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뚱녀 블루스 .1 ]
[ 뚱녀 블루스 .2 ] 에 이어서
'아…'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웠다. 세훈의 작업실은 말이 작업실이지 그냥 세훈이
혼자 사는 작은 임대 아파트의 자취방이었다. 낡고 오래된 건물에, 남자 혼자 사는 집 특유의 퀴퀴한
냄새까지.
"집이 좀 그렇지? 앞으로 열심히 해서 좋은 곳으로 옮기자구"
세훈은 멋쩍었는지 먼저 선수를 쳐서 그런 말을 했다. 보은은 어쨌든 하기로 한 일, 열심히 하기로
했다.
문하생 일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작업량도 많았고, 톤 작업이 많은 세훈의 스타일은 그녀를 매우
지치게 했다. 가끔은 하루종일 톤 작업만 하다 끝나는 날도 있었다. 또 평소엔 허허롭지만 막상 작업에
들어가면 까칠해지는 세훈에게 싫은 소리도 들어가며, 점점 보은은 의욕을 잃어갔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한달째. 솔직히 말해서 뭘 배운 것 같지도 않다. 앉아서 하루종일 톤 가루 마셔가며 멍하니 하루종일
톤만 깎다오니, 가끔은 세훈의 집을 나서면서 머리가 다 띵한 날마저 있었다. 게다가 딱히 뭘 크게 배
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가끔 싫은 소리도 듣고, 돈도 아침 9시부터 일해서 저녁 8시까지 일하는데 꼴랑
한달에 60만원을 받았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그거보다는 더 받고, 솔직히 그 시간에 회지라도 그려서
내면 그 돈이 더 될 거 같았다.
'못하겠어…'
그리고 마침 그때 지연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그러자 지연은 픽 웃으면서 말했다.
"야, 난 너 서울에서 죽은 줄 알았다. 하도 연락이 없어서. 뭐하고 지내?"
보은은 지연의 목소리를 듣자 무척 반가웠다. 왠지 눈물마저 나올 것 같았다. 너무 지치고 힘들던 차에
누군가 전화를 걸어주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뭐하구 지냈어?"
"박세훈 선생님 밑에서 어시하고 있어. 맨날 톤 깎고…"
"오 아직도 만화 계속 하고 있는거야?'
고기를 뒤집으며 지연은 물었다. 사실 지연 그녀도 만화는 계속 그리고 있었다. 전문대이다보니 동아리
활동이 널널한 4년제 대학 동아리에 비해서는 그리 활성화 되있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화 동아리
는 달랐다. 만화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또 실력 있는 선배들도 있어서 어찌보면 고등학교 때보다
더 알차고 내실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지연이 너는? 넌 이제 만화 안 그려?"
"아니, 나도 그리고 있어. 동아리 활동하고 있어. 보여줄까?"
지연은 가방에서 연습장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보은은 솔직히 많이 놀랬다. 불과 몇 달이다. 고교
졸업 이후 제대로 못 본 그 사이, 보은의 실력은 엄청나게 발전해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본인이 더
테크닉 면에서 낫다고 아슬아슬하게 자부할 수 있는 정도지만, 사실 누가봐도 어느 한쪽이 더 확실하게
낫다, 라고 평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지연의 실력은 발전해 있었다.
"나 좀 많이 늘었지?"
보은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지연은 조금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물었다. 보은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지연은 그에 자신감을 얻은 듯 말했다.
"동아리 선배 중에 강산하 문하생 하던 선배가 있거든. 자기 이번에 데뷔 준비한다는데 그러면서도
후배들 그림 많이 봐주고 있어. 나도 많이 배웠어"
그리고 보은은 그 말에 한없는 부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뭔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지연은 전문대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대학교도 다니고 있고, 대학 선배에게 착실하게 그림도 배워서 이제는 자신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나…"
지연은 조금 쑥쓰러운 듯 말을 망설하다가 말했다. 그 말은 보은이 조금 전 '선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아니길' 하길 바랬던-도대체 왜 자신이 그런 감정을 갖는지는 몰랐지만- 그 이야기였다.
