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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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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연(雪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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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그토록 펑펑 내리던 날. 까페 안의 사람들 모두가 금요일 밤의 설레임을 안고 웃고 떠들던 그 때.

나와 혜윤만 마치 다른 장소에 있기라도 한듯 어색하고 우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까페 안에 울려
퍼지던, 빠른 비트로 편곡된 캐롤 음악은 그 아이러니함을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미안해"

나의 말에 혜윤은 애써 할말을 찾는 듯 입술을 떨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난 이미 온기가 가신 머그잔을
들어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우리 둘만의 공간.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저 까페 통유리 너머의 펑펑 내리는 눈만이 이 답답하고 느린 공간에 흐르는 유일한 흐름이었다.

어색하고, 심상찮은 기운에 옆 테이블에서 우리를 보며 소근대는 것이 느껴진다. 병신들. 남의 일에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은지. 하지만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은근히 신경은 쓰인다. 

그보다 여자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해놓고 이렇게 딴데 정신을 팔다니. 나도 참 못된 놈이다.

"일어나자"

대답을 듣는 대신 나는 슬슬 가방과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일어서는 나를 올려다보는 혜윤의 눈가는 이미
젖어있었다. 그녀도 얼른 눈물을 닦고 가방을 챙겼다. 컵과 트레이를 챙기고 먼저 가게 밖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우리 둘의 상황을 유추하던 옆 테이블의 수근거림이 새삼 느껴졌지만 곧 나를 따르는 혜윤의
구두 소리에 지워졌다.



"눈 많이 오네"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혜윤은 우산이 없었다. 난 그녀에게 우산을 살짝 기울이며 함께 우산을 썼다. 말
없이 우리는 그녀의 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냥 바로 집으로 향할 것을 그랬다. 헤어지기로 한 마당에 둘이 찰싹 붙어서 걷다니. 뭔가 어색하고 불편
했다. 혜윤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그녀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호흡이 아니라
한숨이다.

눈발은 점점 짙어졌다. 어느새 온 세상은 새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우산을 조금 낮게 들었다. 우산을
쓰나마나한 상황이지만, 머리카락만이라도 젖지 않았으면 하니까. 그래, 내가 지금 혜윤이를 집에까지
바래다 주는 것은 이별을 하는 상황이지만, 울면서 집까지 혼자 힘들게 걷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코트를 입었지만 너무 춥다. 싸늘한 바람에 몸의 체온이 다 식어가는 기분이다. 목도리에 장갑까지 챙겨
입은 내가 이렇게 추운데… 혜윤이는 패딩을 입긴 했다만 저것도 몇 년 전에 내가 온라인에서 이월상품
으로 싸게 사 준 솜패딩이다. 왜 바보처럼 이렇게 춥게 입고 왔나.

왜 바보처럼 나같은 새끼랑 사귀었나.



한참을 걷노라니 어느새 그녀가 사는 빌라촌이 저만치 보였다. 언제나처럼 문 앞까지, 바래다 줄 수는
없겠지. 이제 저어기 아파트 정문 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면 아마도 우리는 끝이다. 새하얀 눈천지…
차들이 다니는 도로조차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고 차들도 속도를 낮추어 그릉그릉 거리며 기어가고
있다.

다행히 눈발은 조금 무디어졌다.

"민호야"

혜윤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근 15분 만의 첫 대화였다. 아니, 까페에서도 거의 내가 일방적으로 말했
으니 그녀가 입을 연 것은 거의 40분 쯤 되리라.

"왜"

분명 그래도 마지막인데, 자상하게 대답하고 싶었는데 왠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은
움찔하는게 느껴졌지만 혜윤은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듯 대답했다.

"이제 들어가… 추운데 얼른 들어가"

여기까지 같이 와놓고서는.

"저기 정문까지만 바래다줄께"

이번에는 나름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혜윤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얼른 가. 다 왔는데 뭘.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 그러나 그녀는 차마 그 말을 입에서 꺼내려니 목이 메이는지 한숨 넘기
더니 겨우 토해내듯 그 말을 꺼냈다.

"그동안 즐거웠어"

그래. 그게 무슨 어려운 말이라고.

"나도 즐거웠어"

사실 함께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오늘까지. 그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니
좋은 기억이 많았다.

"정말 즐거웠어"

난 가볍게 그녀를 안았다. 헤어지는 마당에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보고 싶었다. 괜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러자 혜윤도 나를 꼭 안았다. 힘을 주어서. 그리고 기어코 울음보를 터뜨렸다. 서운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정말로 헤어지게 되다니.

우산을 거두고, 조금 잦아든 눈발을 맞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하얗게 질려버린
그녀의 차가운 얼굴이 눈물과 함께 조금 따뜻해지는 것을 가슴으로 느꼈다. 그리고 우린 다시 떨어졌다.

"잘 들어가"
"응… 잘가"

눈물에 젖어버린 혜윤의 얼굴은, 참으로 처연하면서도 예뻤다. 가슴이 조금 쓰렸다. 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온,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힌 눈길을 홀로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혜윤이 나를
울며 바라보고 있음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르는 척 했다.

다시 세차게 내리기 시작하는 눈발이, 우리 둘의 발자국을 지워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제서야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렸다. 우산을 꼭 쥐며 참아보았지만 터진 눈물보는 다시 막을 길이 없었다. 시린 발 끝만큼
가슴 한 구석이 아팠다.

눈물방울의 어른거림이, 온 세상을 새하얗고 발그레한 불빛의 흔들거림으로 만들어 날 조롱하기 시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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