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한테도… 말해야겠지? 우리 사귀기로 한거?"
서윤의 말에 난 잠시 뜸을 들이다 "그래야겠지" 하고 조금 자신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말 꺼낼 생각을
하니 당혹스러움이 앞섰다. 뭐 딱히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말을 못할 이유도 없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좀 그렇다보니 좀 거시기했다.
"너가 말하기 좀 뭐하면, 내가 말할께"
서윤의 말에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할께. 아무래도 니가 말하는게 더 어렵겠다"
"좋아"
서윤은 빙긋 웃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미소였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여자들 사이의 경쟁에서 승리한
쪽이 짓는 묘한…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악녀의 미소' 뭐 그런 느낌이라 조금 기분이 묘했다.
아니, 기분이 좋았다.
"이쪽은 서윤이야. 여기는 박스"
연희의 소개로 우리는 첫 만남을 가졌다. 이미 서로가, 그동안 연희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덕분에
별로 어색할 것도 없이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장서윤이에요"
"김박스입니다"
그녀는 처음 인사를 나누자마자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글 잘쓰신다면서요? 맨날 연희가 얼마나 칭찬하는 줄 몰라요"
"저요? 아휴, 아니에요. 글은 무슨…"
"몇 개 봤는데 정말 잘 쓰시던데요? 저 글 잘 쓰는 남자 완전 호감인데"
서윤은 첫 인상부터 정말 좋았다. 도도한 인상의 미녀가 뜻밖에도 먼저 나보고 호감이라는데 어느 남자가
싫어하겠느냔 말이다.
연희와 함께 까페 안으로 걸어들어올 때, 그 세련된 스타일에 나도 모르게 그만 '듣던 거보다 꽤 도도하게
생겼네' 하고 움츠러 들었지만, 그 기분좋은 빈 말스러운 한 마디부터 이야기를 나눠갈수록 정말 털털한
성격이 매력적이었다.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연희와 함께 나란히 앉으니 너무 시선이 한쪽으로 고정되어 일부러 시선을 연희쪽
으로 종종 신경을 써서 돌아봐야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서윤의 외모는 압도적인 면이 있었다. 연희가 좀
박색하기도 했지만.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다음에 또 봐요"
"네 그래요, 또 봐요"
"박스야 잘 들어가"
"어, 너두"
함께 저녁을 먹고, 연희가 즐겨찾는 인사동의 전통 찻집에서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지막으로
근처 호프로 자리를 옮겨 맥주 한잔 걸치다가 거의 12시가 다 되어서야 헤어졌다. 그게 우리의 첫 만
남이었다. 솔직히 난 이미 그때 서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혼자 설레이기도 했다.
'저렇게 예쁜 애가 나한테 호감이 있다니' 하면서 말이다.
오늘 서윤이 이 자리에 나온 것도, 나를 만나고 싶어서 일부러 연희를 졸라서라고 한다. 사실 나도 전
부터 좀 궁금하긴 했다. 한때 아나운서를 준비했을 정도로 예쁘고 말도 잘하고 똑똑한데다가 심지어
성격까지 진짜 털털하고 착하다면서, 정작 농담으로라도 "야 그럼 걔도 한번 데리고 나와. 보고싶다"
하고 말하면 또 은근슬쩍 얼버무리면서 이야기를 전환하는 연희의 모습에 그냥 '실물은 별론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왠걸. 저렇게 끝내주는 퀸카가 바로 한다리 건너에 있었다니.
게다가 우리는 뭔가 대화 파장이 잘 맞았다.
연희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은근히 애가 좀 고집도 있고, 뭔가 좀 답답하고 고루한 데가 있어서 이야길
하다가도 적당히 속으로 '음, 일단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서윤과는
전혀 그런게 없었다. 너무 이야기가 잘 맞았다.
중간에 연희가 "너네 진짜 잘 통한다. 좀 샘나게" 하고 웃으며 어색하게 이야기를 끊을 정도로 말이다.
