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당한 태도가 너무 어이없어서 였을까. 태훈의 입에서 그 말을 들은 나는 순간적으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태훈은 그 말로도 부족했는지 그 더러운 입으로 더러운 말들을
쏟아내었다.
"니랑 잘 때보다 좋더라"
그제서야 내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진작 주문을 했더라면 음료라도 얼굴에 확 끼얹고 나오련만
사람이 많아 조금 있다가 주문하기로 한게 후회되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때인가?
머리가 정말로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띵하고 멍하다. 예전에 엄마가 진수 아저씨한테 사기 당했을
때 순간적으로 눈이 안 보인다고 했었는데 지금 나도 그 엄마의 그 딸인지 시야가 다 흐리다.
"뭐 개새끼라고 욕해도 좋아. 여튼 그러니까 나한테 미련 남기지 마라. 난 너한테 이제 애정 전혀 없어"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가운데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저 개새끼한테 뭘 해꼬지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소리라도 지르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이라도 줄까.
"…개새끼야"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목구멍이 어디 붙어버리기라도 했는지 가늘게 새어나온, 아주 무력한
욕 한 마디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왜 여자들이 그런 상황에서 시원하게 쌍욕이라도 한 바
가지 뿌려주지 못하고 그렇게 바보처럼 징징대는지 알 수 있었다. 죽도록 체력장 오래 달리기라도
하고 온 것 마냥 전신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발가락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어졌다.
"니가 어쩜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그리고 이어서 나온 말도 겨우 그 한 마디. 태훈은 그 말에 "참 씨발" 하고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여자들은 어디서 그런 말 배우냐? 참, 아 씨발 어떻게 다들 그러니?"
하아. 만약 지금 내 손에 어디 칼이라도 들려있었다면 나는 분명 그 자리에서 태훈을 찔러 죽이고 사정
없이 난도질을 해놓았겠지만, 그저 나는 너무나도 큰 짜증과 화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그저 쥐어짜는
목소리로 한 마디를 할 뿐이었다.
"너, 너어, 진짜 벌 받을거야, 내가 저주할거야"
그리고 더이상 있다가는 내가 먼저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까지 후들거리는
것이 도저히 몇 분 이상 서있을 힘이 없었다. 머리는 터질 것처럼 어지럽게 빙빙 돌고 눈 앞의 모든 것이
뿌옇고 흔들렸다. 다리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후들거렸고 어깨와 팔은 천근만근, 눈물은 아직껏
나오지 않았지만, 눈물이 터져 나오는 순간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서둘러 큰 길가로 향했다.
바로 온 택시를 잡아타고 문을 닫는 순간, 그리고 기사 아저씨에게 "서초동 롯데캐슬이요" 하고 말하고
차가 출발하는 그 순간 그제서야 겨우 참았던 눈물이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크흡…그…"
아랫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그 비통한 울음은 집요하리만치 밖으로 터져나왔고,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만큼 큰 눈물의 폭풍우가 쏟아져 내렸다. 가슴이 너무나 아프고 무거웠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고 답답했다. 누가 막 송곳으로 마구 미친듯이 가슴을 난도질하는 느낌이었다.
'개새끼'
처음부터 위험하다고는 생각했다. 내 친구 수연이에게 관심을 더 갖다가 수연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나한테 대시하던 그 남자가 결코 좋게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 진심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열심히 대시하던 모습이, 그게 귀여워서 그렇게 받아준건데.
'엄마…'
친구들도, 엄마도 다 말렸다. 별로 인상이 안 좋다고. 하지만 언젠가 태훈이 했던 말, 스스로도 인상이
좋지 않아서 너무 고민이고 가끔은 속상한 일도 많다는 그 말. 그래서 지금부터는 잘 관리하고 많이
웃어서 좋은 인상으로 바꾸겠다는 그 말. 그게 너무 찡하기도 하고, 또 엄마한테 태훈의 인상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기에 너무 미안한 마음도 컸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엄마의 말이 맞았다.
"사람이, 인물 값하는거야. 착하게 생긴 애들도 못된 짓 하긴 하지만, 진짜로 못되게 생긴 애들은 꼭
못된 짓을 하는거라고"
너무나 편견 어린 말이기에 기가 차서 웃음이 다 나왔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그 새끼가 미웠다.
'내가 지한테 어떻게 했는데…'
아직 직장이 없는 태훈 때문에 데이트 비용도 대부분도 내가 다 냈고, 친구들, 엄마 앞에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 싫어서 옷이고 뭐고 다 내가 선물도 했는데.
