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엇뉘엇 저물어가던 어느 여름날의 오후, 나와 그녀는 세 시간이 넘게 앉아있던 까페에서 나와
함께 걸었다. 후덥지근함을 조금 달래주는 산들바람. 노란 햇살에 세상이 아늑해지는 시간.
"들어갈까?"
"그래"
발길이 닿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돌계단을 올라 살짝 숨이 찰 무렵 도서관 건물 앞 벤치에 앉아 내려다
보는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땀을 흘리며 뛰고 있었다.
"좋다"
기울어가는 햇살에 소년들의 그림자도 키의 몇 배로 늘어나고, 그 눈부심은 그녀의 머리칼에 반사되어
나의 눈가에는 주름을, 입가에는 미소를 선물했다.
"…그러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뻗어 잡은 그녀의 손. 땀이 흥건해 나의 끈덕진 손에 "왜 이렇게 손이 젖었어?"
라면서도 그대로 깍지를 끼어잡은 그녀. 됐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확실히 하고 싶어 난 입을 열었다.
"좋아해"
난데없는 나의 고백.
"친구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너를 좋아해"
언젠가 다른 여자에게서 들었던 거절멘트를 애초에 원천봉쇄하기 위한 재차 고백… 뱉고나서 아차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쯤되면 귀여움을 컨셉으로 잡기로 한다. 그리고 생각해두었다가 너무나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라서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그 말을 다시 꺼내들었다.
"니가 싫어도 할 수 없어. 난 너 좋아해"
그러자 내 말에 그녀는 깍지까지 끼웠던 손을 풀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이구, 애기야…"
무어라 대꾸하기 전에 그녀는 말했다.
"내가 들어본 고백 중에 최고로 멋없는 고백이다"
그녀의 말투가 그러나 그리 썩 나쁜 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가볍게 흥분의 콧김을 내뿜는 나.
그러자 다시 픽 웃으면서 손을 잡아주던 그녀….
"잘가"
왜 이렇게 오늘따라 예뻐 보이는 것일까. 모자를 눌러써서 눈조차 보이지 않는 그녀가 나는 왜
이다지도 예뻐보이는 것일까. 모자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좀 사줄 것을.
헤어지기 전에. 그녀가 내일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승아야…"
콧잔등이 갑자기 시큰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칼에 반사된 햇밫이, 문득 언젠가 그
운동장에서 함께 마음껏 노을을 만끽하던 날을 떠올리게 했다.
"왜"
이미 쉴대로 쉬고 건조한 목소리. 울지 말지. 그 예쁜 목소리 마지막으로 한번이라도 더 들려주지.
"가면, 영국 가면… 공부 열심히 해"
할 말을 잊어 겨우 쥐어짜낸 어이없는 멘트. 목이 메여하던 그녀조차 어이없어 피식 웃고 기침까지
한번 하게 만든 그 멘트. 하지만 그렇게라도 그녀의 웃음을 보게 만들어 기쁜 그 멘트.
"넌 마지막까지 할 말이 그런거 밖에 없니…"
그리고는 그녀의 작은 핀찬에 가슴 속 깊이 한숨을 내쉬게 된 그 멘트.
"우리…그… 운동장 다시 한번 걷지 않을래?"
나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
말없이 손잡고 걷는 우리.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나도 영국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비행기값이 비싸려나. 안 헤어지면 안 되나? 인터넷 전화 같은거로 목소리라도
자주 들으면 좀 괜찮지 않을까. 영국은 음식이 맛이 없다는데. 가뜩이나 마른 애가 더 마르겠네. 아,
얘네 어머니 요리 잘 하시니까 상관없으려나.
'씨발…'
서운했다. 정말 안 되나. 얼마나 힘들게 고백한건데. 얼마나 마음 고생하다가 고백한건데. 그 먼 데로
가면서 어떻게 그동안 말 한 마디를 안 할 수가 있냐. 난 친구도 아니었나? 원랜 안 가려고 했었다고?
그런데 왜 가는데. 내가 고백하니까 왜 가는건데. 왜 온 가족이 다 가는데? 내가 찾아보니까 외교관들
혼자서도 많이 가더만. 얘네 아빠는 왜 그리도 유별난건데.
'개씨발…'
하마터면 입 밖으로 욕을 할 뻔 했다. 너무 서운해서. 너무 아쉽고 서러워서. 나도 영국까지 따라서
가고 싶다. 난 정말로 안되나. 왜 내가 고백하면 다들 이러나. 눈가를 슬며시 손으로 닦았다.
"윤성아…"
운동장을 중간쯤 가로질렀을 무렵, 그녀가 말했다. 난 퉁명스레 되물었다.
"왜?"
나도 내 퉁명스러운 말에 놀랐을 그 무렵, 그녀는 가볍게 나를 안아주었다.
"나도 너 좋아해. 많이 좋아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난 격하게 그녀를 끌어안았고
아마도 이 순간 운동장의 몇몇 학생들은 우리를 보면서 히히덕 댔겠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나도…정말 많이 좋아해…"
노을에 길어진 우리의 그림자가, 서로 끌어안고 있는 저 긴 두 그림자가 참 예뻤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림자 같아서 정말로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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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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