"나 그 선배한테 어제 고백 받았어"
…보은은 허탈했다. 자신은 솔직히 그림 하나, 만화 하나를 위해서 올인했다. 대학도 안 갔고, 취업도
안 하고 집도 그리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만화 학원에 다니고 지금은 아주 형편없는 대우 받으면서
도움도 안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둘도 없는 단짝 지연은? 학교, 그림, 그리고 남자까지
왜 나랑은 이렇게 다른 삶을 걷는 것일까. 솔직히 둘 다 외모는 피차 일반인데.
생각해보면 그랬다. 지연은 자신과는 달리 주변에 친구도 많고, 성격도 활달했고 공부도 잘했다. 둘다
70kg을 훌쩍 넘는 외모 탓에 남자들에게는 인기가 없었지만 바로 그랬기에 보은은 그나마 그녀를
'친구'로서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연은 이제 자신에게 없는 모든 것을 갖기 시작했다. 지독한
열등감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와 축하해, 대박!"
속으로는 너무나 씁쓸했지만 보은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지연을 축하해주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고기조차, 그 날만큼은 별로 맛이 없었다.
그 날로부터 딱 한달이 더 지나고, 보은은 결국 박세훈의 밑에서 문화생 생활을 하는 것을 관두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작업실 청소 문제로 세훈이 한 '실언' 때문이었지만 솔직히 그보다는 지연을 보고
자극받은게 더 컸다. 더이상 이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좀 청소 좀 해라? 어? 어휴, 어떻게 문하생이 그런게 없니. 막 싹싹하고 그런 맛은 없더라도 그런
눈치는 있어야지. 몸이 둔하다고 눈치까지 둔하면 되니? 자꾸 움직여야 돼 몸을"
…아니 다시 생각해봐도 열 받는 말이다. 여튼 문하생 생활도 접었건만, 만화 학원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솔직히 만화 학원에서 별로 배운 것은 없었다. 물론 배울 것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지만
학원비와 서울에서의 생활비를 감안하면 그 정도를 들여가면서 배울 정도의 효율이 있던 것은 아니
었다.
결국 그녀는 밤에는 편의점 알바, 낮에는 만화를 꾸준히 그리면서 인터넷 카페 등에 연재를 하곤했다.
그리고 비로소 그녀는 다시 안정감을 찾았다. 드라마 까페에서 주인공들을 소재로 한 팬픽 만화 등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사실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무언가 막연한 미래를 위해 그렇게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었다. 댓글을 확인하며 그녀는 큰 기쁨을 얻곤 했다. 이 드라마가 끝나면 또 다른 드라마
를 보면서 그리고, 그렇게 한가로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솔직히 좋았다. 6시간 정도 자고 오후 1시쯤 되어 느즈막히 일어나, 미드 좀 보고 만화나 좀 그리다가
인터넷 커뮤니티 돌면서 웃긴 거나 좀 보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출근 시간이 됐다. 어차피 가서도 심야
새벽 시간대이다보니 술 담배 손님 정도를 제외하면 그리 손님이 많지도 않았다. 남는 시간엔 틈틈히
만화도 그리고… 밤 근무이다 보니 12시 땡치고 유통기한 지나 폐기해야 하는 삼각김밥으로 식비도
줄일 수 있으니 좋았다. 다만 딱 한 가지…
"이 년아, 니 만화니 뭐니 헛지랄 그만하고 이제 집으로 내려와라. 니 으데 그래서 시집이나 가겠나?"