생각해보니 연희 생일 축하해주려고 만난 자리인데 무슨 소개팅 자리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렸으니 좀
연희가 서운하기도 했겠지. 얼른 우린 대화의 중심으로 연희로 가져갔다. 그것마저도 호흡이 척척 맞
았다.
둘과 헤어지고 왠지 모르게 설레이는 마음으로 집을 향해 가고 있노라니 카톡으로 메세지가 날아왔다.
[ 다음 주에 시간되세요? ]
서윤이었다. 아까 연희가 잠깐 화장실 갔을 때 우리는 몰래 카톡 주소를 주고받았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이미 우리는 그때부터 왠지 연희의 눈치를 본 셈이다.
우리는 정말 급속도로 친해졌다. 두번째 만남 때부터는 말을 놓았다.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뭐 흔한 데이트 코스였지만 꽤나 즐거웠다. 스킨십도 빨랐다. 헤어질 무렵에 같이 걷다 은근슬쩍 손이
닿았고, 곧 손가락 끝이 가볍게 한번 더 스친 우리는 이내 손을 잡았다.
아니 첫 데이트에 손 잡은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만 여튼 그게 특별하게 생각될 정도로 가슴이 다
두근두근거리고 설레이는 만남이었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그녀는 정말 예뻤다. 세련된 스타일이려니 생각하고 보다가 또 찬찬히 뜯어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고, 또 어떨 때보면 섹시하기도 했다.
막 설레이고 행복한 마음 속에 있다가도 가끔은 '그렇게 예쁜 애가 왜 나를 좋아하지? 날 좋아하는게
맞긴 맞나? 나 혼자 설레발 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그녀는 글 잘 쓰는 남자가 좋다고 했다. 원래 자기 꿈은 소설가라고 했다.
"아나운서가 꿈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 전에 말이야. 고등학교 때"
그래서 한때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려고 생각하기도 했단다. 바로 그래서 고등학교 때 문학 동아리에서
만난게 연희였고.
대학 2학년 때 첫 연애를 했는데, 처음 사귄 남자도 시인이었다고 한다. 무려 10살이나 연상의. 물론
유명한 시인도 아니었고, 데이트를 해도 어디 진짜 근사한 맛집 한번을 못 가고 데이트 비용도 거의
서윤이 90% 이상 대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이없게 그 남자가 그 주제에 바람까지 피워서 헤어졌지만
어쨌든 글 잘쓰는 남자에 대한 로망스만큼은 여전히 남아있단다.
문득 '그래도 나름 프로 시인하고 사귀었던 애가 내 글 보면 존나 우습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한번 웃긴 글을 몇 개 보여주자 그녀는 완전 좋아하했고, 나는 으쓱했다. 게다가 센스 좋은 그녀는
글 이외에도 틈틈히 내 칭찬을 쏟아놓아 나를 기쁘게 했다.
아침마다 거울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을 정도로 말이다. 서윤은 남자를 들뜨게 하는 타입의 여자였다.
난 조심스레 고백의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세 번째의 데이트를 마치고, 나는 다음 만남 때 고백을
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과 놀다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던 도중 간만에 연희에게서 카톡이 왔다.
[ 박스야, 너 요즘 서윤이랑 연락하니? ]
밑도 끝도 없는 질문. 그러고보면 '우리'는 그동안 연희를 완전히 배제했다. 데이트를 할 때에도 연희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았으며 그냥 그녀라는 존재가 꼭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다
연희가 대뜸 이렇게 묻자 무슨 일인가 싶어 잠깐 고민하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 어, 요새 자주 연락해. 왜? 무슨 일 있어? ]
그 말에 대한 답장은 한참 후에야 도착했다.
[ 그렇구나,, 아니 그냥. 지금 어디야? 신촌쪽이면 잠깐 볼 수 있어? ]
시간이 밤 11시라 조금 늦긴 했지만, 토요일이었던 만큼 못 볼 것도 없었다. 그리고 뭔가 어색한 연희
의 낌새에 나는 알겠노라고 했다.
"어, 왠일이야?"
