 적절한
타이밍에 터뜨린 내 '인생 대사' 이야기에 그의 제법 준수한 몸매, 무엇보다 내일이 토요일이란 사실을 새삼
깨달은 나는 가타부타 대답없이, 아까 곱창집 앞에서의 나처럼 그저 다소곳하게 그를 따를 뿐이었다. 정말 안
어울리게 말이다.
주저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가게의 미닫이 문 유리창에 붙어있는, '곱창'이라고 쓰인 큼지막한 글
자는 비닐 테이핑이 벗겨져 돌돌 말린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꺼내놓은 짐승의 창자를 연
상시켜서 오히려 획이 무너졌음에도 '곱창'이라는 뜻을 더욱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하고 있었다.
"아, 진이씨 혹시 곱창…못 먹고 그런건 아니죠?"
남자의 질문. 나는 확실히 곱창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것이 '못 먹는' 것인가 하면 잘 모르겠다. 애초에
곱창집이라는 곳에 들어가 본 적도, 당연히 곱창을 입에 대 본 적도 없으니까. 나는 "아니요" 하고 조금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없음이 갖는 미지의 음식에 대한 불안의 뉘앙스까지 전달받지는
못한 듯, 남자는 자신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들어가시죠"
낡아서 문고리가 덜렁거리는 쇠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장님인 듯 "어서오세요"하고 백발이 성성한
한 할머니가 칼칼한 목소리로 우리를 맞이하였다. 다섯 테이블이 간신히 들어선 좁은 가게. 키가 많이 큰
남자라면 꽤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낮은 천장. 벽 곳곳은 검뎅인지 때인지 모를 검은 물
들이 들어 있고, 간밤에 이 가게 안 전체를 뒤덮었을 고소한 냄새 이면에 제법 강한 고기 비린내와 묘하게
퀴퀴한 악취가 미미하게 내 코를 간지럽혔다.
"이쪽에 앉으세요"
이제 영업을 준비하는 모양인지 할머니는 주방에서 행주를 가져와 우리 테이블을 슥슥 닦아주었다. 아마도
분명 제대로 빨았겠지만 기분 탓인지 행주의 궤적을 따라 올라오는 것만 같은 희미한 쉰 냄새가 속을 조금
메스껍게 했다.
"어떻게 드릴까, 두 개? 술은?"
"네, 술은 처음이슬로 주세요"
"네"
남자는 주문을 마친 후 슬몃 내 안색을 살폈다.
"그러고보니 진이씨한테 안 물어봤네요. 혹시 곱창 좋아하세요? 난 완전 좋아하는데"
어쩌면 한참 전에, 하다못해 가게 앞에서라도 물어봤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 질문을 이제서야 하는 그.
하지만 난 불편함을 호소하기 전에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남자는 만면에 크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냥이라고 하시면서 막 곱창 나오면 마구마구 드시는거 아니에요? 하하하하"
…조금 어처구니 없었지만, 이 답답할 정도의 눈치없음과 시원시원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곱창이 익어가고 남자도 나도 제법…둘이 함께 마신 술이 벌써 세 병째. 결론적으로 말해 곱창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물론 나중에라도 굳이 내 돈 주고 사먹을 카테고리의 음식은 결코 아닌 것이 분명했지만 윤미나
도경이와 함께 술 마실 때 항상 곱창집 앞에서 나에게 투덜대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아 넌 다른건 다 잘 먹으면서 꼭 이런 거는 안 먹더라?"
"야, 순대나 곱창이나! 비쥬얼만 놓고 보면 몇 배는 더 쎈 번데기도 잘만 먹으면서 곱창은 왜? 왜!"
적어도 다음에는 그녀들과 함께 다른 곱창집에 가주리라. 그녀들이 원한다면. 그러나 내가 이런 쓸데없는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남자는 내 젓가락질이 그다지 분주하지 않자 뒤늦게 물었다.
"아, 별로 많이 못 드시네요. 원래 정말 곱창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신거죠? 그래도 여기 맛있는 가게인데"
순간 '맛있는 곳'이 이 정도라면 평균 내지 맛 없는 가게의 경우에는 어쩌면 영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보다는 남자의 질문에 답하는게 더 급했다.
"아니에요. 맛있어요. 많이 먹고 있는데요 뭐"
내 말에 남자는 조금 위로받은 듯 씩 미소를 짓고 다시 소주 한잔을 비웠다. 그래도 그는 얼굴 빛 하나 변하
지 않았다. 술을 잘 마시는 듯 했다.
우리가 나올 즈음해서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금방 가게 안은 시끌벅적해졌다. 아마도 가게의 주요
고객들은 중장년 아저씨들인 듯 했다. 나와 그는 곧 가게를 나와 걸었다.
"시원하네요"
기름진 냄새로 가득한 가게를 나와 조금 걷노라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옷 구석구석 머리카락에까지 잔뜩
배인 기름 냄새가 불편했지만 의외로 그리 썩 나쁘진 않았다.