가끔 전화로 복장 뒤집는 엄마의 성화. 그것만 빼면 다 좋았다. 지연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하기사
서울 온 이후부터 이미 연락이 뜸해지긴 했지만, 지연이 연애를 하게 되면서 더욱 멀어졌다. 몇 번인가
보긴 했지만 날이 갈수록 예뻐지고-여전히 몸은 그대로였지만- 남친 자랑을 은근히 하는 그 모습이
정말 꼴 뵈기 싫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보은은 지연의 대학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졸업했다는 사실 자체를 한참 후에야 알았다. 지연의 취업 소식조차 그녀의 싸이에서
처음 알았다. 간간히 메신저에서 별 의미없는 생존안부를 묻곤 했지만, 보은이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또 3년이 더 흘렀다. 3년간 바뀐 것이라고는, 70대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던 보은의 몸무게가
80대를 결국 돌파했다는 사실, 그 하나 뿐이었다. 아마도 편의점 인스턴트 식품으로 최소 거의 매일
한 끼는 때우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마음을 달랬지만…더 큰 이유는 '운동부족'이라는 사실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보은아…"
어느 새벽녘의 전화였다. 일하던 도중, 잠이 꾸벅 들던 찰나에 오래간만에 지연에게서 걸려온 전화.
그리고 그 내용은 역시나 지연의 실연이었다. 지연이 끝끝내 다이어트에 실패한 것과는 달리 그 남친은
결국 만화를 관두고 취업을 한 이후로 일이 힘들어서인지 아니면 다이어트가 정말 성공해서인지 살을
많이 뺐고 그 이후로 매번 싸우다가, 결국 어느 날 지연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했단다.
"나… 죽고 싶어"
지연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보은조차 불끈할 정도로, 그 남친은 심한 막말을 많이 했다고 했다. 자기도
한때 만만찮은 체구였던 주제에 살 좀 뺏다고 지연에게 뚱뚱하다며 온갖 구박을 그리도 했다니, 한편
으로는 씁쓸하면서도 보은은 역시 남자를 만나지 않은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연아, 지금 서울 올래?"
"지금? 새벽 3신데?"
"아니면 내일이라두. 술 사줄께"
"보은아… 고마워…나 사실… 아니야, 여튼 고마워 보은아…"
지연은 보은의 말에 울음을 터뜨렸고, 전화기 너머로 한참 우는 소리를 듣던 보은도 결국 눈물을 터뜨
렸다.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막연히 멀어졌던 둘 사이의 마음이 장벽은, 그렇게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회사까지 관두고 서울로 올라온 지연은 그 자리에서 보은과 함께 의기투합, 만화로 성공
하기로 맹세하고 둘은 만화에 매진했다. 둘이 함께 한 동거생활은 정말 너무나 즐거웠다. 지연이 회사
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 500만원으로 작업 환경도 새 컴퓨터와 새 타블렛까지 바꿨다. 남는 돈은 아껴
쓰기로 했지만 대부분 야식 값으로 나갔다. 그래도 둘 다 야간 편의점 알바로 생활비 정도는 벌었으니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는 되었다.
"아우 피곤하다"
"너네 사장님 진짜 장난 아니다. 어쩜 그래? CCTV로 감시하지, 남는 삼각김밥도 못 가져가게 하지"
"아 몰랑, 나 걍 마트로 옮길까? 사람 뽑던데"
"근데 거기는 일이 힘들잖아"
보은, 지연 모두 밤에는 편의점 일, 낮에는 만화를 계속 했지만 결국 체력이 약하고 원래부터 잠도
많은 지연은 결국 두어달 만에 편의점 일을 못하겠다고 했고, 보은은 낙담했지만 지연에게는 나름의
비책이 있었다.
"우리, 만화… 회지로 내자"
"회지? 코믹에?"
"웅"
그녀의 제안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간간히 참가했던, 아마추어 만화 행사에 참가해서 책을 팔자는
것이었다. 사이드쪽 큰 부스에 자리 잡고 일정 부수 이상만 팔면 분명 수익이 날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맨날 의미없는 편의점 알바나 하는 것보다는 돈도 벌고 좀 더 생산적인 일 아니
냐는 지연의 주장에 보은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은에겐 이미 드라마 팬까페에서 만든 자신의 열렬한 팬들도 있었고, 지연과 함께 정말 3주간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완성해 낸 회지의 퀄리티는 수준 이상이었다.
