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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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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투 ] 에 이어서-


사내커플은 그게 문제다. 싸우더라도 바로 그 다음 날이면 같이 또 얼굴을 보게 된다. 물론 그런 만큼 다시 
화를 풀 기회도 많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그 과정이 솔직히 쉽지만은 않다. 

"글로벌 큐브 쪽에 계약서 진행 어떻게 됐냐고 알아보고, 유피아 쪽에서 제안 들어온거 검토해보고 부장님
한테 기안서 올려…"
"알았어"

아침부터 극도로 저기압인 그녀를 보며 모두들 눈치를 본다. 사내 메신저로 진아가 나한테 묻는다.

[ 언니 오늘 왜 저래요? ] 
[ 글쎄;; 뭔 일 있나? ] 
[ 오빠가 물어봐요ㅋ ]
[ 아 니가 물어봐ㅎㅎ ]
[ 알았어요 이따가 밥 먹으러 갈 때 물어봐야겠다 ]

알아도 모르는 척 할 뿐. 나 역시 그저 일에만 집중할 따름이다. 사실 일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나도
힘이 없고 무기력하다. 마음이 답답하다. 그래서 그런지 시간도 잘 간다. 얼레벌레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11시 41분. 결국 오늘 오전 중으로 꼭 처리해야 하는 일만 간신히 마치고 다른 일은 아무 것도 못했다.
 
밥 먹으러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지윤이가 말했다.

"나 오늘 밥 안 먹어. 너네들끼리 먹어"
"언니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인애와 진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고, 1팀의 태진 대리도 "지윤씨 어디 아파요?" 하고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식욕이 없어서. 걱정하지 말고 먹고 와요"
"알았어요 언니, 올 때 뭐라도 사올까요? 샌드위치 아니면 삼각김밥이라도 사올까요?"
"아냐 괜찮아"

다들 걱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고, 나 역시 그녀를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회사 근처 칼국수 집에서 밥 먹고 돌아오는 길, 1팀의 항상 같이 다니는 남자 셋과 만났다. 

"여어"

'준식이 형'이라고 부르는 그 그룹의 제일 나이 많은 형이 우리를 알아보고 손을 들었다. 올해로 서른
셋이지만 파견직 사원이다. 그것도 올해 말이면 계약이 끝난다. 

"뭐 먹었어요?"

의진이 물었다. 적당한 키에 잘생긴 얼굴, 그냥 흔한 야상 하나를 걸쳐 입어도 잘 어울리는 그런 맵시
좋은 외모다. 그렇다고 무슨 엄청난 미남은 아니지만, 그냥 소개팅 나간다면 내가 여자라도 '이 정도면
뭐 OK~' 할 정도의 훈훈한 외모. 그리고 그래서 뭔가 그를 보면 항상 질투가 났다. 

"국수 먹었어요. 다들 뭐 드셨어요?"

인애가 진아의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의진은 "굴국밥 먹었어요. 요 근처에 새로 열었는데 완전 맛
있던데. 다음에 같이 먹으러 갈래요?" 하고 묻다가 "어? 지윤 대리님은요? 같이 안 먹었어요?" 하고
다시 묻는다.

진아가 웃으면서 "와 지윤 언니부터 찾는거 봐. 왜요? 같이 안 먹었으면 뭐라도 사다주게요?" 하고
짖궂게 물었다. 옆에서 인애도 쿡쿡 웃었고, 1팀의 준식이 형과 성민이도 낄낄대며 웃는다. 자꾸 그 
둘을 옆에서 엮어대니 나도 모르게 씁쓸하고 부아가 났다.  
 
회사 건물에 도착해, 나는 "화장실 좀 들어갔다 갈께. 먼저 올라가" 하고 잠깐 화장실로 향했다. 진짜
어디 혹시 아픈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지윤에게 카톡을 보냈다. 

[ 뭐라도 사다줄까? 아프면 약이라도 사다줄까? ] 

아프기는, 나 때문에 아픈 거지만, 그래도 괜히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렇게 카톡을 보냈다. 소변을
보고 다시 카톡을 확인했지만 답장은 없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루한 월요일의 오후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하루종일 가슴에 멧돌이라도 얹어놓은
마냥 마음이 무겁다. 그래도 오후 5시 반이다. 이제 곧 퇴근이다. 하지만 차라리 지금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 막상 퇴근 후가 두렵다. 

