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한 주당이 아닌 이상 보통 낮술은 피하듯이, 나 역시 딱히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아 오늘 정말 덥네요"
"그러게요"
"대리님은 더 덥겠어요"
"어휴, 진짜 괜히 입었네요"
하지만 여름에 가까운 더운 봄 날씨, 우리는 땀이 줄줄 흐르는 외근 후의 갈증을 달래고 싶었고 그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에 보이는대로 바로 시원한 까페 다이닝 안으로 들어섰다. 메뉴판에는 커피는
물론 간단한 식사와 맥주, 몇 종류의 칵테일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그렇잖아도 거래처에서 커피를 마신
터라 난 차라리 칵테일을 마시고 싶었다.
"진 대리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전 모히토 마실래요"
"흠, 그럼 마티니"
"술 마시려구요?"
칵테일을 고르자 놀란 듯 진 대리가 그렇게 되물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부장님도 아까 그냥 그쪽이 싸인하면 바로 퇴근하라고 하셨는데요 뭐. 아, 보고 해야지"
"하긴, 아, 보고는 제가 할께요"
한 살 연상의 여자 직속 상사와 함께 나선 첫 외근. 평소 꽤 수수한 듯 하면서도 나름 귀여운 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챙겨입은 정장 차림은 새삼스레 섹시하게 느껴졌다. 나 역시 그저 후드티
나 입고 다니던 평소와 달리 정장을 챙겨입은 모습에 그녀도 나를 좋게 보았단다.
"진짜 사람이 달라 보인다. 완전 멋있네"
기왕 멋진거, 면허가 없는 그녀를 대신해서 내가 운전까지 해서 모셨다면 좋았을걸 아쉽게도 장농면허
라서 우리는 지하철에 도보로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외근을 다녀온 것이다. 다행히 결과가 좋았고 부장
님도 기분이 좋으셨는지 고생했다며 그냥 돌아오지 말고 현지에서 퇴근하시라셨다.
무척이나 목이 말랐기에 거의 들이키듯 한 잔을 금방 비웠고, 생각보다 훅 오르는 술을 느꼈다. 술이
별로 약한 내가 아닌데.
'왜 이러지'
땀을 너무 흘려서일까, 아니면 이 가게가 독한 진을 쓰나, 이도저도 아니면 내가 오늘 무척 피곤했었나.
혼자 얼굴 벌개지는 것도 민망하던 차에 다행히 진 대리가 먼저 "한잔 더 할까요? 이번엔 나도 다른거
마셔야지" 하면서 다른 칵테일을 주문했다.
앉은 자리에서 별 말도 없이 우리는 그렇게 세 잔 네 잔을 비웠다. 무슨 소주잔 비우듯이. 두 번째 잔
부터 진 토닉으로 바꿨지만 이미 난 벌써부터 취기가 돌았다.
아무래도 내 컨디션도 컨디션이지만 우리 둘 다 노곤했던 모양이다. 회식 자리에서 보았던 진 대리도
꽤나 술을 달릴 줄 아는 편인데 그녀도 벌써 다리를 꼬고 조금 풀어지는 듯 했다.
'흐음'
섹시했다. 평소에는 그저 마냥, 잘해야 나이에 비해 귀여운 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러고보니 은근
다리 라인은 괜찮다고 생각했었지. 하기사 볼륨도 제법 괜찮았지.
"현모씨는 여자친구 있지? 아, 없다고 했나?"
평소에도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사용하는 그녀였지만, 아까 어느 순간에선가부터는 계속 반말로 말을
하고 있었다.
"없어요. 요즘 맨날 일하고 집에 들어가면 자기 바쁜데, 무슨 여자친구에요. 대리님은요? 남자친구
있어요?"
꼬았던 다리를 풀며 고개를 젓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이제 손가락에 담배만 끼워주면 완벽히 클럽에
놀러라도 온 듯한 자세였다. 마신 것에 비해 조금 과하게 풀어진 것은 아닌가 싶지만, 도도하게 차려
입은 커리어우먼이 살짝 흐트러진 모습은 어쨌든 매우 남자를 자극시키는 데가 있었다.