"와, 이제는 힘들다 힘들어"
"우리 완전 대박 났어"
인기 드라마 '옷보다 남자'와 '하이든 바이러스'의 패러디 회지는 지연의 욕심대로 800부를 찍었
는데도 불과 4시간만에 완판 되었다. 행사장에 늦게 도착해서 결국 못 산 팬까페의 회원들은 아쉬워
발을 동동 굴렀다. 인쇄비를 제하고도 200만원이 넘는 이익이 났다. 그녀들의 몇 달치 편의점 알바비
였다.
자금 사정이 확실히 나아졌다. 보은의 편의점 알바비로 생활비를 대고, 한 두달에 한번씩 만화 행사에
참가해서 회지를 팔면서 남는 이익은 또 재투자도 하고…물론 그렇다고 해봐야 다람쥐 쳇바퀴 식으로,
딱히 적금을 한다거나 할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또 둘의 만만찮은 식비도 문제였다.
"아 왜 이렇게 배는 부른데 입이 심심하지?"
"나두"
둘의 몸무게는 이제 각각 80, 90kg 대에 진입했다. 이제는 어디 둘이 다니기라도 하면 길가의 사람들이
못 볼 것 본 듯이 행동했다. 특히 나이든 할아버지들은 최소한의 예의나 개념조차 없이 막말을 대놓고
해댔고, 고딩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은은 애써 모른 척 무시했지만, 지연은 그때마다 티는 안 내도
속이 상하는 눈치긴 했다. 뭐가 그렇게 새삼스러울까 싶을 정도로. 아니 그보다 보은은 그쯤해서 또
은근히 짜증나는 점이 있었다.
보은 자신은 밤에 여전히 편의점 일을 나갔지만, 지연은 아니었다. 그대신 요리나 청소, 빨래는 지연이
담당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꼭 다 매일매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 여기 컴퓨터부터 회지
내는 초기 자금 같은 것도 전부 지연이 대긴 했지만 어쨌거나 자기만 2배로 고생하는 느낌이라 싫었다.
그래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솔직히 두려웠다.
그 얼마 전부터 했던 생각이다. 그래도 지연이 있어서 미래에 대한 걱정없이, 좋아하는 만화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분명히… 어찌보면 평범하게, 그냥 평범하게 잘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지연
이를 물들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무엇보다 그 문하생 시절처럼, 세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버려진
기분만 느끼며 살아가게 되진 않을까, 그게 두려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전화를 받으며 벽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밤10시가 넘었다.
뭐야, 2시간도 넘게 옛날 생각하고 있던거야? 어쨌든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지연의 전화였다.
"지연아, 나 아까 말한거"
"보은아"
가라앉아 갈라진 목소리. 보은은 지연의 그런 목소리를 듣자마자 왈칵 자기가 더 눈물이 나왔다. 그냥 그
레이버 웹툰, 연재한다고 할걸. 왜 안 한다고 해서…
"지연아 미안해. 내가… 내일 담당자한테 다시 말해서, 내가…"
그러자 전화기 저 편에서 지연이 잠시 머뭇거리며, 간신히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그녀도 대답했다.
"보은아…괜찮…구, 그리고 지금 너 말하는거 다 알겠어. 근데 그보다…"
지연의 말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지만 보은은 "어 말해, 뭐든지 말해" 하면서 전화기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연 역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입을 열었다.
"후라이드… 사갈까, 양념 사갈까…"
…처음에 듣고서는 한 3초를 무슨 소리인가 머리가 멍해져서 대답을 못했던 보은이었지만, 곧 그녀는
눈가에 흐르는 눈물까지 다 떨굴만큼 크게 웃었다. 그리고 전화기 저 편 지연 역시 빵 터져서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정말 얼마만에 이렇게 웃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둘은 크게 웃었다.
한참을 크게 웃은 보은은 후련한 마음으로 눈물을 닦고 대답했다.
"반반으로, 사와"
"어 알았어"
전화를 끊고, 보은은 마음 먹었다. 지연이 들어오면, 꼭 끌어안아주리라. 내 가장 소중한 친구, 지연아…
사랑해.