"언니, 배고프지 않아요? 내가 간식거리 좀 사올까요?"

인애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윤에게 물었다. 지윤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저었지만 옆에서 진아가 
일부러 눈치없는 듯 "난 배고픈데. 빵 좀 사와라" 하고 말하고는 인애에게 윙크를 했다. 나 역시 군말
없이 지갑에서 돈 만원짜리를 꺼내어 인애에게 건냈다. 인애와 진아는 입 모양으로 "올~" 하고 웃어
보인 후, 조용히 간식거리를 사러 나갔다.  

사무실 창 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저녁놀이 아름답기보다는 그저 마냥 불안하고 두렵기만
했다.

오늘 저녁 집에 돌아가는 길, 집에 돌아가서 지윤에게 연락을 하고, 또 오랜 시간 답답한 전화를 하고… 
아니 전화라도 받으면 다행이겠지. 그냥 어제 괜히 그 말을 했다 싶었다. 그냥 모르는 척, 한번 그냥 슥
넘어갔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나중에 택시에서 내린 후에 지윤이가 웃으며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던가. 웃으면서 이야기하다가 좋게
좋게 한번 슥 말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술 기운 때문이었을까. 혼자 멍하니 좌절하며 잡생각을 하던 
도중, 메신저 창이 반짝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 형욱아 ] 

지윤이었다. 

[ ㅇㅇ ] 

하루종일 업무 이외엔 아무 말도 안 했던 그녀가 나에게 먼저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조금 화가 풀렸나.
서둘러 대답을 했다. 한참을 무언가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한 그녀는 곧 한 문장만을 남겼다.

[ 오늘 끝나고 이야기 좀 하자. 퇴근하고 7시에 커피 앤 타임에서 봐 ] 

유래가 없던 일이다.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헤어지자는 말이라도 할 생각인가.
온갖 잡생각에 호흡마저 거칠어졌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갑자기 어제의 일이 너무나도 후회되었다.

'그냥 한번만 참을걸'

그랬으면 되는 것을. 그냥 다들 모르니까 장난 치느라고 그런 건데. 지윤이도 그렇다고 정색할 수도 
없는 거 아니었나. 게다가 "의진이 좋아하냐?" 라니. 아…

그저 정신이 아득해졌다. 난 그저 

[ 알았어 ㅇㅇ ]

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애써 태연한 척 대답을 하고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인애와 진아가 먹을 것을 이것저것 사왔지만, 지윤은 거의 억지로 인애가 따서 준 커피 우유 하나만을
마셨을 뿐 다른 것에는 아무 것도 손대지 않았다. 



지윤은 끝나자마자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먼저 택시를 타고 갔고, 나와 진아, 인애는 버스를 함께
탔다. 진아가 말했다. 

"오늘 하루종일 지윤 언니 왜 그랬지…진짜 무슨 일 있나"
"그러게요. 걱정되네, 내가 문자 한번 보내볼까요?"
"아냐, 언니도 무슨 일이 있으니까 그러겠지"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기분이 좀 좋아지면 좋을텐데. 괜히 인애가 위로하는 문자 보내겠다는
것을 막는 진아한테 서운할 정도였다. 

"그래도 한번 문자 보내봐. 완전 우울할 때 귀에는 안 들어와도 누가 옆에서 뭐 말해주면 나중에라도
좀 기분 풀리면 위로되잖아"
"네 보내볼께요"

인애는 지윤에게 [ 언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힘내요! 언니 우울하니까 넘 걱정되요;; 알았죠? 낼은
꼭 웃는 얼굴로 만나요! ] 하고 이모티콘까지 첨부해서 카톡을 보냈다. 

진아는 "넌 진짜 이런 닭살 돋는 오글 멘트 잘 보낸다. 완전 여중생 감성이야 진짜" 하고 웃었고 인애
와 나도 그 말에 웃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 근처 까페 '커피 앤 타임'으로 향하는 길… 아까의 웃음을 떠올리며 애써 표정을 잘
관리하려고 애썼지만 우울하고 걱정이 된다. 아무래도 헤어지자는 말을 들을 것 같다. 시계를 보았다.