그녀의 원룸 근처 작은 동네 공원에서 우리는 만났다. 연희는 나를 보고 "너 술 먹었어?" 하고 물었고
나는 "어. 술 냄새 나냐?" 하고 되묻자 그녀는 그냥 고개를 저으며 벤치의 내 옆에 앉았다.
"아니 안나"
나는 구만. 거짓말을 하기 전이면 얼굴이 살짝 굳는 그녀의 묘한 버릇을, 4년 지기 친구인 내가 모를
리가 없지.
"근데 왠일이야, 이 밤중에 나를 다 부르고"
항상 만나려면 3~4일 전에 이미 약속을 꼭 잡는 고지식한 그녀였던 만큼 이렇게 갑작스럽게 날 호출
하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그냥… 간만에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 이유도 조금 뜬금없었다.
"요즘 외롭냐?"
날씨가 스산해져서 그런가 싶어 물었다. 그녀는 픽 웃으며 "넌?" 하고 되물었다. 나야 전혀 안 외롭지.
서윤이가 있는데. 하지만 그냥 대충 대꾸를 맞춰주었다.
"뭐 그냥 그렇지. 항상"
연희는 다시 무어라 할 말을 찾는 듯 한참을 꾸물거리다 내가 "아 뭐야, 너 무슨 할 말 있어?" 하고 또
캐묻자 그제서야 겨우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너 요즘 서윤이 만나?"
흐음…
"어. 몇 번 만났지? 왜?"
나의 말에 연희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지만 실망한 눈빛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허허.
재미나게 돌아가네.
"너 서윤이 좋아해?"
흐음.
"왜? 니가 그걸 왜 물어?"
연희는 나의 되물음에 뻘쭘해하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냥… 둘이 요새 만나나해서"
과연 여자의 감은 무섭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곧 연희는 "아까 서윤이랑 통화하다가, 서윤이가 요즘
관심있어하는 남자가 생겼다길래 캐물었는데…말은 안 해줬는데 그게 왠지 너 같더라구" 하고 털어
놓았다. 나는 그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연희는 혼자 읆조리듯 말했다.
"서윤이 예쁘지. 센스있고, 똑똑하고… 애교 많고"
하지만 항상 연희 그녀가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여자" 라면서 절대 빠뜨리지 않던 '착함'에 대해서는
이번에는 말하지 않았다.
"남자들한테도 인기 많아. 걔 고등학교 때도 인기 많았어. 우리 여고 옆에 남학교 킹카하고도 사귀
었고, 대학교 1학년 때도 미팅 나가면 걔는 항상 인기 톱이었어"
흐음. 분명히 서윤이는 대학교 2학년 때 사귄 시인이 첫 연애라고 했는데. 둘이 말이 다르네. 어느
쪽이 맞는 말이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난 잠자코 듣기만 했다.
"나… 사실 너네 둘이랑 같이 만났던 날, 좀 서운했어"
음, 그건 미안하군.
"내 생일인데, 너네 둘이 무슨 소개팅 시켜준 거 같은 자리가 되어버려서, 소외받은 기분이었어. 그냥
왠지 좀 그래서 싫었어"
"미안하다. 그냥 죽이 잘 맞아서 떠들다가… 여튼 미안해"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괜히…"
아 근데 이게 무슨 분위기여. 한참을 말이 없던 연희는 한숨을 쉬듯 겨우 속내를 털어놓았다.
"박스야, 나 너…좋아했…다?"
본인도 겨우 털어놓은 듯한 말. 이거 뭐야. 뭐라고 대답해야 되지. 남자가 여자한테 이런 표현을 사용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여튼 난 너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음…"
게다가 요즘처럼 서윤이 같은 퀸카랑 잘 되어가는 판에… 솔직히…
"그래 나도 알아. 서윤이같은 애랑 잘 되어가는데, 내가 이러는거 너도 우습고 당황스럽겠지. 너도
내가… 하아…"
연희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한숨을 다시 토해냈다. 가슴이 아픈지 가슴을 한 손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나도… 이러는거 되게 웃긴거 아는데… 그냥, 너네 둘이 안 사귀었으면 좋겠어"
뭐라고 말을 해줘야되지.