~ 完 ~
[ 뚱녀 블루스 .2 ] 에 이어서
'아…'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웠다. 세훈의 작업실은 말이 작업실이지 그냥 세훈이
혼자 사는 작은 임대 아파트의 자취방이었다. 낡고 오래된 건물에, 남자 혼자 사는 집 특유의 퀴퀴한
냄새까지.
"집이 좀 그렇지? 앞으로 열심히 해서 좋은 곳으로 옮기자구"
세훈은 멋쩍었는지 먼저 선수를 쳐서 그런 말을 했다. 보은은 어쨌든 하기로 한 일, 열심히 하기로
했다.
문하생 일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작업량도 많았고, 톤 작업이 많은 세훈의 스타일은 그녀를 매우
지치게 했다. 가끔은 하루종일 톤 작업만 하다 끝나는 날도 있었다. 또 평소엔 허허롭지만 막상 작업에
들어가면 까칠해지는 세훈에게 싫은 소리도 들어가며, 점점 보은은 의욕을 잃어갔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한달째. 솔직히 말해서 뭘 배운 것 같지도 않다. 앉아서 하루종일 톤 가루 마셔가며 멍하니 하루종일
톤만 깎다오니, 가끔은 세훈의 집을 나서면서 머리가 다 띵한 날마저 있었다. 게다가 딱히 뭘 크게 배
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가끔 싫은 소리도 듣고, 돈도 아침 9시부터 일해서 저녁 8시까지 일하는데 꼴랑
한달에 60만원을 받았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그거보다는 더 받고, 솔직히 그 시간에 회지라도 그려서
내면 그 돈이 더 될 거 같았다.
'못하겠어…'
그리고 마침 그때 지연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그러자 지연은 픽 웃으면서 말했다.
"야, 난 너 서울에서 죽은 줄 알았다. 하도 연락이 없어서. 뭐하고 지내?"
보은은 지연의 목소리를 듣자 무척 반가웠다. 왠지 눈물마저 나올 것 같았다. 너무 지치고 힘들던 차에
누군가 전화를 걸어주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뭐하구 지냈어?"
"박세훈 선생님 밑에서 어시하고 있어. 맨날 톤 깎고…"
"오 아직도 만화 계속 하고 있는거야?'
고기를 뒤집으며 지연은 물었다. 사실 지연 그녀도 만화는 계속 그리고 있었다. 전문대이다보니 동아리
활동이 널널한 4년제 대학 동아리에 비해서는 그리 활성화 되있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화 동아리
는 달랐다. 만화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또 실력 있는 선배들도 있어서 어찌보면 고등학교 때보다
더 알차고 내실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지연이 너는? 넌 이제 만화 안 그려?"
"아니, 나도 그리고 있어. 동아리 활동하고 있어. 보여줄까?"
지연은 가방에서 연습장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보은은 솔직히 많이 놀랬다. 불과 몇 달이다. 고교
졸업 이후 제대로 못 본 그 사이, 보은의 실력은 엄청나게 발전해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본인이 더
테크닉 면에서 낫다고 아슬아슬하게 자부할 수 있는 정도지만, 사실 누가봐도 어느 한쪽이 더 확실하게
낫다, 라고 평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지연의 실력은 발전해 있었다.
"나 좀 많이 늘었지?"
보은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지연은 조금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물었다. 보은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지연은 그에 자신감을 얻은 듯 말했다.
"동아리 선배 중에 강산하 문하생 하던 선배가 있거든. 자기 이번에 데뷔 준비한다는데 그러면서도
후배들 그림 많이 봐주고 있어. 나도 많이 배웠어"
그리고 보은은 그 말에 한없는 부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뭔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지연은 전문대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대학교도 다니고 있고, 대학 선배에게 착실하게 그림도 배워서 이제는 자신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나…"
지연은 조금 쑥쓰러운 듯 말을 망설하다가 말했다. 그 말은 보은이 조금 전 '선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아니길' 하길 바랬던-도대체 왜 자신이 그런 감정을 갖는지는 몰랐지만- 그 이야기였다.