"없다고 하면, 소개팅 좀 시켜줄래? 에휴, 나도 이제 시집 가야되는데 남자가 없다, 남자가"
"대리님이 정도면 완벽한데, 아 왜 남자들이 몰라줄까?"
"아 또 빈 말 한다, 우리 현모"
'우리 현모' 소리에 그때부터는 나도 더이상 진 대리님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아 다영이 누나, 근데 배고프지 않아요?"
6시가 넘어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음에도, 가게를 나오자마자 다시 후끈한 날씨를 느꼈다. 밖이
덥기도 더웠지만 가게 역시 조금 과하게 냉방을 하기도 한 모양이다.
"글쎄, 배고파?"
나는 수트의 자켓을 벗어 손에 들었고, 그녀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머리만 풀면 당장
어디 홍대에 가도 잘 노는 누나 간지 뿜으면서 신나게 흔들 수 있을 것 같은 그녀.
"그럼 치맥 어때?"
"좋아요!"
우리는 곧바로 길 건너편의 호프로 향했다. 횡단보도가 저 쪽에 있었음에도, 그냥 쿨하게 무단횡단을
시도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만 너털웃음이 터져나왔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조금 끌리기도 끌렸다. 아
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섹시한 그 모습이 좋았고… 뭔가 직장 상사와의 썸씽이라도 이루어지는 느
낌이라서 흥분 됐다.
"그래? 그럼 왜 헤어진거야?"
"그냥, 커플 헤어지는게 다 거기서 거기죠"
시원하게 아예 가게 앞을 터놓은 호프로는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왔고 마침 가장 앞의 테이블에 앉은
우리는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을 간간히 정리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래두, 뭐 헤어진 결정적인 계기 같은게 있었을거 아냐"
"바람 났어요. 회사의 동기 남자애랑"
"어머"
추임새를 넣어가며 이래저래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곧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내 남자친구도 그래서 헤어졌어. 자기 회사 팀 막내 애랑 바람나서"
칵테일에 치맥에…배가 빵빵하도록 마셨고, 몇 번인가 화장실을 들락거린 우리. 어느새 시간은 8시를
훌쩍 넘겼고, 슬슬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난 새삼 떠올렸다.
'허허'
그보다 내가 이렇게 배에 부담을 느끼는데, 타이트한 치마를 입은 진 대리님은 아마 지금쯤 배에 꽤나
압박을 느끼지는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숨 쉬는 것도 부담스러울지 모르지.
아까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니 오히려 얼굴이 많이 진정되었다. 더운 날씨에 갑자기 술이 들어가니 조금
놀랬던 것인지, 앉아서 적당히 쉬다보니 더 쌩쌩해졌다.
'어쩌며 좋을까'
아까부터 더이상 술은 마시지 않고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그녀. 다른 누군가와 대화라도 주고
받는 것일까. 주말 밤인데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하지만 누군가와 약속이 있
다면 진작에 일어나진 않았을까. 사실 이미 일어나려면 한참 전에 일어났어도 충분했을 정도로 파장
인데 우린 왜 갑자기 어색하게 이렇게 바람이나 쐬며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저 손님, 더 주문하시겠어요?"
"에… 아니요. 됐습니다. 더 안 드실거죠?"
"어어, 됐어"
마침 알바생이 물어왔고 우린 그제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계산은 그녀가 했다.
"어떻게, 집에 갈거야?"
진 대리는 그렇게 물었고, 난 잠시 무어라 대답할까 고민했다. 아니 그보다… 흠. 술 한잔 더 하자고
할까. 그게 무슨 뜻인지야 뻔하고, 그래 다 떠나서 그녀가 오케이 하고, 술 더 마시다가 뭐 외로운 남
녀가 분위기 타고 어떻게 잘 되었다 치자, 그러면?
바로 같이 일하는 상사와 사내연애라도 할 참인가? 아니, 원나잇으로 끝나더라도 그럼 또 앞으로는
그런거 전혀 의식하고 잘 일할 수 있나? 그보다 지금 나 혼자 심하게 김치국 쳐먹는건 아닌가. 뭐 또
어떻게 어떻게 잘 된다 쳐도, 그 이후 책임질 수 있나? 30대 접어드는 혼기 찬 여자 상사와 러브러브
해서 뭐 어떻게 잘 해볼 생각이라도 있나?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아득해지고 점점 답이 없어졌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난 그냥 물었다.
