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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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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이주일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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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칼, 뻐근한 뒷목, 두통이 끊이질 않는 머릿 속, 부을대로 부은 눈, 아픈
목…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폐인도 이런 상폐인이 없다.

긴 한숨과 함께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한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로 와 털썩 앉는다. 모처럼의 연휴라고 해봤자
할 일이 없다. 이제는 그녀가 없으니까. 평소 같았으면 일어나 침대에서 뒹굴대며 전화로 히히덕 댈 그녀가
없으니까.

가벼운 콧바람이 나도 모르게 뿜어져 나온다. 한숨인지 짜증인지 구분이 어려운 그런 콧바람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스트레스를 진정시킨 난 냉장고부터 연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케챱과 빈 김치통, 말라 비틀어진 당근조각,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 피자 먹을 때 딸려온 피클 몇 개가 전부다. 물 한 통이 없다.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쉬고 냉장고 문을 닫는다. 신 김치 냄새가 방 안에 감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멋대로
벗어놓은 잠바에서 담배를 꺼낸다. 찢어지게 목이 아프지만 불을 붙이고는 그대로 창가에서 담배 연기를 뿜
어낸다. 그녀도 지금쯤은 내가 보고 싶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넘어가면 잘 풀리지 않을까.

창 밖으로 손 잡고 집으로 들어서는 한 가족이 보였다.

언젠가는 우리가 가정도 꾸리고, 자식도 낳고 함께 늙어가고, 언젠가는… 뭐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흐, 뭐
로또가 맞았다면 가능하기도 했겠지.

"흐"

마음 한 구석이 아프면서 그녀에게 다시 전화 걸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흩어지는 담배 연기 속으로 참
정말이지 헛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은 다들 어떻게든 잘만 살던데.

이럴 때 등 뒤에 갑자기 그녀가 나타나 나를 안아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을 해본다. 매일 저녁 집에
돌아오며 생각한다. 그녀가 내 방 안에서 저녁준비를 해놓고 "놀랐지? 앞으로 잘해라? 어? 딱 한번만 봐
주는거야?" 하면서 웃어주는 그 모습을.

하지만 그런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는 대신 항상 불 꺼진, 엉멍진창으로 흐트러진 방만이 나를 반긴다. 

보고 싶다.

사실은 엊그제 혼자 몰래 그녀의 집 근처 골목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가 오기를. 8시가 넘자 다소
피곤한 기색의 그녀가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하지만 난 차마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나타나서 뭘 어쩌자는건데, 하는 내 마지막 이성의 외침이 나를 막았다.

그저 그렇게 구석에 숨어서 그녀 모습만 바라보던 그 병신같고 한심한 모습이 나일 뿐이고, 그 지독히도
혐오스러운 병신이 바로 나다.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한참을 멍하니 그 골목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서있다가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 날 밤 몸살을 앓았다.

불덩이 같은 열 속에서 옛날 생각이 났다. 언젠가 내가 아팠을 때 물수건 놓아주던 그녀. 물론 언젠가 
나도 그녀에게 그랬었고.

이를 딱딱 부딪히게 떨면서 콱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엄마 아빠가 얼마나 나를 힘들게 키웠
는지를 알기에 그 생각만 하면 그냥…속이 상하면서도 차마 나쁜 생각까지는 못하게 된다.

다 피운 담배를 휙 던져버리고 침대에 다시 벌렁 누워 그녀와 함께 이 침대에서 뜨겁게 뒹굴던 순간을
떠올려 본다. 검푸른 달빛에 비쳐보이던 그녀의 실루엣과 유난히도 뜨거웠던 숨결. 그리고 그 남달리
뜨거웠던 그녀의 입 속.

머릿 속에 순간순간의 장면이 지나가고 나의 그것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등신같이, 보람도 없이.

"뭐하자고 병신아"

픽 웃으며 길게 한숨을 내쉰다.

사실 나는 아마도 지금 그녀를 보고 싶은게 아닐게다. 그저 이 성욕을 채우고 싶을 따름인거지. 어차피…
나같은 놈 아니더라도 그녀는 좋은 사람 만나서, 뭐 그렇게까지 썩 좋은 사람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나
보다는 좋은 사람 만나서, 남들 사는 것처럼 그렇게 적당히 애 낳고 적당히 그렇게 잘 살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좋은 사람과 함께 낳은 자식들 앞에서 행복하게 이승을 떠나겠지.

난 아마도 이렇게 적당히 대충 살다가…글쎄.

미래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스무살의 내가 오늘의 나를 생각하지 못했듯이, 또 예측하지 못했던
어떤 모습으로 적당히 살고 있겠지.

그리고 가끔은 머릿 속에 한창 때의 기억을 그리면서 혼자 실실 웃고, 또 그렇게 혼자 씁쓸해하다가 술
생각이 나면 술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자고…

그러다 10년도 더 된 옛 사랑이 문득 무척이나 그리워지는 어느 날 밤이면 혼자 미친 놈처럼 옥상에 올라,
이제는 잘 떠오르지도 않는 니 얼굴 억지로 생각하며 크게 외쳐보겠지.

정말로 사랑했다고. 아마 잘 살고 있겠지만 더 행복하게 잘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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