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담배 입에 물고 PC방에서 오늘도 시간을 죽치고 있노라니, 뭐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저녁 6시다. 스윽
PC방 요금도 확인해보니 7800원이다. 아까 라면 쳐먹고 음료수까지 쳐먹었으니 이렇게 얼레벌레 돈 만원
쳐날렸네.
쓰읍
금연한답시고 사놓았지만 사놓고 몇 달을 쳐박아 놓았다가 며칠 전 문득 생각나 꺼내문 전자담배. 그러나
암만 생각해도 이걸로 금연에 성공한다는건 정말이지 운동으로 딸딸이 중독을 극복한단 소리처럼 허황된
소리가 틀림없지 싶다.
방구석에 있노라니 일자리나 알아보라는 엄마 등쌀에 시달려 그냥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PC방으로 도망쳐 나와있는데, 온라인 게임 손에 잡았다가는 정말로 제대로 인생 조지지 싶어서 만날 당구
아니면 섯다나 하고 있노라니 이 지랄은 집에서 해도 될텐데, 하는 생각에 돈 아깝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그러던 중에… 입구에서부터 또각또각 힐 소리가 들려온다.
PC방에 어울리지 않는 그 소리에 힐끔 쳐다보니, 정말로 PC방에 어울리지 않게 당장이라도 어디 번화가
고급차 조수석에서 도도한 표정 지으며 앉아있어야 할 것 같은 키 큰 섹시 귀요미가 죽 비어있는 내 라인
옆옆 구석 의자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슥 내려놓으며 PC를 부팅한다. 가방은 멀버리네.
허허, 하고 다시 내 섯다에 집중하고자 하지만 은은히 풍겨오는 향수 냄새에 나 뿐만 아니요 뒷자리에
앉은 피파 덕후 좆대딩 두 마리도 그녀를 향해 신경 촉수를 뻗는 것이 느껴진다.
저렇게 이쁜 애는 뭔 게임을 할까. PC방 초창기 시절 'PC방'이 아니라 'PC까페'를 차리겠다며 동대문에
크게 판 벌렸다가 죄 말아먹은 성덕이 형이 꿈꾸었던 청사진에는 저런 미인이 들어 있었겠지.
아예 단축키 눌러놓고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보노라니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저
얼굴이 참 귀엽기도 귀엽다. 덥기도 더운지 남색 가디건을 벗고는 계속 PC대신 휴대폰으로 카톡을 하는
듯 하는데 아 PC방에서 여자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이토록이나 아저씨처럼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
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예쁘기 때문이라.
이윽고 그녀는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데, 아, 목소리도 예쁘다.
"응, 나 지금 PC방. 어…? 그래? 어, 하는 수 없지 뭐. 아냐 괜찮아. 응, 아라가 그래? 대박, 응, 알았어.
그럼 다음에 봐"
그리고서는 그제서야 마우스를 손에 잡고 컴퓨터를 하기 시작하는데, 물론 그때까지 계속 내가 그녀를
향해 눈알을 고정시킬 수는 없는 법이니 나도 나 역시 내 모니터를 주목하지만 왠지 흥이 떨어진다. 뭐
기껏 1억 고지 돌파했다가 아까 무모하게 일곱끗으로 똥배짱 부렸다가 큰 판 깨지고 연달아 막 지르다
보니 재미가 있을 리 없다.
그러기를 몇 분.
"저기요"
귀요미의 목소리. 나를 비롯해서 뒷 자리의 피파 덕후 새끼들도 일제히 그녀를 향해 눈을 돌렸지만
그녀가 지목한 것은 나였다.
"저요? 큼!"
아 씨발, 하루종일 입 쳐닫고 혼자 묵묵히 게임만 쳐하노라니 목소리가 갈라졌다. 겨우 목을 가다듬고
"왜요?" 하고 무뚝뚝하게-자상하게 묻고 싶었는데 왠지 목소리가 뚱하게만 쳐나온다. 지미럴- 물었다.
그녀의 얼굴을 대놓고 똑바로 볼 수 있는 이 짧은 기회, 아, 눈에 칼을 제대로 댔네. 흔히 말하는 성괴,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이쁜 얼굴을 감히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류 의학기술에 대한 모독이 아
닐까 싶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귀여운 얼굴이다. 사랑스럽네.
"혹시 라이타 있으세요?"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특히 임산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습니다. 라는 멘트가
머리를 스치며 "아니요, 없어요" 하는 대답을 하며 난 또 상냥한 얼굴로 전자담배를 들여보였다. 그녀
는 내 전자담배를 보며 피식 웃고는 옆을 돌아보았지만 피파 덕후 두 마리는 모두 비흡연자인 모양.
결국 그녀는 벨을 울려서 알바를 불렀지만, 아디다스 츄리닝 차림의 남자 알바생은 "죄송합니다, 여기
PC방에서 담배 안 되요" 하고 아예 흡연 자체를 금지시켰다. "담배 안 되요? 담배 못 피우는 PC방이
어디있어?" 하며 그녀는 당혹스러워했지만 알바생은 "사장님이 시키신거라서요, 죄송합니다" 하고
다시 슥 카운터로 돌아가버렸다.