"다영이 누나, 술 한잔 더 안 할래요?"
웃으며 거절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녀는 의외로 굉장히 솔직하게 "나도 한잔 더 마시고 싶기는
한데, 지금 배가 너무 빵빵하고 가스가 차서 죽겠어" 라며 배를 문질렀다. 어색하게 말했으면 또 모
르겠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길래 감이 안 와서 긴가민가 싶었다.
그래서 거기서 난 용기, 아니 만용을 내었다. 어차피 뭐, 아니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대학 시절에
그토록이나 짝사랑했던 한영이 누나와 3차까지 술을 마셔놓고도 끝내 '쉬러 가자'는 말 한 마디를
못해서 허무하게 돌려보내고 여지껏 후회했던-하지만 덕분에 그 이후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나에게
큰 용기가 된- 기억을 되새김질 했다.
'그래, 어차피 대박 아니면 쪽박이지'
하지만 "술 몇 병 더 사가서, 요 앞에 모텔이라도 가서 더 마실래요?" 라는, 집 나온 고딩들이나 할
법한 폐급 멘트는 겨우 참아내고는 바로 난 물었다.
"오늘 집에 꼭 들어가야 돼요?"
그래,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좀 황당하기도 했으리라 생각한다. 평소 나름대로 동생처럼 귀엽다고는
생각했지만, 남자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나이도 어린 연하의 직장 후배가 같이 외근
한번 나와 술 몇 잔 했다고 같이 자자니, 무슨 미친 망발인가.
'하지만'
세상 일 전부가 결국 운과 타이밍이다. 이유 모르게 적당히 기분도 풀어졌고, 금요일 밤에다가 아주
기분좋게 술도 마셨고 오늘 내일 모든 스케쥴도 텅 비었고 새삼 보니 귀여운 데도 있고 남자다운데
도 있어보이는데다 무엇보다 남자에게 자자는 이야기 들어본 것 자체가 도대체 얼마만인가.
…라는 느낌으로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되물어왔다.
"너 정말 나랑 자도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도대체 무슨 후회라는 것일까, 라는 생각에 일말의 불안감이 들었지만 "그러고 나서도 앞으로 내
얼굴 보며 일 잘할 수 있겠어?" 라는 물음에 원나잇으로 알아서 먼저 선을 그어주는, 과연 연상녀
다운 센스있는 멘트에 난 쿨하게 외쳤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쉽게만 풀리진 않는 법, 무슨 오늘 뭔 날인지 두 군 데나 만실이었고 평소
그렇게나 많던 모텔 방이 어째 이 동네만 없는 것처럼 잘 안 보여 살짝 짜증이 날까말까 한 순간
난 상가 건물에 3층에 입주한 상가형 모텔을 발견했다.
잠시, 그냥 택시 타고 나가서 다른 동네로 갈까 했지만 귀찮기도 하고, 마음 변하기 전 얼른 그냥
자러 들어가자 라는 생각에 난 그녀와 함께 3층으로 향했다. 그저 그런 상가형 모텔 주제에 주말
이라고 7만원을 부르는 소리에 씁쓸했지만 별 수 있는가.
'도대체 내가 뭔 짓을 한거지'
씻으면서 그제서야 뭔가 분위기에 취해서 시덥지 않은 짓을 했다 싶었다. 그래, 진 대리 말대로
앞으로 뭐 어쩔건가.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 정말로 원나잇 일 뿐이다 하고
잊어버리기에는 또 좀 그렇지 않은가. 한번 잤다고 어설프게 지분거리는거야 쓰레기 짓이고.
하지만 일단 그런 고민은 잊기로 했다. 당장 오늘 밤은 간만에, 지지난 달에 '전전여친' 지희랑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을 보낸 이후로 참 오래간만의 거시기 아닌가. 그러고보니 진 대리는 마지
막 연애가 2년 전이라고 했는데, 그럼 섹스는 얼마만일까.