"나 그 선배한테 어제 고백 받았어"
…보은은 허탈했다. 자신은 솔직히 그림 하나, 만화 하나를 위해서 올인했다. 대학도 안 갔고, 취업도
안 하고 집도 그리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만화 학원에 다니고 지금은 아주 형편없는 대우 받으면서
도움도 안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둘도 없는 단짝 지연은? 학교, 그림, 그리고 남자까지
왜 나랑은 이렇게 다른 삶을 걷는 것일까. 솔직히 둘 다 외모는 피차 일반인데.
생각해보면 그랬다. 지연은 자신과는 달리 주변에 친구도 많고, 성격도 활달했고 공부도 잘했다. 둘다
70kg을 훌쩍 넘는 외모 탓에 남자들에게는 인기가 없었지만 바로 그랬기에 보은은 그나마 그녀를
'친구'로서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연은 이제 자신에게 없는 모든 것을 갖기 시작했다. 지독한
열등감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와 축하해, 대박!"
속으로는 너무나 씁쓸했지만 보은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지연을 축하해주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고기조차, 그 날만큼은 별로 맛이 없었다.
그 날로부터 딱 한달이 더 지나고, 보은은 결국 박세훈의 밑에서 문화생 생활을 하는 것을 관두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작업실 청소 문제로 세훈이 한 '실언' 때문이었지만 솔직히 그보다는 지연을 보고
자극받은게 더 컸다. 더이상 이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좀 청소 좀 해라? 어? 어휴, 어떻게 문하생이 그런게 없니. 막 싹싹하고 그런 맛은 없더라도 그런
눈치는 있어야지. 몸이 둔하다고 눈치까지 둔하면 되니? 자꾸 움직여야 돼 몸을"
…아니 다시 생각해봐도 열 받는 말이다. 여튼 문하생 생활도 접었건만, 만화 학원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솔직히 만화 학원에서 별로 배운 것은 없었다. 물론 배울 것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지만
학원비와 서울에서의 생활비를 감안하면 그 정도를 들여가면서 배울 정도의 효율이 있던 것은 아니
었다.
결국 그녀는 밤에는 편의점 알바, 낮에는 만화를 꾸준히 그리면서 인터넷 카페 등에 연재를 하곤했다.
그리고 비로소 그녀는 다시 안정감을 찾았다. 드라마 까페에서 주인공들을 소재로 한 팬픽 만화 등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사실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무언가 막연한 미래를 위해 그렇게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었다. 댓글을 확인하며 그녀는 큰 기쁨을 얻곤 했다. 이 드라마가 끝나면 또 다른 드라마
를 보면서 그리고, 그렇게 한가로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솔직히 좋았다. 6시간 정도 자고 오후 1시쯤 되어 느즈막히 일어나, 미드 좀 보고 만화나 좀 그리다가
인터넷 커뮤니티 돌면서 웃긴 거나 좀 보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출근 시간이 됐다. 어차피 가서도 심야
새벽 시간대이다보니 술 담배 손님 정도를 제외하면 그리 손님이 많지도 않았다. 남는 시간엔 틈틈히
만화도 그리고… 밤 근무이다 보니 12시 땡치고 유통기한 지나 폐기해야 하는 삼각김밥으로 식비도
줄일 수 있으니 좋았다. 다만 딱 한 가지…
"이 년아, 니 만화니 뭐니 헛지랄 그만하고 이제 집으로 내려와라. 니 으데 그래서 시집이나 가겠나?"