그녀는 의자를 옆으로 돌린 채 혼자 "참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일어나 나갈 것이라는 내 예상
과는 달리 계속 자리에 앉은 채로 또 가방을 뒤적이다 무언가를 꺼냈다.
전자담배였다.
뜻밖의 물건이라 별 웃긴 일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흣, 하고 웃어버렸고 그녀는 내 웃음 소리에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가 멍청한 얼굴로 입에 전자담배를 물고 있었던 탓인지 그녀도 픽 웃음이 터진
듯 했다. 그리고 그녀는 물었다.
"그거 무슨 맛이에요?"
난 "알로에 맛이요" 라고 대답했고, 그녀는 "전 그냥 담배맛인데. 좀 시원찮지만. 그런 과일향 그런건
어때요? 쓸만해요? 나 한번도 안 해봤는데" 하고 또 물었다.
난 "담배 피우는 맛은 아니고, 그냥 무슨 사탕 먹는 기분인데… 한번 맛 보실래요?" 하고 슥 내 전자
담배를 내밀었다. 하루종일 입 다문 채로 라면에 커피 쳐먹은 썩은 입으로 빨아댄 전자담배다 보니까
반 농담으로 내민 건데, 뜻밖에 그녀는 내 전자담배를 곧바로 받아들었다.
'어?'
하는 사이에 그녀는 긴 속눈썹을 내리뜨며 길게 한 모금 빨았다. 뭐 그래봐야 달달한 사탕 느낌일 뿐
이겠지만 그녀는 "괜찮네" 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다시 담배를 건내주었다. 혹시 립스틱이라도
묻지는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그딴 건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녀가 한번 입으로 빤 담배를 다시 빨
생각에 기분은 좋아졌다.
"고마워요"
꽤나 시크하게 의자를 고쳐앉은 그녀는 그 한 마디와 함께 다시 자기 모니터에 집중했다. 나 역시
그렇게 하려다가 괜한 미련으로 한 마디 물었다.
"무슨 게임해요?"
그러나 내 말을 씹는 듯 대답이 없어서 '끝난 대화를 억지로 이어가려다 민망해졌네' 생각한 찰나
그녀는 "고스톱" 하고 한 마디 하더니 나에게 되물었다.
"같이 할래요?"
그녀는 나와는 다른 회사의 고스톱 게임을 즐기는 유저였다. 좋다 말았네, 하는 순간 그녀는 "이건
안 한지 꽤 됐는데. 손맛이 별로라서" 라며 중얼거리더니 자기 컴퓨터에서 내가 하는 고스톱에 접속
했다.
"아이디 뭐에요? 친구 추가하게"
그제서야 난 처음 통성명한 여자와 함께 고스톱 게임을 하기에 나에게 꽤 중대한 문제가 있음에도
그걸 잊고 있었다는 생각을 겨우 떠올렸고, 때문에 한 5초간을 주저하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ssking이요"
내 말에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내 등 뒤의 피파 덕후 둘은 급기야 웃음을 참지 못하고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난 모르는 체 말도 안되는 부연설명을 했다.
"옛날에, 중딩 때 친구가 제 명의로 만든 아이디라…흠…"
"됐고, 에이, 중수도 안 되네. 자유 채널에서 해야겠다"
그녀는 나보다 계급부터 한참 위였다. 고스톱 머니도 물론 나와는 자릿 수부터가 다른 고수…그나마
손 놓은지 오래인 게임이 이 정도라면 평소 즐기는 게임에서는 얼마나 초고수일까.
"와, 맨날 고스톱 게임만 해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흘러나왔지만 겨우 참고 난 함께 게임을 하기로 했다.
한 시간 가량을 함께 했는데, 솔직히 이제껏 이 게임 헛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치 다음에
무슨 패가 나올 줄 알고 치는 것처럼 완벽한 플레이를 했고, 나에게 일부러 밀어준 판 의외의 거의
대부분의 판에서 승리했다.
스타크래프트 처음 나왔던 시절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를 상대로 4드론 플레이로 3:1의 게임을 승
리로 이끌어 낸 중학교 동창 진동민-십수년간 까맣게 잊었던 그의 이름이 떠올랐던 것은 아마도
지금 이 완벽히 끌려다니는 플레이가 그때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겠지-의 기억이 떠올랐을 정도로.
그 즈음해서 난 솔직히 좀 지루해졌고, 집중력을 서서히 잃어갈 무렵 그녀는 나를 향해 말했다.
"배 안 고파요?"
난 문득 그 말을 뭐라도 사달라는 말로 알아듣고 "라면 먹을래요?" 하고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가서 밥 먹지 않을래요? 김밥천국에서라도. 나 혼자 먹는거 싫은데"
모르긴 몰라도 그녀에 대해 은근히 신경을 쏟고 있던 주변의 수컷들 대부분은 아마도 속으로 나를
향해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라면서 부러움을 쏟아내었으리라.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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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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