난 잡생각을 계속 주절주절 하는 대신 샤워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씻고 나오고, 곧이어 한참을 TV를 보고 있노라니 그녀도 씻고 나왔다. 뭔가 초현실적인 느낌
이었다. 당장 어제까지만, 아니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존칭까지 써가던 직장 동료와 뭐
이렇게 반쯤 벗고 모텔방에 들어와 씻고 있다니.
어색하지마 또 괜히 더 흥분이 되었다. 혹시라도 부끄러워 할까봐 메인 등을 끄고 TV와 침대 옆에
스탠드만 켰다. 그녀는 욕실에서 나오고도 한참을 물기를 닦아내고 머리를 말리고 하다가 웃으며
내가 "몸 닦다가 날 새겠네. 얼른 누워요" 하고 너스레를 치자 그제서야 픽 웃으며 침대로 조심스레
들어왔다. 향긋한 비누 냄새가 코를 스쳤다. 나의 그것은 불끈했다.
"하아, 으, 여기 휴지요"
"응"
솔직하게 말해서, 적당히 뭐, 그냥 쏘쏘한 섹스였다. 그렇다고 뭐 그녀가 별로였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진 대리도 나도 조금 쑥쓰러움을 타서, 뭐 아주 찰지게 즐긴 섹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
풋풋하고 즐거웠던 섹스였다고나 할까.
혼자 지랄이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가 물었다.
"내일은 뭐할거야?"
그리고 그 대답 여하에 따라서 앞으로 내 일상의 꽤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
지만 난 별 어려움 없이 대답했다.
"별 거 없는데, 같이 영화보지 않을래요?"
"그래, 좋아"
난 진 대리, 아니 다영의 손을 깍지를 껴서 잡았고, 다시 한번 그녀의 귀엽고도 섹시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속으로 나 스스로에게 외쳤다. '야, 이현모, 너 진짜 뭔 생각이냐?'
그리고 대답했다.
'그동안 그 정도면 솔직히 충분히 외로울만큼 외로웠잖아. 이제 됐어. 그리고 이 정도면 좋은 여자
잖아, 그래, 그걸로 좋아'
뭔가 애틋한 설레임이나 대단한 감정은 아니지만, 어차피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머지는
앞으로 더 만들어가면 되니까.
"아 오늘 정말 덥네요"
"그러게요"
"대리님은 더 덥겠어요"
"어휴, 진짜 괜히 입었네요"
하지만 여름에 가까운 더운 봄 날씨, 우리는 땀이 줄줄 흐르는 외근 후의 갈증을 달래고 싶었고 그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에 보이는대로 바로 시원한 까페 다이닝 안으로 들어섰다. 메뉴판에는 커피는
물론 간단한 식사와 맥주, 몇 종류의 칵테일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그렇잖아도 거래처에서 커피를 마신
터라 난 차라리 칵테일을 마시고 싶었다.
"진 대리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전 모히토 마실래요"
"흠, 그럼 마티니"
"술 마시려구요?"
칵테일을 고르자 놀란 듯 진 대리가 그렇게 되물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부장님도 아까 그냥 그쪽이 싸인하면 바로 퇴근하라고 하셨는데요 뭐. 아, 보고 해야지"
"하긴, 아, 보고는 제가 할께요"
한 살 연상의 여자 직속 상사와 함께 나선 첫 외근. 평소 꽤 수수한 듯 하면서도 나름 귀여운 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챙겨입은 정장 차림은 새삼스레 섹시하게 느껴졌다. 나 역시 그저 후드티
나 입고 다니던 평소와 달리 정장을 챙겨입은 모습에 그녀도 나를 좋게 보았단다.
"진짜 사람이 달라 보인다. 완전 멋있네"
기왕 멋진거, 면허가 없는 그녀를 대신해서 내가 운전까지 해서 모셨다면 좋았을걸 아쉽게도 장농면허
라서 우리는 지하철에 도보로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외근을 다녀온 것이다. 다행히 결과가 좋았고 부장
님도 기분이 좋으셨는지 고생했다며 그냥 돌아오지 말고 현지에서 퇴근하시라셨다.
무척이나 목이 말랐기에 거의 들이키듯 한 잔을 금방 비웠고, 생각보다 훅 오르는 술을 느꼈다. 술이
별로 약한 내가 아닌데.