가끔 전화로 복장 뒤집는 엄마의 성화. 그것만 빼면 다 좋았다. 지연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하기사
서울 온 이후부터 이미 연락이 뜸해지긴 했지만, 지연이 연애를 하게 되면서 더욱 멀어졌다. 몇 번인가
보긴 했지만 날이 갈수록 예뻐지고-여전히 몸은 그대로였지만- 남친 자랑을 은근히 하는 그 모습이
정말 꼴 뵈기 싫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보은은 지연의 대학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졸업했다는 사실 자체를 한참 후에야 알았다. 지연의 취업 소식조차 그녀의 싸이에서
처음 알았다. 간간히 메신저에서 별 의미없는 생존안부를 묻곤 했지만, 보은이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또 3년이 더 흘렀다. 3년간 바뀐 것이라고는, 70대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던 보은의 몸무게가
80대를 결국 돌파했다는 사실, 그 하나 뿐이었다. 아마도 편의점 인스턴트 식품으로 최소 거의 매일
한 끼는 때우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마음을 달랬지만…더 큰 이유는 '운동부족'이라는 사실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보은아…"
어느 새벽녘의 전화였다. 일하던 도중, 잠이 꾸벅 들던 찰나에 오래간만에 지연에게서 걸려온 전화.
그리고 그 내용은 역시나 지연의 실연이었다. 지연이 끝끝내 다이어트에 실패한 것과는 달리 그 남친은
결국 만화를 관두고 취업을 한 이후로 일이 힘들어서인지 아니면 다이어트가 정말 성공해서인지 살을
많이 뺐고 그 이후로 매번 싸우다가, 결국 어느 날 지연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했단다.
"나… 죽고 싶어"
지연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보은조차 불끈할 정도로, 그 남친은 심한 막말을 많이 했다고 했다. 자기도
한때 만만찮은 체구였던 주제에 살 좀 뺏다고 지연에게 뚱뚱하다며 온갖 구박을 그리도 했다니, 한편
으로는 씁쓸하면서도 보은은 역시 남자를 만나지 않은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연아, 지금 서울 올래?"
"지금? 새벽 3신데?"
"아니면 내일이라두. 술 사줄께"
"보은아… 고마워…나 사실… 아니야, 여튼 고마워 보은아…"
지연은 보은의 말에 울음을 터뜨렸고, 전화기 너머로 한참 우는 소리를 듣던 보은도 결국 눈물을 터뜨
렸다.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막연히 멀어졌던 둘 사이의 마음이 장벽은, 그렇게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회사까지 관두고 서울로 올라온 지연은 그 자리에서 보은과 함께 의기투합, 만화로 성공
하기로 맹세하고 둘은 만화에 매진했다. 둘이 함께 한 동거생활은 정말 너무나 즐거웠다. 지연이 회사
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 500만원으로 작업 환경도 새 컴퓨터와 새 타블렛까지 바꿨다. 남는 돈은 아껴
쓰기로 했지만 대부분 야식 값으로 나갔다. 그래도 둘 다 야간 편의점 알바로 생활비 정도는 벌었으니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는 되었다.
"아우 피곤하다"
"너네 사장님 진짜 장난 아니다. 어쩜 그래? CCTV로 감시하지, 남는 삼각김밥도 못 가져가게 하지"
"아 몰랑, 나 걍 마트로 옮길까? 사람 뽑던데"
"근데 거기는 일이 힘들잖아"
보은, 지연 모두 밤에는 편의점 일, 낮에는 만화를 계속 했지만 결국 체력이 약하고 원래부터 잠도
많은 지연은 결국 두어달 만에 편의점 일을 못하겠다고 했고, 보은은 낙담했지만 지연에게는 나름의
비책이 있었다.
"우리, 만화… 회지로 내자"
"회지? 코믹에?"
"웅"
그녀의 제안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간간히 참가했던, 아마추어 만화 행사에 참가해서 책을 팔자는
것이었다. 사이드쪽 큰 부스에 자리 잡고 일정 부수 이상만 팔면 분명 수익이 날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맨날 의미없는 편의점 알바나 하는 것보다는 돈도 벌고 좀 더 생산적인 일 아니
냐는 지연의 주장에 보은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은에겐 이미 드라마 팬까페에서 만든 자신의 열렬한 팬들도 있었고, 지연과 함께 정말 3주간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완성해 낸 회지의 퀄리티는 수준 이상이었다.