"이런거 되게 유치하고 웃긴거 아는데… 그냥 너가 떠나버리는 기분이야"
"음…연희야"
난 어렵게 운을 뗐다.
"너 나 좋아해? 아니면 가장 친한 두 친구가 사귀는게 뭔가 싫고 뺏기는 느낌 들고 그런거야?"
꼭 이런 말로 잔인하게 구분을 지어야하나 싶기도 했고, 솔직한 답변이 나오기는 할까 궁금했지만 난
알고 싶었다. 그래야 뭐라도 말이라도 하지.
"모르겠어. 나 너 좋아하나? 나도 모르게 너 좋아했나?"
혼자 바보처럼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면서 난 좀 허탈함을 느꼈다.
"내가 바보같아 보이지…알아. 미안해. 이러는거 되게 유치하지. 아냐, 미안해. 내가 이상한 소리해서.
둘이 잘 되면 좋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지 말아"
난 그녀를 안아주었다. 친구로서. 아주 솔직히 말해서 연희를 여자라고 생각을 해본 적도 분명 있다.
사귀면 어떨까, 하고. 물론 초장부터 남녀보다는 친구처럼 된 사이라서 불꽃이 파파팍 튄 적은 없지만
그래도 알아온 시간이 있는데 그런 감정이 단 한번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우린 분명히 느꼈다.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친구로선 그런 부분을 적당히 스킵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연인으로서는 그런 부분이 꽤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아니, 연희가 정확히 나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는 이제와서는 꼭 저렇다고 장담하기는 어렵게
됐지만, 여튼 그랬다. 내가 느끼기로는.
"미안해"
난 그 한 마디로 연희의 고백, 아니, 질투인지 뭔지 모를 그 알 수 없는 감정에 대해 사과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연희는 내 품에서 떨어지며 눈가를 닦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오늘 미쳤나 봐. 너한테 디게 추한 모습 보였지. 미안. 근데 나 원래 그래"
"아냐"
뒤에 무어라 더 위로를 붙이고 싶었지만, 그게 더 연희를 비참하게 만들 것 같아서 그냥 거기까지만
말했다.
"나 그럼 들어가볼께"
"어 내가 괜히 여기까지 불러서 미안. 잘 들어가"
"이 시간에 택시 타면 할증 붙는데, 나 하루 재워주면 안되냐?'
"꺼져"
난 적당히 농담으로 눈가에 눈물이 괴괴한 그녀의 감정을 추스리게 도왔다. 연희는 눈물을 닦고는
"미안해 정말. 내가 오늘 너무 추했지" 하고 웃어보였다.
'너 똥꼬에 털난다' 라는 말을 할까 하다가 그냥 참았다. 그보다, 방금 전의 그 눈물 어린 미소는 내
가 본 그녀의 모습 중에 제일 예뻤다.
"나 갈께"
"잘가'
며칠 뒤, 나는 서윤이와의 데이트를 마치고 그녀를 바래다 주는 길에 고백을 했다. 물론 서윤이는
당연히 내 고백에 OK하며 "왜 이렇게 늦었어. 내가 그렇게 싸인을 줬는데!" 하고 너스레까지 떨었다.
"적당히 끄는 맛도 있어야지" 하고 웃으며 받은 나에게 서윤이는 입술을 내주었다. 사실은 먼저 연희
이야기를 꺼낼까 했지만 그 이야기는 그 다음 데이트에서야 겨우 꺼냈다. 연희가 나한테 고백을 했었
다는 말에 서윤은 "어, 연희가 너 좋아하는건 나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 하고 대답했다.
"그랬어?"
그랬나. 연희가 나 좋아했나.
"근데 나도 너 좋더라고"
난 픽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그냥. 너가 나 좋아한다니까"
"어. 너랑 있으면 뭔가 좋았어. 파장이 잘 통하는 거 같아서"
"나도 그랬어"
그러다 서윤은 머리카락을 꼬으며 말했다.