'왜 이러지'
땀을 너무 흘려서일까, 아니면 이 가게가 독한 진을 쓰나, 이도저도 아니면 내가 오늘 무척 피곤했었나.
혼자 얼굴 벌개지는 것도 민망하던 차에 다행히 진 대리가 먼저 "한잔 더 할까요? 이번엔 나도 다른거
마셔야지" 하면서 다른 칵테일을 주문했다.
앉은 자리에서 별 말도 없이 우리는 그렇게 세 잔 네 잔을 비웠다. 무슨 소주잔 비우듯이. 두 번째 잔
부터 진 토닉으로 바꿨지만 이미 난 벌써부터 취기가 돌았다.
아무래도 내 컨디션도 컨디션이지만 우리 둘 다 노곤했던 모양이다. 회식 자리에서 보았던 진 대리도
꽤나 술을 달릴 줄 아는 편인데 그녀도 벌써 다리를 꼬고 조금 풀어지는 듯 했다.
'흐음'
섹시했다. 평소에는 그저 마냥, 잘해야 나이에 비해 귀여운 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러고보니 은근
다리 라인은 괜찮다고 생각했었지. 하기사 볼륨도 제법 괜찮았지.
"현모씨는 여자친구 있지? 아, 없다고 했나?"
평소에도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사용하는 그녀였지만, 아까 어느 순간에선가부터는 계속 반말로 말을
하고 있었다.
"없어요. 요즘 맨날 일하고 집에 들어가면 자기 바쁜데, 무슨 여자친구에요. 대리님은요? 남자친구
있어요?"
꼬았던 다리를 풀며 고개를 젓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이제 손가락에 담배만 끼워주면 완벽히 클럽에
놀러라도 온 듯한 자세였다. 마신 것에 비해 조금 과하게 풀어진 것은 아닌가 싶지만, 도도하게 차려
입은 커리어우먼이 살짝 흐트러진 모습은 어쨌든 매우 남자를 자극시키는 데가 있었다.
"없다고 하면, 소개팅 좀 시켜줄래? 에휴, 나도 이제 시집 가야되는데 남자가 없다, 남자가"
"대리님이 정도면 완벽한데, 아 왜 남자들이 몰라줄까?"
"아 또 빈 말 한다, 우리 현모"
'우리 현모' 소리에 그때부터는 나도 더이상 진 대리님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아 다영이 누나, 근데 배고프지 않아요?"
6시가 넘어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음에도, 가게를 나오자마자 다시 후끈한 날씨를 느꼈다. 밖이
덥기도 더웠지만 가게 역시 조금 과하게 냉방을 하기도 한 모양이다.
"글쎄, 배고파?"
나는 수트의 자켓을 벗어 손에 들었고, 그녀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머리만 풀면 당장
어디 홍대에 가도 잘 노는 누나 간지 뿜으면서 신나게 흔들 수 있을 것 같은 그녀.
"그럼 치맥 어때?"
"좋아요!"
우리는 곧바로 길 건너편의 호프로 향했다. 횡단보도가 저 쪽에 있었음에도, 그냥 쿨하게 무단횡단을
시도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만 너털웃음이 터져나왔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조금 끌리기도 끌렸다. 아
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섹시한 그 모습이 좋았고… 뭔가 직장 상사와의 썸씽이라도 이루어지는 느
낌이라서 흥분 됐다.
"그래? 그럼 왜 헤어진거야?"
"그냥, 커플 헤어지는게 다 거기서 거기죠"
시원하게 아예 가게 앞을 터놓은 호프로는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왔고 마침 가장 앞의 테이블에 앉은
우리는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을 간간히 정리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래두, 뭐 헤어진 결정적인 계기 같은게 있었을거 아냐"
"바람 났어요. 회사의 동기 남자애랑"
"어머"
추임새를 넣어가며 이래저래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곧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내 남자친구도 그래서 헤어졌어. 자기 회사 팀 막내 애랑 바람나서"
칵테일에 치맥에…배가 빵빵하도록 마셨고, 몇 번인가 화장실을 들락거린 우리. 어느새 시간은 8시를
훌쩍 넘겼고, 슬슬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난 새삼 떠올렸다.
