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씻고 옷 입고 집을 나설 때까지도 자고 있던 혜선은 "갈께" 하고 한 마디 할 때 즈음해서야 겨우
눈만 뜨곤 "응, 잘가" 하고 인사 한 마디를 건낸다,
일전의 정이랑 모텔 갔을 때 가방에 챙겨둔 일회용 면도기가 있었다. 그게 생각나 안 하려던 면도를
하다가 입가를 살짝 베었다. 또 한 방울 피가 배어나온 것 같아 그 상처를 슥 혀로 핥는다. 쓰라림을
느끼며 그녀의 원룸을 나선다.
커튼을 치고 잤던 터라 어두웠을 뿐이지 이미 밖은 10시가 넘어 훤하다. 조금 쌀쌀하기는 해도 해는
화창하니 어디 놀러가기 좋은 날씨다. 하지만 간밤에 술에 떡에 온 몸이 찌뿌둥하다. 둘 다 간만이라
아주 뽕을 뽑을 기세로 했더니 허리까지 살짝 나간 듯 하다. 엉치 있는 데가 지릿지릿하다.
"상도터널 좀 지나서 세워주세요"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한다. 버스를 탈까 했지만 귀찮아서 택시를 잡아탔다. 담배가 땡겼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제 돗대를 혜선이 그 년이랑 나눠 핀 것도 같다. 평소 같으면 금방 가는 거리
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노곤하다. 그냥 더 자다 올 것을
그랬나. 아냐, 그러다 그 기집애 남자친구라도 갑자기 들이닥치면 누구 개피보라고.
일요일 아침의 인적 드문 아파트 외곽 풍경 등 쓸쓸하게 창 밖을 내다보면서 오노라니 잠도 슬슬
깨는 느낌이다. 택시에서 내렸다. 집에 들어가기도 귀찮고 밥이라도 누구랑 같이 먹을까, 하고 생각
하다가 그래서 경선이에게 콜을 때렸다. 아, 얼마 전에 이름 개명했지. 수연이.
그 기집애 스타일상 아직까지 자고 있을게 분명하니 집에 쳐들어갈까 하다가 또 지난 번처럼 다른
남자 새끼랑 같이 뒹굴고 있으면 또 쪽을 팔아야하니 한 10초 고민하다가 전화했다. 안 받으면 걍
집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야지, 하고.
"어 오빠, 왠일?"
"아 심장 떨어지겠네. 뭔 전화를 바로 받아"
내 말에 픽 웃은 그녀는 "게임하고 있었어. 근데 왜?" 하고 다시 물었다.
"왜긴, 밥이나 같이 먹을까 해서"
왜 자꾸 이 기집애랑 말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말이 딱딱하게 나올까. 수연이는 그러나 "나 근데
좀 전에 일어나서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그냥 오빠가 뭐 먹을거 사와서 같이 먹자. 우리 집으로
와" 하고 나를 초대했다. 나쁠 것 없지.
솔직하게 말해서 다시 또 택시에 오르면서 후회했다.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푹 자지 뭐하는 짓
이냐고. 가면 씨발 뭐 밥만 같이 먹고 오나? 피곤한데 떡 치자니 귀찮고, 뭐 사멕이고 그러면 것
도 다 돈인데. 갑자기 귀찮았다. 하지만 이미 씨부려놓은 말이 있으니 뭐 별 수 있나.
"신림 2동 현대 아파트 쪽으로, 아니다, 고시촌 입구쪽으로 가주세요"
"네"
가고 있노라니 수연이에게서 또 카톡이 날아온다.
[ 한솥 도시락 사와. 난 치킨 마요 ]
뭔가 짜증났다.
"방 좀 치워라, 아, 진짜 여자 방이 이게 뭐냐"
"아 몰라. 오빠가 치워주던지"
내 주변 년들이 다 그렇고 그런 년이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째 하나같이 방구석이 어디
돼지우리 같은 꼴이냐.
"여튼 이거나 먹어"
"땡큐"
기껏 사온 도시락을 내밀어도 그녀는 매니큐어를 칠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 건 밥 먹은 년후에 하지. 아 창문 좀 열고"
"오빠가 좀 열어줘. 나 이거 하잖아. 그리고 나 밥 떠먹여주면 안 돼?"
"이게 콱"
"아이, 어?"
"아 진짜. 너 손님들한테도 그러냐?"
"오빤 손님이 아니니까 그러지"
그나저나 찬찬히 그녀의 방을 둘러본다. 침대 위 널부러진 팬티와 브래지어에 방바닥을 쓸어모으면
가발 하나는 족히 만들고도 남겠다 싶은 머리카락에, 온 방에 널부러진 옷가지들과 쓰레기들.
"여, 한 숟갈 먹어라"
혀를 차며 한 숟가락 푹 떠서 내밀자 "어머, 오빠 진짜 나 먹여주는거야? 대박" 하면서 또 수연이가
입을 벌린다. 저 작은 입 속으로 얼마나 많은…됐다.
"근데 진짜 오빠 왠일이야? 맨날 주말에도 바쁘다며"
"가끔은 쉬어야지, 사람이"
더러운 방구석에 어디 편히 앉을 자리도 없어서 무릎을 오므리고 앉아있노라니 불편했다. 몸을 일
으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요새 가게는 어때?"
"똑같지 뭐. 우리야. 오빠는?"
"아, 몰라. 큰 거 받을게 있는데 씨발 개새끼가 아주 너구리도 상너구리야. 아주 시발 빨빨 거리며
어딜 그리 싸돌아다니는지 집에 들어오질 않아. 가끔 와도 언제 들어오는지도 모르게 들락거리고.
강운이 형도 야마 돌아서 이거 진짜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담에 교외로 한번 차몰고 따라가야겠다
고는 하는데, 몰라. 기태 그 씹쌔끼는 맨날 지랄이나 해대지, 아 존나"
문득 치받는 김에 말이 길어지자 그녀는 표정에서 지루함을 지우지 못한 채 얼른 화제를 돌린다.
"그렇구나. 오빠도 힘들겠네. 여튼 먹어 빨리"
나 역시 더이상의 푸념은 관두고 도시락을 받아들었다.
"알았어"
간밤에 두 번이나 했음에도, 간만에 느끼는 수연의 손길에 나는 다시 일어섰고 움직였고 헐떡이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배 위에 그것을 토해냈다.
"오빠 간밤에 딸 쳤구나?"
전문가답게 그 양과 농도를 보고 바로 감을 잡는 수연. 딸이 아니라 섹이지만 굳이 그런 것을 보고
할 필요야 없겠지.
"그럼 아예 어제 오지. 나 어제 술 마시고 싶었는데"
"근데 왠일로 안 마셨냐?"
"아 그냥. 귀찮아서. 나 요새 사실 일도 계속 안 나가고 있어, 귀찮아서"
"아깐 가게 나간다며?"
"일주일 전 이야기고"
"에휴. 야, 저기 내 잠바에서 담배 좀 꺼내줘 봐"
"어디? 왼쪽?"
"몰라"
도시락을 사오며 아까 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수연이와 함께 나란히 침대에 누워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내고 있노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배도 부르고, 땀도 뺐고, 아랫도리도 살짝 욱씬거릴
정도로 할만큼 했고.
"아, 천국이네"
"나랑 있어서?"
너는 그냥 사실, 그냥… 하지만 괜히 구태여 그렇게 말할 필요야 없겠지.
"어, 너랑 이렇게 누워서 담배 한 대 빠니까 이게 천국이네"
"흐"
수연이가 몸을 더 가까이,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다. 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다시 한번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낸다.
"진짜 천국이 따로 없다"
↧
만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