"연희한테도… 말해야겠지? 우리 사귀기로 한거?"
서윤의 말에 난 잠시 뜸을 들이다 "그래야겠지" 하고 조금 자신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말 꺼낼 생각을
하니 당혹스러움이 앞섰다. 뭐 딱히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말을 못할 이유도 없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좀 그렇다보니 좀 거시기했다.
"너가 말하기 좀 뭐하면, 내가 말할께"
서윤의 말에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할께. 아무래도 니가 말하는게 더 어렵겠다"
"좋아"
서윤은 빙긋 웃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미소였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여자들 사이의 경쟁에서 승리한
쪽이 짓는 묘한…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악녀의 미소' 뭐 그런 느낌이라 조금 기분이 묘했다.
아니, 기분이 좋았다.
"이쪽은 서윤이야. 여기는 박스"
연희의 소개로 우리는 첫 만남을 가졌다. 이미 서로가, 그동안 연희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덕분에
별로 어색할 것도 없이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장서윤이에요"
"김박스입니다"
그녀는 처음 인사를 나누자마자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글 잘쓰신다면서요? 맨날 연희가 얼마나 칭찬하는 줄 몰라요"
"저요? 아휴, 아니에요. 글은 무슨…"
"몇 개 봤는데 정말 잘 쓰시던데요? 저 글 잘 쓰는 남자 완전 호감인데"
서윤은 첫 인상부터 정말 좋았다. 도도한 인상의 미녀가 뜻밖에도 먼저 나보고 호감이라는데 어느 남자가
싫어하겠느냔 말이다.
연희와 함께 까페 안으로 걸어들어올 때, 그 세련된 스타일에 나도 모르게 그만 '듣던 거보다 꽤 도도하게
생겼네' 하고 움츠러 들었지만, 그 기분좋은 빈 말스러운 한 마디부터 이야기를 나눠갈수록 정말 털털한
성격이 매력적이었다.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연희와 함께 나란히 앉으니 너무 시선이 한쪽으로 고정되어 일부러 시선을 연희쪽
으로 종종 신경을 써서 돌아봐야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서윤의 외모는 압도적인 면이 있었다. 연희가 좀
박색하기도 했지만.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다음에 또 봐요"
"네 그래요, 또 봐요"
"박스야 잘 들어가"
"어, 너두"
함께 저녁을 먹고, 연희가 즐겨찾는 인사동의 전통 찻집에서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지막으로
근처 호프로 자리를 옮겨 맥주 한잔 걸치다가 거의 12시가 다 되어서야 헤어졌다. 그게 우리의 첫 만
남이었다. 솔직히 난 이미 그때 서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혼자 설레이기도 했다.
'저렇게 예쁜 애가 나한테 호감이 있다니' 하면서 말이다.
오늘 서윤이 이 자리에 나온 것도, 나를 만나고 싶어서 일부러 연희를 졸라서라고 한다. 사실 나도 전
부터 좀 궁금하긴 했다. 한때 아나운서를 준비했을 정도로 예쁘고 말도 잘하고 똑똑한데다가 심지어
성격까지 진짜 털털하고 착하다면서, 정작 농담으로라도 "야 그럼 걔도 한번 데리고 나와. 보고싶다"
하고 말하면 또 은근슬쩍 얼버무리면서 이야기를 전환하는 연희의 모습에 그냥 '실물은 별론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왠걸. 저렇게 끝내주는 퀸카가 바로 한다리 건너에 있었다니.
게다가 우리는 뭔가 대화 파장이 잘 맞았다.
연희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은근히 애가 좀 고집도 있고, 뭔가 좀 답답하고 고루한 데가 있어서 이야길
하다가도 적당히 속으로 '음, 일단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서윤과는
전혀 그런게 없었다. 너무 이야기가 잘 맞았다.
중간에 연희가 "너네 진짜 잘 통한다. 좀 샘나게" 하고 웃으며 어색하게 이야기를 끊을 정도로 말이다.