"아까 보니 많이 안 드시던데 별로 입맛에 안 맞으시는거 같네요. 다음에는요, 제가 정말 맛있는 데서 크게
한턱 쏠께요. 미안해요"
머리를 긁적이는 그. 나는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맛있게 먹었어요. 사실 곱창 먹어본 건 처음인데 괜찮았어요. 친구들도 곱창 좋아하는데 맨날
저 때문에 못 먹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같이 가줄 수도 있고 좋은 거 같아요"
뭔가 곱창 싫어하는 사람이 곱창집 아들내미한테 억지로 괜찮다고 설명하는 느낌이었지만 그게 사실인걸.
양복 소매에 배인 기름냄새를 맡으며 머리를 넘기던 그는 말했다.
"어떻게, 술 한잔 더하러 갈까요? 어차피 옷에서 이렇게 냄새 나는데 까페 가기는 좀 그렇잖아요"
나는 잠시 고민했다. 시계를 보니 8시 반. 애매했다. 난 조금 주저하다가 이미 한 병 가까이 술을 마셔서
조금 힘든데 더 마시면 안되지 싶었다.
"아, 오늘 술을 아까 좀 과하게 마셔서… 죄송한데 오늘은 들어가보는게 좋을 거 같아요"
조금 이른 시간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뭔가 피곤했다. 하지만 남자는 내 일찍 헤어지자는 말이 뭔가 내 감정
이라도 상해서 그런건가 싶어서 그런지 당황해했다.
"저 혹시 저녁 메뉴가 영 별로라서 기분이라도 상하신건가요? 그러면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제 위주로
코스를 짰죠. 아니 매번 비슷한 거만 먹는 거 같아서 간만에 고른건데, 아…그, 참. 미안합니다"
조금 귀여웠다. 그리고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아니, 아니에요. 정말로 그런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원래 술이 좀 약한데 아까 좀 급하게 마시다보니까
술도 그렇고, 좀 피곤하기도 하고 옷에서 냄새도 나고 어디 딱히 갈 곳도 없으니깐…"
그러자 남자는 내 손을 잡아 이끌며 말했다.
"그럼 진이씨, 저기, 저기 놀이터에서 잠깐만 이야기해요. 술도 깨고 옷에서 돼지 냄새도 빼고"
"사실 제가 원래 여자들하고는 좀… 하하, 남자 형제만 삼형제인데다 직장도 다 시커먼 남자들 뿐이고 제가
또 원래 촌 사람이라 여자들 좋아하는 그런거를 잘 못하긴 못해요. 무드 잡고 그런 거도 잘 못 하고"
아마 평소 같았다면 속으로 '지금 저런 이야기를 왜 하는거지. 별로 자랑도 아닌 이야기를 무슨 이유로?'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술의 힘인지, 그저 마냥 순진한 남자의 얼굴 때문인지 '그게 뭐 어때서' 하고 나는
속으로 그를 대신해서 변명해주고 있었다.
소개팅 후 세 번째 만남. 키도 크고 조금 말랐지만 단단한 체형의 그는 나쁘지 않았다. 두 번째 만남 자리에
왠 등산복을 입고 나온건 놀라긴 했지만 그게 돌발행동이 아니라 '요즘 산 옷 중에 그나마 제일 비싸고 이쁜
옷'이라는 그의 말이 그리 썩 나쁘지 않았다. 요새 등산복도 많이들 평상복으로 입으니까. 무엇보다 잘 어울
렸으니까. 원피스에 코트를 걸친 나랑은 전혀 안 어울리는 룩이었지만.
어쨌든 이래저래 삐걱대기는 해도, 불과 세 번째 소개팅만에 어느 정도 그가 나한테 호감을 가진 것은 느꼈다.
그리고 이렇게 동네의 공립 어린이 놀이터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꼭 분위기가 고백하는 분위기로 흘러간다는 것을. 별로 그런 생각까지는 해본 적 없는데. 무엇보다 그리고…
성별로서의 '남자'로는 분명 남자다운 면도 있고 호감도 가고 매력적이기는 해도 '연인'으로서는 글쎄. 별로
나와 코드가 맞는 것도 아니고, 일단 지금 내가 윤미의 부탁에 소개팅을 하기는 했다만 별로 연애를 하고 싶은
상황은 더욱 아니니까.
"저기, 진이씨…저 어때요?"