'그게 부담이 됐던 걸까'
작년 태훈의 생일 날, 근사한 블레이저와 넥타이를 같이 선물한 날, 그가 부담스러워 했던 기억이
났다. 선물을 해줬지만 말만 고맙다고 했을 뿐 표정이 썩 밝지 않았던 그. 그래서 혹시 마음에 들지
않았냐고 하니까 어렵사리 털어놓은 그 부담스럽다는 말.
도대체 남자들은 왜 그런 걸까. 정말로 내가 남자가 아직 경제력이 부족하고 그래서 싫었다면 아예
만나지도 않았을 거라는 것을 왜 모를까. 순수히 좋아서 해 준 선물이 왜 부담스러운지.
…여기까지가 그나마 좋은 기억이라면 그 다음은 지옥이다.
아는 동생들과의 술자리는 왜 그리도 잦은건지. 몇 번인가 같이 만난 적도 있지만 그 끝없이 피워대는
태훈과 친구들의 담배연기는 곤혹스러울 정도였고 매번 그 붉은 조명의 호프집은, 내내 불편했다.
무엇보다 왜 꼭 오빠 오빠하면서 적극적으로 남자들 틈에 낀 민주인가 하던 그 애가 묘하게 거슬렸다.
태훈은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만 했지만 언젠가 그의 집에 놀러갔을 때 같이 찍은 사진을 통해 둘이
한 때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헤어진 사람이랑 계속 연락을 해?"
"그냥 전부터 알던 사이인데 잠깐 사귀었다가 다시 친구로 남은거야.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하지만 언젠가 그 둘이 단 둘이서만 밤 늦게까지 술 마신 것을 나는 안다. 한번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안다. 그리고 두어 달 전 쯤, 나는 태훈의 곁에 새 여자(?)가 생긴 것도 알았다. 자기
전 전화통화를 나누고 잠들기 직전, 그가 잘못 보낸 문자 한 통으로.
그리고 그 문제로 싸웠을 때 처음으로 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그저 부정의 한 마디,
사과의 한 마디를 듣고 싶었던 건데 헤어지자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그리고 그 헤어지자는
말이 부정에 대한 인정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그때도 한번 지금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그때 헤어졌어야 하는건데.
그 며칠 후 뒤늦게 사과를 비는 태훈의 말, 그리고 끝까지 '니가 생각하는 그런 만남은 아니었어.
그냥 잠깐, 너무 힘들어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잠깐 곁에 있어준거고, 나는 나대로 뒤늦게 그걸
니가 내가 바람을 피운거라고 오해한게, 그것조차도 미안해서 그냥 결과적으로 내 책임이다, 하는
마음에 그랬던거야. 정말이야. 니가 생각하는 그런 더러운 일 같은건 없었어' 하는 말에, 상처
입은 자존심을 그렇게라도 회복하고 싶어서 그 말을 믿어준건데.
아니, 그래도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은 분명 아니었다. 나는 그 이후로 태훈을 예전처럼 정말로 아무
스스럼없이 대하기 어려웠고, 또 그때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다 미워
보이기 시작했다.
밥 먹을 때 쩝쩝 소리내는 거, 머리 정리도 깔끔하게 못하는거, 맘에 드는 옷 하나 생기면 맨날 그
옷만 입는 거, 말할 때 조금만 흥분해도 쓸데없이 큰 소리로 말하는거, 잘 모르는 것도 지 멋대로
우기다가 아니라고 밝혀져도 끝까지 고집부리는거…
정말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더 괜히 심술도 부리고 그랬지만, 엊그제, 처음
태훈이 대시하던 시절에 보낸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별 내용도 아니었지만 그 중간에
[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너 친구들이 다 반 농담이긴 했지만 나 별로라고 했을 때 그래도 니가 내
편이 되어줘서 그게 나는 너무 고마웠고, 또 너가 참 매력적이더라 ]
하는 내용을 보고 그냥 괜히 울컥해서, 그래서 다 용서해주려고 오늘 만난건데…
너무 오래 생각을 해서일까. 더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아, 화장도 다 번지고 퉁퉁 부은 눈으로
겨우 창 밖을 내다보았을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그 사람 없는 오피스 빌딩촌의 싸늘한 풍경이,
나는 그렇게 을씨년스럽고 차가워보였던 적이 없다.
