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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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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그만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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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만 입은 채, 모텔방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틀어올려 묶으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간밤을 함께
보낸 여자가 유독 섹시하게 보이는 그 순간, 그런 말을 듣노라니 씁쓸함 이전에 멍함이 더 크게 느껴
졌다. 나는 한참을 대답없이 가만있다가 뒤늦게 물었다.

"왜"

그러자 그녀는 화장대 위에 올려놓은 브래지어를 하면서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언제까지 이럴건데"

뭐, 물론… 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구는 더더욱 아니고, 소위 말하는 섹파, 라고 하기에는 왠지 또
'과거'를 가진 우리인 만큼 이 애매한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는게 맞기는 맞겠지만…  그 정리가
'청산'을 의미하는 정리이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렇게 성욕을 풀 상대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 아주 솔직히 말해
그게 제일 큰 감정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나마 관계를 이어나가고, 또
서로가 진지하게는 기대하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 영화나 드라마 속의 그것처럼 정말 드라마틱한
전개를 통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솔직히 아주 없지는 않았다.

"뭐… 피차, 필요한 관계 아니었나?"

하지만 나나 그녀나, 마음 속의 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말을
할 때에는 어떻게든 포장을 한번 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둘이었고, 항상 후회하듯 그 포장은 언제나
안 하느니만 못했다.

"아니"

그리고 순간 나는 그 '아니' 라는 대답에서, 어쩌면 그녀가 바랬던 것이 어떤 확고한 필요성이 아니라,
나처럼 어떤 확실히 정의내리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덩어리이기를 기대했다. 물론 그게 정답이라고 하더
라도 그녀는 솔직한 답을 주지 않겠지만.

"너 없어도 돼"

그리고 내가 없어도 된다는 말에 담긴 여러가지 가능성에 살짝 또 우울해졌다가 난 잠깐 화제를 돌렸다.

"한번 더 하지 않을래"

그 말을 내뱉은 직후 죽고 싶을만큼 후회했다. 솔직히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사실은 나가서 밥이
라도 같이 먹지 않을래, 하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말을 했다가는 정말로 영영 이별하게 될 것 같아
왠지 말을 돌린다는게 그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그리고 예상과도 같이 그녀는 아무런 대꾸없이 옷을
입기 시작했다.

'후우'

이제 이렇게 그녀와의 관계가 정리되는 것인가. 나는 어쩌면 좋을까 머릿 속으로 수많은 아이디어를
내봤지만, 내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침대 속에서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모습만을 멍
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가지마"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그녀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 붙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대답 대신 "잘 있어.
이제 앞으로 우리, 다시는 보지말자" 라는 말과 함께 방문쪽으로 가서 구두를 신었다. 나는 한숨을
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해"

그녀는 역시 대답없이 구두를 다 신고는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갔다. 쿵 닫겨진 문, 또각또각 들려
오는 그녀의 힐소리… 

어젯밤, 둘 다 술에 취해 함께 이 방에 짐승같은 숨소리를 내며 들어온 기억, 그리고 그 가슴 뭉클한
설레임에 잠시 전율한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이불을 확 덮었다.

이대로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안녕, 정말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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