자기가 말해놓고도 오그라드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그럼에도 긴장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는 그. 그 모습이 참
귀엽다 못해 안쓰러운 느낌까지 올 지경이었지만 나는 안다. 이 순간 웃어 넘기거나 장난스러운 말로 넘기면
남자는 그 자체로 상처 받는다는걸. 참 가끔은 여자보다 섬세한 짐승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안타깝게도 나는 그와 연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단 한 순간도 해본 적이 없다. 굳이 그래서
지금 해본다면, 아마 그와의 연애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남자들 앞에서야 수컷 대장 같은 느낌으로 으르렁대지만 정작 내 앞에서는 이리저리 어설픈 짓도 하고 귀여운
짓도 하고 가끔은 내가 의지도 하고 적어도 어디가서 허튼 짓 할 사람은 아니고 몸도 좋고 운동도 잘한다니까
건강하기도 할테고 말하기 부끄러운 그것도 적당히 기대해 볼만하고 또 완성된 타입이 아니니까 내가 만들어
나가는 재미도 있겠지만…
조금 더 진지해지는 순간부터 많은 차이를 느끼겠지. 생각하는게 다르고, 원하는게 다르고, 느끼는게 다르고,
지향하는게 다르고, 아니 그런 '차이'를 떠나서라도 뭔가 내가 꿈꾸는 어떤 이상이 아닌, 철저히도 현실에서
기반을 두고 현실 속에서만 살아야 하겠지. '상상'마저도 부재한 어떤 그 결정적인 차이.
그게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번까지 세 차례의 짧은 만남에서 얻은 인상으로는 그랬다. 그리고 나는 이
많은 생각을 불과 3초 만에 정리하고 그의 고백에 답했다.
"…좋은 분이세요. 정말로"
긍정의 어감을 가진 단어와는 달리 그 뉘앙스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이번에는 또 어떻게 알아
챈 듯 그의 긴장된 미소에 슬몃 안타까움이 겹친다.
"그렇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사실. 아니… 그리고, 차이가 좀 많은 거 같아요 서진씨와 저는"
서툰 거절. 언제나 거절에는 서툴었다. 머릿 속에서 온갖 독설과 냉정한 말을 쏟아부을 지언정 결국 입에서 나
오는 말은 항상 더듬거리는 서툰 거절.
"그래요"
남자는 생각보다 꽤 쿨하게 내 말을 받았다. 어쩌면 그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자기와 내가 많이 다르다는걸.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제 좀 서서히 일어나야겠다… 생각하던 차에 그가 또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저 '남자로서는' 어때요? '순수히 남자로서는'"
난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윤미 그 기집애 다음에 보면 패죽여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거 윤미가 말해준거죠?"
내가 웃으면서 묻자 남자도 웃었다.
"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첫 사랑은 아니지만 '첫 남자'이자 내 가장 오랜 연인이었던 동네 호구 승남
오빠와의 이야기. 맨날 츄리닝 깃 세워서 입고 다니지만 멋 하나도 없는 그는 우리 옆 집에 산다는 이유로
친하지도 않는 나한테 고등학교 때부터 맨날 나만 보면 괜히 인사하고 아는 척을 해댔고, 그래서 그를 그렇
게도 싫어했건만, 과연 서동요로 검증된 '매일 반복되는 인사의 효과' 덕분인지
대학생 오빠와의 내 인생 첫 연애가 '순결' 문제로 처참하게 끝난 그 날 내가 돌아도 제대로 돌았는지 세상에
남자가 없어도 그리도 없었는지 승남오빠 품에 안겨서 울며 요즘에는 여중딩 팬픽 야설에서도 안 나올 법한
"저를 어른으로 만들어주세요!"라는 대사와 함께 육체적 교류로 시작한 그 기나긴 구린 연애.
그리고 그 날 첫 경험을 마치고 승남 오빠가 도대체 왜 나한테 그런 고백을 한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에게
"오빠도 남자로서는 괜찮아요. 순수히 남자로서는"이라는 그야말로 병신같은 명대사를 쳤고, 싸디 싼 그의
입을 통해 내 주변 오랜 친구들은 그 날의 내 대사를 주구장창 나를 놀리는 개그 레파토리로 근 10년을 우려
먹고 있다는 이야기. 게다가 윤미 그 기집애는 지 사촌오빠 친구씩이 되는 이 남자한테 그 이야기를 해준거고.
"어때요? 저 남자로서는 정말 쓸만한데"
밑도 끝도 없이 배를 까보이는 그의 돌발행동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지만 슬쩍 엿보이는 복근은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들었다.
여기서 무어라고 답을 해야 좋을지 잠깐 고민하는 순간, 남자는 내 손을 가볍게 잡았다.
"꼭 말로 먼저 알아갈 필요는 없잖아요"
무드 없고 센스 없는 남자인데다 이거 꽤 불편하게 듣자면 불편하게 들을 수도 있는 말이지만, 꽤나 적절한
타이밍에 터뜨린 내 '인생 대사' 이야기에 그의 제법 준수한 몸매, 무엇보다 내일이 토요일이란 사실을 새삼
깨달은 나는 가타부타 대답없이, 아까 곱창집 앞에서의 나처럼 그저 다소곳하게 그를 따를 뿐이었다. 정말 안
어울리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