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닦던 아내가 물었다. 나는 무심히 읽던 책을 그대로 읽으며 되물었다.
'…민영은 이미 절정의 늪에 빠져 무아지경 속에서 그저 내 이름만을 옹알이하듯 가녀리게 부르고 있을
따름이었고, 나 역시 아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 죄책감 어린 쾌감을…'
"뭐?"
무릎을 일으켜 세운 그녀가 "책 잠깐만 덮어봐"라고 브레이크를 걸며 진지하게 묻는다. 나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책을 덮었다.
"결혼 전에는 블로그 같은 데다 글 많이 썼잖아. 여기저기 원고 요청 들어온 것도 써주고. 근데 요즘에는 왜
글 안 써?"
너무나 새삼스러운 질문. 그러고보니 얼마나 됐으려나.
"글쎄"
내 무심한 대답. 다시 읽던 책을 펴려고보니 어디까지 읽었는지 확인을 안 해뒀네. 아마 윈스턴이 걔랑 첫
데이트를 나가는 데까지 봤던가. 하지만 아내는 쉽게 상황을 끝낼 기색이 아니다.
"글 썼으면 좋겠어"
"쓸께"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안 쓴다고 하면 또 귀찮아 질 것 같아서 쓴다고 했다. 아내는 나에게 다가왔다.
"꼭 썼으면 좋겠어"
난 머리를 긁적였다.
"갑자기 근데 왜? 뭐 때문에?"
물론 아내의 표정으로 보건데 갑자기 떠올린 생각은 분명 아니다. 아마 꽤나 오래 전부터, 그러나 분명히
내 눈치를 살피느라 몇 십번을 곱씹은 끝에 겨우 토해내 듯 말한게 틀림없다.
"갑자기가 아니야. 오빠 나 때문에 글 안 쓴지 벌써 몇 년 됐잖아. 왜 아까운 글 재주를 버려둬?"
"…너 때문이 아니야. 그냥 쓰기 귀찮아서 안 쓴거지. 그리고 뭔 아까운 재주냐? 훨씬 잘 쓰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그래두. 나 때문에 안 쓰는거 알고 있어"
"너 때문 아니라니까…"
사실은 너 때문에 맞아. 그 놈의 블로그 글 때문에 싸운게 몇 번이던가. "아 염병, 그래, 안 쓴다, 안써. 너
때문에 절필이다" 하고 소리친 그 날이 마지막이었지. 새삼스럽지만 씁쓸하구나.
"미안해. 이젠 정말 안 그럴께"
아내도 문득 '그 날'이 떠올랐던지 나에게 뜬금없이 사과했다.
"괜찮아. 다 지나간 일인데"
그래. 싸울 때마다 내 블로그 소설에서 등장했던 여자 주인공들의 이름이 튀어나왔지. 실화 속 인물도,
망상 속 인물도 그저 그녀의 머릿 속에서 뒤죽박죽 된 채, 어느 틈엔가 그녀의 머릿 속에서 화려한 카사
노바로 재조합 된 '또 다른 나'. 피식 웃음까지 나왔다.
"왜 웃어?"
"갑자기 궁금해서. 너 이러다가 싸울 때 또 내 소설 들먹이는거 아닌가 해서"
"아니야, 정말 안 그럴께. 그냥 소설 속 인물들일 뿐인데, 너무 리얼해서 자꾸 나도 모르게 착각을 하게
된 거 뿐이니까. 이젠 안 그럴께. 정말이야"
"후우, 알았어"
난 가벼운 한숨과 함께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심지어 가벼운 흥분까지 느꼈다. 얼마만의 글인가.
책상 위에 얹어둔 안경을 쓰고, 가볍게 목을 좌우로 꺾은 나는 블로그에 접속해 로그인 후,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무슨 글을 써야하나, 앉아서 곰곰히 한 5분을 생각한 난 키보드와 마우스 위에 다시 손을 얹었다.
실화 카테고리를 고르고…, 다시 걸레로 방을 닦기 시작한 아내의 무릎이 장판에 밀리는 소리를 들으며
글을 적기 시작했다.
'…민영은 이미 절정의 늪에 빠져 무아지경 속에서 그저 내 이름만을 옹알이하듯 가녀리게 부르고 있을
따름이었고, 나 역시 아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 죄책감 어린 쾌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