"와, 이제는 힘들다 힘들어"
"우리 완전 대박 났어"
인기 드라마 '옷보다 남자'와 '하이든 바이러스'의 패러디 회지는 지연의 욕심대로 800부를 찍었
는데도 불과 4시간만에 완판 되었다. 행사장에 늦게 도착해서 결국 못 산 팬까페의 회원들은 아쉬워
발을 동동 굴렀다. 인쇄비를 제하고도 200만원이 넘는 이익이 났다. 그녀들의 몇 달치 편의점 알바비
였다.
자금 사정이 확실히 나아졌다. 보은의 편의점 알바비로 생활비를 대고, 한 두달에 한번씩 만화 행사에
참가해서 회지를 팔면서 남는 이익은 또 재투자도 하고…물론 그렇다고 해봐야 다람쥐 쳇바퀴 식으로,
딱히 적금을 한다거나 할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또 둘의 만만찮은 식비도 문제였다.
"아 왜 이렇게 배는 부른데 입이 심심하지?"
"나두"
둘의 몸무게는 이제 각각 80, 90kg 대에 진입했다. 이제는 어디 둘이 다니기라도 하면 길가의 사람들이
못 볼 것 본 듯이 행동했다. 특히 나이든 할아버지들은 최소한의 예의나 개념조차 없이 막말을 대놓고
해댔고, 고딩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은은 애써 모른 척 무시했지만, 지연은 그때마다 티는 안 내도
속이 상하는 눈치긴 했다. 뭐가 그렇게 새삼스러울까 싶을 정도로. 아니 그보다 보은은 그쯤해서 또
은근히 짜증나는 점이 있었다.
보은 자신은 밤에 여전히 편의점 일을 나갔지만, 지연은 아니었다. 그대신 요리나 청소, 빨래는 지연이
담당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꼭 다 매일매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 여기 컴퓨터부터 회지
내는 초기 자금 같은 것도 전부 지연이 대긴 했지만 어쨌거나 자기만 2배로 고생하는 느낌이라 싫었다.
그래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솔직히 두려웠다.
그 얼마 전부터 했던 생각이다. 그래도 지연이 있어서 미래에 대한 걱정없이, 좋아하는 만화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분명히… 어찌보면 평범하게, 그냥 평범하게 잘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지연
이를 물들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무엇보다 그 문하생 시절처럼, 세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버려진
기분만 느끼며 살아가게 되진 않을까, 그게 두려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전화를 받으며 벽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밤10시가 넘었다.
뭐야, 2시간도 넘게 옛날 생각하고 있던거야? 어쨌든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지연의 전화였다.
"지연아, 나 아까 말한거"
"보은아"
가라앉아 갈라진 목소리. 보은은 지연의 그런 목소리를 듣자마자 왈칵 자기가 더 눈물이 나왔다. 그냥 그
레이버 웹툰, 연재한다고 할걸. 왜 안 한다고 해서…
"지연아 미안해. 내가… 내일 담당자한테 다시 말해서, 내가…"
그러자 전화기 저 편에서 지연이 잠시 머뭇거리며, 간신히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그녀도 대답했다.
"보은아…괜찮…구, 그리고 지금 너 말하는거 다 알겠어. 근데 그보다…"
지연의 말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지만 보은은 "어 말해, 뭐든지 말해" 하면서 전화기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연 역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입을 열었다.
"후라이드… 사갈까, 양념 사갈까…"
…처음에 듣고서는 한 3초를 무슨 소리인가 머리가 멍해져서 대답을 못했던 보은이었지만, 곧 그녀는
눈가에 흐르는 눈물까지 다 떨굴만큼 크게 웃었다. 그리고 전화기 저 편 지연 역시 빵 터져서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정말 얼마만에 이렇게 웃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둘은 크게 웃었다.
한참을 크게 웃은 보은은 후련한 마음으로 눈물을 닦고 대답했다.
"반반으로, 사와"
"어 알았어"
전화를 끊고, 보은은 마음 먹었다. 지연이 들어오면, 꼭 끌어안아주리라. 내 가장 소중한 친구, 지연아…
사랑해.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