생각해보니 연희 생일 축하해주려고 만난 자리인데 무슨 소개팅 자리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렸으니 좀
연희가 서운하기도 했겠지. 얼른 우린 대화의 중심으로 연희로 가져갔다. 그것마저도 호흡이 척척 맞
았다.
둘과 헤어지고 왠지 모르게 설레이는 마음으로 집을 향해 가고 있노라니 카톡으로 메세지가 날아왔다.
[ 다음 주에 시간되세요? ]
서윤이었다. 아까 연희가 잠깐 화장실 갔을 때 우리는 몰래 카톡 주소를 주고받았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이미 우리는 그때부터 왠지 연희의 눈치를 본 셈이다.
우리는 정말 급속도로 친해졌다. 두번째 만남 때부터는 말을 놓았다.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뭐 흔한 데이트 코스였지만 꽤나 즐거웠다. 스킨십도 빨랐다. 헤어질 무렵에 같이 걷다 은근슬쩍 손이
닿았고, 곧 손가락 끝이 가볍게 한번 더 스친 우리는 이내 손을 잡았다.
아니 첫 데이트에 손 잡은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만 여튼 그게 특별하게 생각될 정도로 가슴이 다
두근두근거리고 설레이는 만남이었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그녀는 정말 예뻤다. 세련된 스타일이려니 생각하고 보다가 또 찬찬히 뜯어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고, 또 어떨 때보면 섹시하기도 했다.
막 설레이고 행복한 마음 속에 있다가도 가끔은 '그렇게 예쁜 애가 왜 나를 좋아하지? 날 좋아하는게
맞긴 맞나? 나 혼자 설레발 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그녀는 글 잘 쓰는 남자가 좋다고 했다. 원래 자기 꿈은 소설가라고 했다.
"아나운서가 꿈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 전에 말이야. 고등학교 때"
그래서 한때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려고 생각하기도 했단다. 바로 그래서 고등학교 때 문학 동아리에서
만난게 연희였고.
대학 2학년 때 첫 연애를 했는데, 처음 사귄 남자도 시인이었다고 한다. 무려 10살이나 연상의. 물론
유명한 시인도 아니었고, 데이트를 해도 어디 진짜 근사한 맛집 한번을 못 가고 데이트 비용도 거의
서윤이 90% 이상 대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이없게 그 남자가 그 주제에 바람까지 피워서 헤어졌지만
어쨌든 글 잘쓰는 남자에 대한 로망스만큼은 여전히 남아있단다.
문득 '그래도 나름 프로 시인하고 사귀었던 애가 내 글 보면 존나 우습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한번 웃긴 글을 몇 개 보여주자 그녀는 완전 좋아하했고, 나는 으쓱했다. 게다가 센스 좋은 그녀는
글 이외에도 틈틈히 내 칭찬을 쏟아놓아 나를 기쁘게 했다.
아침마다 거울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을 정도로 말이다. 서윤은 남자를 들뜨게 하는 타입의 여자였다.
난 조심스레 고백의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세 번째의 데이트를 마치고, 나는 다음 만남 때 고백을
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과 놀다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던 도중 간만에 연희에게서 카톡이 왔다.
[ 박스야, 너 요즘 서윤이랑 연락하니? ]
밑도 끝도 없는 질문. 그러고보면 '우리'는 그동안 연희를 완전히 배제했다. 데이트를 할 때에도 연희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았으며 그냥 그녀라는 존재가 꼭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다
연희가 대뜸 이렇게 묻자 무슨 일인가 싶어 잠깐 고민하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 어, 요새 자주 연락해. 왜? 무슨 일 있어? ]
그 말에 대한 답장은 한참 후에야 도착했다.
[ 그렇구나,, 아니 그냥. 지금 어디야? 신촌쪽이면 잠깐 볼 수 있어? ]
시간이 밤 11시라 조금 늦긴 했지만, 토요일이었던 만큼 못 볼 것도 없었다. 그리고 뭔가 어색한 연희
의 낌새에 나는 알겠노라고 했다.
"어, 왠일이야?"