'허허'
그보다 내가 이렇게 배에 부담을 느끼는데, 타이트한 치마를 입은 진 대리님은 아마 지금쯤 배에 꽤나
압박을 느끼지는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숨 쉬는 것도 부담스러울지 모르지.
아까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니 오히려 얼굴이 많이 진정되었다. 더운 날씨에 갑자기 술이 들어가니 조금
놀랬던 것인지, 앉아서 적당히 쉬다보니 더 쌩쌩해졌다.
'어쩌며 좋을까'
아까부터 더이상 술은 마시지 않고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그녀. 다른 누군가와 대화라도 주고
받는 것일까. 주말 밤인데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하지만 누군가와 약속이 있
다면 진작에 일어나진 않았을까. 사실 이미 일어나려면 한참 전에 일어났어도 충분했을 정도로 파장
인데 우린 왜 갑자기 어색하게 이렇게 바람이나 쐬며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저 손님, 더 주문하시겠어요?"
"에… 아니요. 됐습니다. 더 안 드실거죠?"
"어어, 됐어"
마침 알바생이 물어왔고 우린 그제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계산은 그녀가 했다.
"어떻게, 집에 갈거야?"
진 대리는 그렇게 물었고, 난 잠시 무어라 대답할까 고민했다. 아니 그보다… 흠. 술 한잔 더 하자고
할까. 그게 무슨 뜻인지야 뻔하고, 그래 다 떠나서 그녀가 오케이 하고, 술 더 마시다가 뭐 외로운 남
녀가 분위기 타고 어떻게 잘 되었다 치자, 그러면?
바로 같이 일하는 상사와 사내연애라도 할 참인가? 아니, 원나잇으로 끝나더라도 그럼 또 앞으로는
그런거 전혀 의식하고 잘 일할 수 있나? 그보다 지금 나 혼자 심하게 김치국 쳐먹는건 아닌가. 뭐 또
어떻게 어떻게 잘 된다 쳐도, 그 이후 책임질 수 있나? 30대 접어드는 혼기 찬 여자 상사와 러브러브
해서 뭐 어떻게 잘 해볼 생각이라도 있나?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아득해지고 점점 답이 없어졌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난 그냥 물었다.
"다영이 누나, 술 한잔 더 안 할래요?"
웃으며 거절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녀는 의외로 굉장히 솔직하게 "나도 한잔 더 마시고 싶기는
한데, 지금 배가 너무 빵빵하고 가스가 차서 죽겠어" 라며 배를 문질렀다. 어색하게 말했으면 또 모
르겠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길래 감이 안 와서 긴가민가 싶었다.
그래서 거기서 난 용기, 아니 만용을 내었다. 어차피 뭐, 아니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대학 시절에
그토록이나 짝사랑했던 한영이 누나와 3차까지 술을 마셔놓고도 끝내 '쉬러 가자'는 말 한 마디를
못해서 허무하게 돌려보내고 여지껏 후회했던-하지만 덕분에 그 이후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나에게
큰 용기가 된- 기억을 되새김질 했다.
'그래, 어차피 대박 아니면 쪽박이지'
하지만 "술 몇 병 더 사가서, 요 앞에 모텔이라도 가서 더 마실래요?" 라는, 집 나온 고딩들이나 할
법한 폐급 멘트는 겨우 참아내고는 바로 난 물었다.
"오늘 집에 꼭 들어가야 돼요?"
그래,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좀 황당하기도 했으리라 생각한다. 평소 나름대로 동생처럼 귀엽다고는
생각했지만, 남자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나이도 어린 연하의 직장 후배가 같이 외근
한번 나와 술 몇 잔 했다고 같이 자자니, 무슨 미친 망발인가.
'하지만'
세상 일 전부가 결국 운과 타이밍이다. 이유 모르게 적당히 기분도 풀어졌고, 금요일 밤에다가 아주
기분좋게 술도 마셨고 오늘 내일 모든 스케쥴도 텅 비었고 새삼 보니 귀여운 데도 있고 남자다운데
도 있어보이는데다 무엇보다 남자에게 자자는 이야기 들어본 것 자체가 도대체 얼마만인가.
…라는 느낌으로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되물어왔다.