아직 6시 40분. 골목 하나만 꺾으면 이제 그 까페다. 하지만 난 걷기를 주저했다. 잠깐 머릿 속으로 
할 말을 떠올려보고,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했다. 

그냥… 어제 사람들이 너무 막 옆에서 부추기고, 너도 막 거기서 웃고 있길래 그게 괜히 속상하고
서운해서 너한테 그랬다고 할까… 하지만 막상 그러기에는 "너 의진이 좋아하냐?" 라는 미친 말이 
족쇄가 된다. 씨발. 

암만 짱구를 굴려봤자 변명이 안된다. 후우. 그냥 무조건 미안하다고 빌까. 난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까페로 향했다. 골목을 지나 통유리 밖에서 보니, 까페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찬찬히 살피
노라니 지윤은 혼자 커피를 마시며 잡지를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그리 표정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난 까페로 들어섰다. 




"… …"

지윤이는 "내 걸로 계산해" 하면서 카드를 내밀었다. 난 괜찮다며 내 카드로 내 커피를 결제했다. 커피를
받아와 마주보고 앉아 얌전히 그녀가 잡지를 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쁘네…"

광고 페이지를 보면서 혼자 작게 중얼거린 그녀. 난 그저 말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만을 마시고 있었고
지윤은 곧 그러다 턱, 하고 잡지를 접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 그만 만나자"

…난데없는 그 말에 가슴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눈 앞이 아득해지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도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듯 했다.

"왜"

겨우 대답한 한 마디. 지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몰라서 물어? 나 너 못 날거 같애. 솔직히 나도 비밀 연애하는거 힘들어. 나도 다른 애들처럼, 편하고
당당히, 회사에서 남친 이야기도 하고 주변에도 다 공개하고 그러고 연애하고 싶어"
"하면 되잖아. 사내연애라고 다 뭐 비밀로 하는 것도 아니…"
"싫어"

그녀는 내 말을 단칼에 잘랐다.

"사내연애한다고 옆에서 수근대는거, 정말 죽도록 싫고 오늘처럼 만약에 너랑 나랑 싸워서 안 좋으면
분명 또 뒤에서 사람들 이상한 소리 해댈테고, 나 그런거 진짜 싫어. 그럴 바에야 그냥 헤어질거야"

자존심이 센 그녀. 그래… 내가 여자래도 그런 것은 싫겠지. 나도 싫고. 그렇지만… 음.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시작하면서도 우리 연애 힘들 거 같다고. 아니면 니가 이직을 하던가. 근데 너
이제 겨우 정직원 되고 좋은 기회 잡았는데 어디 다른데 가는 것도 솔직히 좀 웃기고… 나 때문에 너
발목 잡히는 거 같고, 나 그런거 싫어"
"상관없어. 너랑 헤어질 바에야 어느 회사든 내가…"
"그것도 싫어. 야, 사내연애 비밀로 하는게 싫다고 남자가 아무 회사나 막 이직하는거 보고 어느 여자가
좋아할 거 같애? 그리고 그러고 나면 뭐 그게 당당해져? 진아, 인애 다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인데 너
이상한 회사 가고 그제서야 우리 사귄다고 하면 그게 모양새가 좋겠어?"

흐음…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지윤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냥, 우리 친구처럼 지내자. 뭐 우리가 헤어진다고 해서 다시 못 보는거 아니잖아. 뭐 다시 못 보게
되면 하는 수 없고. 그리고 그냥 친구처럼 인애랑 진아랑 가끔 같이 넷이서 영화도 보고 그렇게 그냥
친구처럼 지내면 되잖아. 우리 단 둘이 연인으로서 만나는 그런 건 없어도, 아니면 같이 가끔 이렇게
커피라도 마실 수 있고"

문득 거기까지 말을 듣자 뭔가 분하고 억울했다. 가볍게 떨리는 손을 겨우 커피잔으로 옮기며 숨겼다.
그리고 정리되지 않는 머릿 속을 억지로 챙기며 말했다.