그녀의 원룸 근처 작은 동네 공원에서 우리는 만났다. 연희는 나를 보고 "너 술 먹었어?" 하고 물었고
나는 "어. 술 냄새 나냐?" 하고 되묻자 그녀는 그냥 고개를 저으며 벤치의 내 옆에 앉았다.
"아니 안나"
나는 구만. 거짓말을 하기 전이면 얼굴이 살짝 굳는 그녀의 묘한 버릇을, 4년 지기 친구인 내가 모를
리가 없지.
"근데 왠일이야, 이 밤중에 나를 다 부르고"
항상 만나려면 3~4일 전에 이미 약속을 꼭 잡는 고지식한 그녀였던 만큼 이렇게 갑작스럽게 날 호출
하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그냥… 간만에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 이유도 조금 뜬금없었다.
"요즘 외롭냐?"
날씨가 스산해져서 그런가 싶어 물었다. 그녀는 픽 웃으며 "넌?" 하고 되물었다. 나야 전혀 안 외롭지.
서윤이가 있는데. 하지만 그냥 대충 대꾸를 맞춰주었다.
"뭐 그냥 그렇지. 항상"
연희는 다시 무어라 할 말을 찾는 듯 한참을 꾸물거리다 내가 "아 뭐야, 너 무슨 할 말 있어?" 하고 또
캐묻자 그제서야 겨우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너 요즘 서윤이 만나?"
흐음…
"어. 몇 번 만났지? 왜?"
나의 말에 연희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지만 실망한 눈빛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허허.
재미나게 돌아가네.
"너 서윤이 좋아해?"
흐음.
"왜? 니가 그걸 왜 물어?"
연희는 나의 되물음에 뻘쭘해하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냥… 둘이 요새 만나나해서"
과연 여자의 감은 무섭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곧 연희는 "아까 서윤이랑 통화하다가, 서윤이가 요즘
관심있어하는 남자가 생겼다길래 캐물었는데…말은 안 해줬는데 그게 왠지 너 같더라구" 하고 털어
놓았다. 나는 그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연희는 혼자 읆조리듯 말했다.
"서윤이 예쁘지. 센스있고, 똑똑하고… 애교 많고"
하지만 항상 연희 그녀가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여자" 라면서 절대 빠뜨리지 않던 '착함'에 대해서는
이번에는 말하지 않았다.
"남자들한테도 인기 많아. 걔 고등학교 때도 인기 많았어. 우리 여고 옆에 남학교 킹카하고도 사귀
었고, 대학교 1학년 때도 미팅 나가면 걔는 항상 인기 톱이었어"
흐음. 분명히 서윤이는 대학교 2학년 때 사귄 시인이 첫 연애라고 했는데. 둘이 말이 다르네. 어느
쪽이 맞는 말이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난 잠자코 듣기만 했다.
"나… 사실 너네 둘이랑 같이 만났던 날, 좀 서운했어"
음, 그건 미안하군.
"내 생일인데, 너네 둘이 무슨 소개팅 시켜준 거 같은 자리가 되어버려서, 소외받은 기분이었어. 그냥
왠지 좀 그래서 싫었어"
"미안하다. 그냥 죽이 잘 맞아서 떠들다가… 여튼 미안해"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괜히…"
아 근데 이게 무슨 분위기여. 한참을 말이 없던 연희는 한숨을 쉬듯 겨우 속내를 털어놓았다.
"박스야, 나 너…좋아했…다?"
본인도 겨우 털어놓은 듯한 말. 이거 뭐야. 뭐라고 대답해야 되지. 남자가 여자한테 이런 표현을 사용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여튼 난 너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음…"
게다가 요즘처럼 서윤이 같은 퀸카랑 잘 되어가는 판에… 솔직히…
"그래 나도 알아. 서윤이같은 애랑 잘 되어가는데, 내가 이러는거 너도 우습고 당황스럽겠지. 너도
내가… 하아…"
연희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한숨을 다시 토해냈다. 가슴이 아픈지 가슴을 한 손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나도… 이러는거 되게 웃긴거 아는데… 그냥, 너네 둘이 안 사귀었으면 좋겠어"
뭐라고 말을 해줘야되지.