꼭 내 마음을 투영해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태훈은 그 말로도 부족했는지 그 더러운 입으로 더러운 말들을
쏟아내었다.
"니랑 잘 때보다 좋더라"
그제서야 내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진작 주문을 했더라면 음료라도 얼굴에 확 끼얹고 나오련만
사람이 많아 조금 있다가 주문하기로 한게 후회되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때인가?
머리가 정말로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띵하고 멍하다. 예전에 엄마가 진수 아저씨한테 사기 당했을
때 순간적으로 눈이 안 보인다고 했었는데 지금 나도 그 엄마의 그 딸인지 시야가 다 흐리다.
"뭐 개새끼라고 욕해도 좋아. 여튼 그러니까 나한테 미련 남기지 마라. 난 너한테 이제 애정 전혀 없어"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가운데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저 개새끼한테 뭘 해꼬지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소리라도 지르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이라도 줄까.
"…개새끼야"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목구멍이 어디 붙어버리기라도 했는지 가늘게 새어나온, 아주 무력한
욕 한 마디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왜 여자들이 그런 상황에서 시원하게 쌍욕이라도 한 바
가지 뿌려주지 못하고 그렇게 바보처럼 징징대는지 알 수 있었다. 죽도록 체력장 오래 달리기라도
하고 온 것 마냥 전신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발가락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어졌다.
"니가 어쩜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그리고 이어서 나온 말도 겨우 그 한 마디. 태훈은 그 말에 "참 씨발" 하고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여자들은 어디서 그런 말 배우냐? 참, 아 씨발 어떻게 다들 그러니?"
하아. 만약 지금 내 손에 어디 칼이라도 들려있었다면 나는 분명 그 자리에서 태훈을 찔러 죽이고 사정
없이 난도질을 해놓았겠지만, 그저 나는 너무나도 큰 짜증과 화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그저 쥐어짜는
목소리로 한 마디를 할 뿐이었다.
"너, 너어, 진짜 벌 받을거야, 내가 저주할거야"
그리고 더이상 있다가는 내가 먼저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까지 후들거리는
것이 도저히 몇 분 이상 서있을 힘이 없었다. 머리는 터질 것처럼 어지럽게 빙빙 돌고 눈 앞의 모든 것이
뿌옇고 흔들렸다. 다리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후들거렸고 어깨와 팔은 천근만근, 눈물은 아직껏
나오지 않았지만, 눈물이 터져 나오는 순간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서둘러 큰 길가로 향했다.
바로 온 택시를 잡아타고 문을 닫는 순간, 그리고 기사 아저씨에게 "서초동 롯데캐슬이요" 하고 말하고
차가 출발하는 그 순간 그제서야 겨우 참았던 눈물이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크흡…그…"
아랫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그 비통한 울음은 집요하리만치 밖으로 터져나왔고,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만큼 큰 눈물의 폭풍우가 쏟아져 내렸다. 가슴이 너무나 아프고 무거웠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고 답답했다. 누가 막 송곳으로 마구 미친듯이 가슴을 난도질하는 느낌이었다.
'개새끼'
처음부터 위험하다고는 생각했다. 내 친구 수연이에게 관심을 더 갖다가 수연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나한테 대시하던 그 남자가 결코 좋게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 진심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열심히 대시하던 모습이, 그게 귀여워서 그렇게 받아준건데.
'엄마…'
친구들도, 엄마도 다 말렸다. 별로 인상이 안 좋다고. 하지만 언젠가 태훈이 했던 말, 스스로도 인상이
좋지 않아서 너무 고민이고 가끔은 속상한 일도 많다는 그 말. 그래서 지금부터는 잘 관리하고 많이
웃어서 좋은 인상으로 바꾸겠다는 그 말. 그게 너무 찡하기도 하고, 또 엄마한테 태훈의 인상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기에 너무 미안한 마음도 컸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엄마의 말이 맞았다.
"사람이, 인물 값하는거야. 착하게 생긴 애들도 못된 짓 하긴 하지만, 진짜로 못되게 생긴 애들은 꼭
못된 짓을 하는거라고"
너무나 편견 어린 말이기에 기가 차서 웃음이 다 나왔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그 새끼가 미웠다.
'내가 지한테 어떻게 했는데…'
아직 직장이 없는 태훈 때문에 데이트 비용도 대부분도 내가 다 냈고, 친구들, 엄마 앞에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 싫어서 옷이고 뭐고 다 내가 선물도 했는데.