"친구처럼… 그렇게 지낼 수도 있겠지만… 난 너 좋아하니까… 많이 좋아하니까… 어제 일은 내가 
잘못했어. 그냥 술 기운에 내가 뭔가 짜증나고 답답한 마음에…"
"아니 어제 일은 상관없어. 그냥 너도 힘들었겠지 그동안. 나도 힘들었고. 나도 솔직히 옆에서 그렇게
장난처럼 그러는데 웃으면서 받아넘기면서도, 속으로 너 눈치보고, 그래서 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우리 관계 오해 안하게 되면 더 좋지 않나? 생각도 했어. 근데 너가 그만큼 힘든거잖아. 나도 어제 밤
에 생각 많이 했어. 나도 힘들고 너도 힘든 연애, 그만하자. 어? 형욱아, 우리 그만 만나자"

어쩌면 차가워도 이렇게 차가울까. 아득히 멀어져 가는 너를 보며 나는 마냥 어둠의 미로 속에서
헤메이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아니야. 어제는 진짜 내가… 하아, 내가 좀 미쳤었나봐. 그리고… 그래, 너 많이 힘들겠지. 
나도 뭐, 힘들긴 한데… 후우, 음, 그렇지만… 내가 앞으로 더 잘하고… 또 뭐, 좋은 기회도 오면 
이직도 해서, 멋지게… 그래서 다른 사람들 축복 받으면서 우리 둘이 당당하게 어? 너가 내 여자
친구고, 나는 또…"
"그런 날 안 올 거 같애…" 

지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난 침을 꼴깍 삼키며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쉽지야 않겠지. 그렇지만 당장 다음 달부터 대기업들 공채 시즌이니까… 내가 부지런히 써서…"
"아니 그래, 너 잘되면 좋지. 난 너 정말 잘 됐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걸 떠나서… 난 요즘 그냥 다
싫어. 회사 다니는 것도 싫고, 누구랑 만나는 것도 싫고…"
"지윤아…"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너 만나는 것도… 그래, 너가 나한테 잘하고 그래서 고맙고 좋은데…
서로 힘들잖아. 같이 둘이 손잡고 퇴근도 못 하고… 맨날 회사에서 사람들이 나한테 연애 왜 안하
냐고 물어보고 또 소개팅 해주겠다 뭐 그러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좀 그래. 거절하고 그러는 것도
한두번이지. 이상한 사람 같잖아"
"남친 있다고 하면 되잖아"
"진아랑 인애가 가만 있을 애들이니? 내가 남친 있다고 하면, 사진이라도 한번 보여달라고 할텐데
그때는 뭐라고 해? 걔들은 연애하면 나한테 다 그런거 오픈했는데, 나만 뭐 어떻게 숨겨? 그렇다고
다른 남자 사진 보여줘? 그게 더 웃기고 이상해"

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사람들한테 나랑 사귄다고 알리는게 막 부끄럽고 그래?"

이 말을 꺼내는게 그렇게 힘들었다. 인정하기 싫었고, 만에 하나 그녀가 그렇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고, 그냥 이런 말을 꺼내는게 치욕스러웠다. 지윤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넌 정말 애다…"

무슨 뜻에서 하는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뜻이야?"
"니가 어디 다른 사람한테 알리기 부끄럽고 그런 사람이었으면 내가 너랑 사귀었겠어?"

조금은 안도가 되었지만, 그러고 나니 저 말을 꺼낸게 뭔가 내 밑바닥을 보인 기분이라 싫었다. 

"내가 말했잖아. 난 막 회사에서, 사람들이 뒤에서 우리 연애 갖고 수근거리고 그러는거 진짜 딱
싫어. 영업부에 걔, 치마 짧게 입고 다니는 애, 걔랑 기획팀 윤 과장님이랑 사귀는거 갖고 회사에서
다 뒷담화 하잖아. 우리도 맨날 그 이야기 하고. 그렇게 입방아 오르는거 진짜 죽기보다 싫어. 그럴
바에야 그런 연애 안 하고 말아"

그녀는 상상만 해도 짜증나고 싫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보니 나 역시 참 찝찝하고 싫었다. 난
할 말을 찾지 못했고 머릿 속에서 빙빙 헛 말만 맴돌았다.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지윤아…"

나지막하게 그녀를 향해 이름을 불렀다. 설령 그녀가 그래, 만약 나를 떠난다면… 정말로 힘들겠지.
아마… 난 회사를 관둘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를 마지막으로 붙잡고 싶다. 