"이런거 되게 유치하고 웃긴거 아는데… 그냥 너가 떠나버리는 기분이야"
"음…연희야"
난 어렵게 운을 뗐다.
"너 나 좋아해? 아니면 가장 친한 두 친구가 사귀는게 뭔가 싫고 뺏기는 느낌 들고 그런거야?"
꼭 이런 말로 잔인하게 구분을 지어야하나 싶기도 했고, 솔직한 답변이 나오기는 할까 궁금했지만 난
알고 싶었다. 그래야 뭐라도 말이라도 하지.
"모르겠어. 나 너 좋아하나? 나도 모르게 너 좋아했나?"
혼자 바보처럼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면서 난 좀 허탈함을 느꼈다.
"내가 바보같아 보이지…알아. 미안해. 이러는거 되게 유치하지. 아냐, 미안해. 내가 이상한 소리해서.
둘이 잘 되면 좋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지 말아"
난 그녀를 안아주었다. 친구로서. 아주 솔직히 말해서 연희를 여자라고 생각을 해본 적도 분명 있다.
사귀면 어떨까, 하고. 물론 초장부터 남녀보다는 친구처럼 된 사이라서 불꽃이 파파팍 튄 적은 없지만
그래도 알아온 시간이 있는데 그런 감정이 단 한번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우린 분명히 느꼈다.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친구로선 그런 부분을 적당히 스킵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연인으로서는 그런 부분이 꽤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아니, 연희가 정확히 나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는 이제와서는 꼭 저렇다고 장담하기는 어렵게
됐지만, 여튼 그랬다. 내가 느끼기로는.
"미안해"
난 그 한 마디로 연희의 고백, 아니, 질투인지 뭔지 모를 그 알 수 없는 감정에 대해 사과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연희는 내 품에서 떨어지며 눈가를 닦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오늘 미쳤나 봐. 너한테 디게 추한 모습 보였지. 미안. 근데 나 원래 그래"
"아냐"
뒤에 무어라 더 위로를 붙이고 싶었지만, 그게 더 연희를 비참하게 만들 것 같아서 그냥 거기까지만
말했다.
"나 그럼 들어가볼께"
"어 내가 괜히 여기까지 불러서 미안. 잘 들어가"
"이 시간에 택시 타면 할증 붙는데, 나 하루 재워주면 안되냐?'
"꺼져"
난 적당히 농담으로 눈가에 눈물이 괴괴한 그녀의 감정을 추스리게 도왔다. 연희는 눈물을 닦고는
"미안해 정말. 내가 오늘 너무 추했지" 하고 웃어보였다.
'너 똥꼬에 털난다' 라는 말을 할까 하다가 그냥 참았다. 그보다, 방금 전의 그 눈물 어린 미소는 내
가 본 그녀의 모습 중에 제일 예뻤다.
"나 갈께"
"잘가'
며칠 뒤, 나는 서윤이와의 데이트를 마치고 그녀를 바래다 주는 길에 고백을 했다. 물론 서윤이는
당연히 내 고백에 OK하며 "왜 이렇게 늦었어. 내가 그렇게 싸인을 줬는데!" 하고 너스레까지 떨었다.
"적당히 끄는 맛도 있어야지" 하고 웃으며 받은 나에게 서윤이는 입술을 내주었다. 사실은 먼저 연희
이야기를 꺼낼까 했지만 그 이야기는 그 다음 데이트에서야 겨우 꺼냈다. 연희가 나한테 고백을 했었
다는 말에 서윤은 "어, 연희가 너 좋아하는건 나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 하고 대답했다.
"그랬어?"
그랬나. 연희가 나 좋아했나.
"근데 나도 너 좋더라고"
난 픽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그냥. 너가 나 좋아한다니까"
"어. 너랑 있으면 뭔가 좋았어. 파장이 잘 통하는 거 같아서"
"나도 그랬어"
그러다 서윤은 머리카락을 꼬으며 말했다.
"연희한테도… 말해야겠지? 우리 사귀기로 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