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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박스와 전자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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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이제 이것 좀 버려요"

아내는 오늘도 또 전자렌지를 버리자고 성화다. 하지만 박스는 고개를 젓는다.

"어휴 아직도 쓸만하고 멀쩡한데 이걸 왜 버려"
"멀쩡하긴 뭐가 멀쩡해요. 자꾸 음식을 태워먹는데. 아 이러다가 언제 불 한번 크게나지 싶어 걱정
된다니까. 얼마 안 하는거 그냥 버리고 말지"

하지만 박스는 이번에도 지그시 고개를 젓는다. 아내는 그저 한숨을 쉬고 이내 포기해 버린다. 몰래
버려도 펄펄 뛰며 그것을 다시 주워오는 통에 버릴 수도 없다.

하지만 박스가 그 전자렌지에 집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야기는 10년 전, 2012년의 어느 여름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소 그의 삶에 멘토가 되어준 고시원 옆 방 선배와의 여름밤.

더워서 도무지 방에 있지를 못하겠는 통에, 옥상에서 둘은 쥐포에 소주를 뜯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스야,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니"
"글쎄요…너무 어려운 주제라"

하지만 선배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인생은 고시원 전자렌지 같은거다"
"그게, 무슨 말이죠?"

선배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들 전자렌지에 이것저것, 모두 다른 것을 해먹지. 하지만 또 그리 다르지도 않아. 조금 더 있는 놈은
피자 데워먹고, 우리 같은 새끼들은 뭐, 그냥 어제 먹다 남은 김치찌개나 데워먹지. 얼핏 생각하면 그
피자가 부러워도, 사실 그래봐야 다들 그저 먹다 남은거, 아니면 레토르트 데워먹는 것 뿐이야. 인생
이라는건, 다른 거 같아도 별 반 다를 거 없어. 다 거기서 거기라 이야기야"

박스는 잘 이해가 안 갔지만 잠자코 앉아있었고, 선배는 이윽고 지그시 저 아래를 내려다 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비록 우리가 이런 월 15만원짜리 고시원에서 지내지만, 저어기 있는 아파트 사는 부자들이랑도 별반
다를 거 없어. 우리도 가끔은 피자 시켜먹는 것처럼, 언젠가 우리도 저런 아파트에 살지도 몰라"

그 말 그대로, 선배는 그 다음 해에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나와는 다른 출세의 길을 걸어나갔다. 나는
끝끝내 고시에 실패하고 포기, 결국 흔한 샐러리맨이 되었지만 첫 월급으로 전자렌지를 사서 선배의
가르침, 그 선배가 준 삶에 대한 용기를 아직도 가슴에 기리고 있다.

아내는 오늘도 낡은 전자렌지에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김치찌개를 데우며 툴툴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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