"너 정말 나랑 자도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도대체 무슨 후회라는 것일까, 라는 생각에 일말의 불안감이 들었지만 "그러고 나서도 앞으로 내
얼굴 보며 일 잘할 수 있겠어?" 라는 물음에 원나잇으로 알아서 먼저 선을 그어주는, 과연 연상녀
다운 센스있는 멘트에 난 쿨하게 외쳤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쉽게만 풀리진 않는 법, 무슨 오늘 뭔 날인지 두 군 데나 만실이었고 평소
그렇게나 많던 모텔 방이 어째 이 동네만 없는 것처럼 잘 안 보여 살짝 짜증이 날까말까 한 순간
난 상가 건물에 3층에 입주한 상가형 모텔을 발견했다.
잠시, 그냥 택시 타고 나가서 다른 동네로 갈까 했지만 귀찮기도 하고, 마음 변하기 전 얼른 그냥
자러 들어가자 라는 생각에 난 그녀와 함께 3층으로 향했다. 그저 그런 상가형 모텔 주제에 주말
이라고 7만원을 부르는 소리에 씁쓸했지만 별 수 있는가.
'도대체 내가 뭔 짓을 한거지'
씻으면서 그제서야 뭔가 분위기에 취해서 시덥지 않은 짓을 했다 싶었다. 그래, 진 대리 말대로
앞으로 뭐 어쩔건가.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 정말로 원나잇 일 뿐이다 하고
잊어버리기에는 또 좀 그렇지 않은가. 한번 잤다고 어설프게 지분거리는거야 쓰레기 짓이고.
하지만 일단 그런 고민은 잊기로 했다. 당장 오늘 밤은 간만에, 지지난 달에 '전전여친' 지희랑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을 보낸 이후로 참 오래간만의 거시기 아닌가. 그러고보니 진 대리는 마지
막 연애가 2년 전이라고 했는데, 그럼 섹스는 얼마만일까.
난 잡생각을 계속 주절주절 하는 대신 샤워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씻고 나오고, 곧이어 한참을 TV를 보고 있노라니 그녀도 씻고 나왔다. 뭔가 초현실적인 느낌
이었다. 당장 어제까지만, 아니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존칭까지 써가던 직장 동료와 뭐
이렇게 반쯤 벗고 모텔방에 들어와 씻고 있다니.
어색하지마 또 괜히 더 흥분이 되었다. 혹시라도 부끄러워 할까봐 메인 등을 끄고 TV와 침대 옆에
스탠드만 켰다. 그녀는 욕실에서 나오고도 한참을 물기를 닦아내고 머리를 말리고 하다가 웃으며
내가 "몸 닦다가 날 새겠네. 얼른 누워요" 하고 너스레를 치자 그제서야 픽 웃으며 침대로 조심스레
들어왔다. 향긋한 비누 냄새가 코를 스쳤다. 나의 그것은 불끈했다.
"하아, 으, 여기 휴지요"
"응"
솔직하게 말해서, 적당히 뭐, 그냥 쏘쏘한 섹스였다. 그렇다고 뭐 그녀가 별로였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진 대리도 나도 조금 쑥쓰러움을 타서, 뭐 아주 찰지게 즐긴 섹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
풋풋하고 즐거웠던 섹스였다고나 할까.
혼자 지랄이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가 물었다.
"내일은 뭐할거야?"
그리고 그 대답 여하에 따라서 앞으로 내 일상의 꽤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
지만 난 별 어려움 없이 대답했다.
"별 거 없는데, 같이 영화보지 않을래요?"
"그래, 좋아"
난 진 대리, 아니 다영의 손을 깍지를 껴서 잡았고, 다시 한번 그녀의 귀엽고도 섹시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속으로 나 스스로에게 외쳤다. '야, 이현모, 너 진짜 뭔 생각이냐?'
그리고 대답했다.
'그동안 그 정도면 솔직히 충분히 외로울만큼 외로웠잖아. 이제 됐어. 그리고 이 정도면 좋은 여자
잖아, 그래, 그걸로 좋아'
뭔가 애틋한 설레임이나 대단한 감정은 아니지만, 어차피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머지는
앞으로 더 만들어가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