'그게 부담이 됐던 걸까'
작년 태훈의 생일 날, 근사한 블레이저와 넥타이를 같이 선물한 날, 그가 부담스러워 했던 기억이
났다. 선물을 해줬지만 말만 고맙다고 했을 뿐 표정이 썩 밝지 않았던 그. 그래서 혹시 마음에 들지
않았냐고 하니까 어렵사리 털어놓은 그 부담스럽다는 말.
도대체 남자들은 왜 그런 걸까. 정말로 내가 남자가 아직 경제력이 부족하고 그래서 싫었다면 아예
만나지도 않았을 거라는 것을 왜 모를까. 순수히 좋아서 해 준 선물이 왜 부담스러운지.
…여기까지가 그나마 좋은 기억이라면 그 다음은 지옥이다.
아는 동생들과의 술자리는 왜 그리도 잦은건지. 몇 번인가 같이 만난 적도 있지만 그 끝없이 피워대는
태훈과 친구들의 담배연기는 곤혹스러울 정도였고 매번 그 붉은 조명의 호프집은, 내내 불편했다.
무엇보다 왜 꼭 오빠 오빠하면서 적극적으로 남자들 틈에 낀 민주인가 하던 그 애가 묘하게 거슬렸다.
태훈은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만 했지만 언젠가 그의 집에 놀러갔을 때 같이 찍은 사진을 통해 둘이
한 때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헤어진 사람이랑 계속 연락을 해?"
"그냥 전부터 알던 사이인데 잠깐 사귀었다가 다시 친구로 남은거야.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하지만 언젠가 그 둘이 단 둘이서만 밤 늦게까지 술 마신 것을 나는 안다. 한번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안다. 그리고 두어 달 전 쯤, 나는 태훈의 곁에 새 여자(?)가 생긴 것도 알았다. 자기
전 전화통화를 나누고 잠들기 직전, 그가 잘못 보낸 문자 한 통으로.
그리고 그 문제로 싸웠을 때 처음으로 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그저 부정의 한 마디,
사과의 한 마디를 듣고 싶었던 건데 헤어지자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그리고 그 헤어지자는
말이 부정에 대한 인정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그때도 한번 지금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그때 헤어졌어야 하는건데.
그 며칠 후 뒤늦게 사과를 비는 태훈의 말, 그리고 끝까지 '니가 생각하는 그런 만남은 아니었어.
그냥 잠깐, 너무 힘들어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잠깐 곁에 있어준거고, 나는 나대로 뒤늦게 그걸
니가 내가 바람을 피운거라고 오해한게, 그것조차도 미안해서 그냥 결과적으로 내 책임이다, 하는
마음에 그랬던거야. 정말이야. 니가 생각하는 그런 더러운 일 같은건 없었어' 하는 말에, 상처
입은 자존심을 그렇게라도 회복하고 싶어서 그 말을 믿어준건데.
아니, 그래도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은 분명 아니었다. 나는 그 이후로 태훈을 예전처럼 정말로 아무
스스럼없이 대하기 어려웠고, 또 그때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다 미워
보이기 시작했다.
밥 먹을 때 쩝쩝 소리내는 거, 머리 정리도 깔끔하게 못하는거, 맘에 드는 옷 하나 생기면 맨날 그
옷만 입는 거, 말할 때 조금만 흥분해도 쓸데없이 큰 소리로 말하는거, 잘 모르는 것도 지 멋대로
우기다가 아니라고 밝혀져도 끝까지 고집부리는거…
정말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더 괜히 심술도 부리고 그랬지만, 엊그제, 처음
태훈이 대시하던 시절에 보낸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별 내용도 아니었지만 그 중간에
[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너 친구들이 다 반 농담이긴 했지만 나 별로라고 했을 때 그래도 니가 내
편이 되어줘서 그게 나는 너무 고마웠고, 또 너가 참 매력적이더라 ]
하는 내용을 보고 그냥 괜히 울컥해서, 그래서 다 용서해주려고 오늘 만난건데…
너무 오래 생각을 해서일까. 더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아, 화장도 다 번지고 퉁퉁 부은 눈으로
겨우 창 밖을 내다보았을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그 사람 없는 오피스 빌딩촌의 싸늘한 풍경이,
나는 그렇게 을씨년스럽고 차가워보였던 적이 없다.
꼭 내 마음을 투영해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