"내가 생각이 짧았고… 그냥 뭔가 욱하는 마음에 어제는 실수를 했어. 그렇지만… 내가… 너랑 나랑
헤어지고 나면 정말로 힘들거 같애. 정말정말 후회도 많이 할 거 같고… 그렇지만 내가 정말 무슨 
그렇게 못 견디고 그럴 거 같았으면 너랑 지금까지 사귀기는 했겠니. 내가 아직은 수양이 덜 되고,
뭐 그래서… 일단 여튼 미안하고, 다시 잘 해보자. 앞으로 정말 잘할께. 내가 미안했어. 너랑 나랑,
나 이 회사 처음 들어왔을 때 너 보고 얼마나… 얼마나 좋아했는지…"

나도 모르게 예전 생각이 났고, 그 처음, 지윤이를 봤고, 그녀와 친해지던 시절의 추억이 생각났다.
그래 조금씩 친해지고, 한발자국 한발자국 친해지던 그 시절의 추억. 처음으로 퇴근길에 조심스레
그녀의 휴대폰으로 전화도 걸고… 

첩보영화 마냥 몰래 따로 퇴근하고 만나서 영화도 보고…

처음으로 깊은 밤에 길게 어색하지만 풋풋하게 전화도 하고…

회사에서 단체 워크샵을 갔을 때 미끄러져 발목을 삔 그녀를 들쳐업고 산길을 내려왔던 기억…

정직원으로 전환되고 내 딴에 드디어 그녀에게 고백을 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고는 과감히,
차이면 다 관둘 각오까지 하고 고백을 한 기억…

그리고 지윤이가 알겠노라며 웃던 순간의 그 기쁨…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집 근처 대학교 교정에서 나눈 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

당장 다음 달에 성과급 들어오면 그걸로 어디 근사한 펜션에라도 1주년 기념으로 여행이라도 갈
생각도 했는데…

그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눈물이 그만 왈칵 쏟아졌다. 그냥 어제 하루만 참았으면 될 걸.
지윤이가 어디 바람이라도 피우고, 뭐 그럴 앤가? 

"미안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지윤은 조용히 눈을 내리깐 채로 거의 다 마신 커피 잔만을 바라보았다. 




"그럼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나와, 그녀의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이대로 헤어지는건가 싶어서 발걸음이 떨어
지지 않았지만 겨우 그렇게 말을 하고나니 발을 뗄 이유가 생겼다. 저 앞의 큰 길까지, 이 골목길을 
벗어나면 우리는 이제 연인이 아닌 다른 관계가 되겠지.

'정말 좋아했는데…'

어젯 밤의 내가 죽도록 미웠다. 물론 마음 한 구석에서는 어제의 나 역시도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건
아니라고 애써 항변했지만, 그녀와의 만남이 어그러진다면 그걸로 나는 어제의 나를 죽도록 미워할
자격이 있다. 

몇 걸음 떼다 뒤를 돌아볼까 했지만 마음 독하게 먹으며 다시 한발자국을 떼었다. 참았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냥 내가 다 망친 거 같아서, 지난 1년 간 그렇게 서로 조심스럽게 만난 모든 것을 그 한
순간의 욱하는 마음이 망친거 같아서 너무 억울하고 아쉬웠다. 

그때였다.

"…형욱아"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했지만 침 꼴깍 삼키고 뒤를 바라보자 지윤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난 나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가며 끌어안았다. 욱씬욱씬 아팠던 가슴이 아스라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미안해…"

지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어제 오늘 이틀간 한없이 서럽고 아팠던 그 마음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난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저 끅끅대는 눈물 만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그만큼 그녀가 좋았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 

사랑한다 지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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