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은 뭐냐?"
까페에 들어서자 그녀는 저기 구석에서 뭔 책을 무심한 듯 하면서도 열심히 보고 있다. 살그머니 다가가서
묻자 순간 깜짝 놀라더니 나를 향해 소리친다.
"아 왜 이렇게 늦게 와"
"차가 막혔어"
바로 앞 의자를 빼어 앉고 그녀가 읽는 책을 슥 들어 제목을 확인한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아 이거 밀레니엄 원작 소설이구나"
"어, 너 그거 영화 봤어?"
"어. 리스베트 완전 섹시해"
"변태새끼"
나는 목이 말라 그녀의 남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려고 잔을 확인했지만 비어있다.
"다 마셨네"
"어. 나 근데 또 마실래.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실래. 니가 좀 사와"
그녀는 카드를 내밀었지만 나는 사양했다.
"내가 사줄께. 아이스 아메리카노? 너 쿠폰 찍냐?"
"어, 잠깐만"
그녀는 지갑에서 조물조물 뒤적이더니 쿠폰을 나한테 건내줬다. 나는 계산대로 가서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오늘의 커피 하나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둘 다 레귤러 사이즈로요"
"네에, 오른쪽에서 기다리시면 커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바로 준비되어 나올 모양이다. 그 사이 다시 우리 테이블쪽을 바라보자 그녀는
여전히 책을 열심히 보고 있다. 참 책도 많이 본다.
"네 고객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오늘의 커피 준비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커피를 받아와 테이블에 올려놓자 그녀는 "고마워, 잘 마실께" 하면서 커피를 받아들고는 책을 덮었다.
"요새 일은 어때?"
그녀의 근황에 대해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맨날 똑같지 뭐. 이제 다음 주부터는 나 완전 죽었어. 프로젝트 들어가면 아무 것도 못해. 아 싫다"
"으휴, 그래서 너 어디 연애는 언제하고 또 시집은 언제가니"
"아 몰라, 우울한 이야기 하지마"
검은 나시에 회색 앙고라티를 입은 그녀. 가냘픈 체구지만 의외로 볼륨감 있는 바스트에 슬쩍 시선이
꽂히지만 그래봐야 뭐 만질 가슴도 아닌데 시선은 그만주고… 아, 그러고보니 머리 좀 자른 모양이다.
"어? 그러고보니 머리 잘랐네?"
"어.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 나 쫌 망한 거 같애"
"아니 괜찮아. 꼭 남자 같아서 좋네"
살짝 자른 머리지만 과하게 '남자 같다'라고까지 짖궃게 말하자 그녀는 웃으면서 "아 미친 소리 좀
하지마" 하면서 내 손을 툭 친다.
"근데 오늘 뭐할까? 이따 영화나 볼래?"
"영화? 뭐 봐?"
"댄싱퀸 어때?'
"재밌대?"
"무난하대"
두 줄기의 굵은 은줄기가 꼬인 모양의 금속 시계줄이 인상적인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그래, 그러지 뭐"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영화는 내가 결제할께, 밥은 니가 쏴"
"오케이"
바로 아이폰을 들어 휴대폰으로 예매를 하는 그녀. "5시 반 영화 있네. 이거 보자" 라며 계속 휴대폰으로
영화 예매를 하면서 그녀는 물었다.
"요새 연애는 안 해?"
"안 해"
"너 솔로 된지 꽤 오래되지 않았어?"
"니나 나나"
"왜 안 해?"
"그냥"
그리고 문득 그녀와 사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름 잘 맞을 거 같긴 하다. 섹스는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지만 음, 나름 몸매도 좋으니까…를 떠나서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거야.
"예매 다 했다"
"오케이. 아 근데 나 배고프다"
"점심 안 먹었어? 뭐라도 먹을래?"
"아냐 됐어. 이따 영화 끝나고 먹던지 하자. 넌 점심 먹었냐?"
"어 먹었어. 햄버거"
"왠일로? 너 햄버거 존나 싫어하잖아"
"그냥 배고파서"
그러다가 문득 옆을, 하이힐 신은 아주 스타일 좋은 여자 둘이 내 옆으로 해서 저기 또 다른 구석에 가서
앉았다.
"남자들이 봤을 때 저런 스타일들 어때?"
"어떤 스타일?"
"그냥 뭐, 섹시하고 늘씬한 뭐 그런. 하이힐 잘 어울리는 도시 여자 느낌?"
"당연히 좋지"
"저런 스타일이 남자들한테는 무조건 1등이지?"
항상 '남자들의 시선'에 대해 궁금해하는 그녀.
"글쎄, 뭐 취향에 따라 갈리겠지만 이쁘면 뭐, 저런 스타일 싫어하지는 않지 당연히. 왜 너도 도시여자
스타일로 꾸미고 다니게?"
"내가 저렇게 꾸미면 어떨 것 같애?"
글쎄다. 언제나 캐쥬얼한 의상을 좋아하는 그녀. 루부땅보다 뉴발란스가 더 잘 어울리고, 샤넬 트위드
보다 카키색 야상이 더 잘 어울리는 그녀지만… 뭐, 의외로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보니까 내가 너 정장 스타일로 입은건 단 한번도 못 본 것 같애"
"내가? 왜? 저번에 지희 언니 결혼식 때도 입었잖아"
"그랬나? 아 맞다 너 그 까만거에 여기 뭐 달린 그 재킷?"
"어"
그때도 맞어, 새삼 되게 여성스럽다고 생각하긴 했다.
"음, 그런 스타일도 나름 잘 어울릴 것 같긴 하네. 머리도 쫌 이제 아멜리에 같은 스타일 좀 그만하고
길러보면 어때?"
"관리하기 귀찮아. 너네 남자들은 긴 머리 관리하는게 얼마나 귀찮은지 모른다? 자기 전에 씻고 머리
말리는 것도 일이야"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이쁘면 그만이니까. 하긴 근데 넌 쫌…음…"
내가 구태여 좀 아니라는 듯 표정을 짓자 그녀가 또 웃으면서 "아 너한테 평가받기 싫어 평가하지마"
하면서 손사레를 친다. 나는 그녀의 아이폰을 슥 터치하면서 "노래 뭐 있어?" 하고 묻자 그녀는 비밀
번호를 해제하고는 나한테 넘겨줬다.
"뭐 없어. 요새 업데이트 잘 안 해서"
리스트를 좀 훑었지만 과연 다듀 신보 정도 이외에는 별로 눈에 띄는게 없다.
"요즘에 쉬는 날은 주로 뭐해?"
아이폰을 슥 밀어놓고 일상에 대해 묻자 그녀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냥 뭐, 회사 끝나면 집에 와서,
밥 먹고, 컴퓨터 잠깐 하다가, 책 좀 보던가, 아니면 승희랑 술 마시던가, 아니면… 아 근데 요즘에
일 진짜 너무 짜증나. 같이 일하던 남자애가 관뒀는데 새로 사람을 안 뽑아줘"
"아 그러고보니 요새 승희는 뭐한대?"
"요즘 쇼핑몰 디자인하는거 알바 하나 맡아서 그거 땜에 바쁜가 봐. 계속 오더를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니까 짜증나는거지. 150받고 일하기로 했는데 지금 단가로 따지면 거의 300짜리 일을 해주고
있는거래. 근데 아는 사람이니까 또 뭐라고 하기도 거시기하고, 너무 또 잘 모르고 요구하니까"
이래저래 쉽게 사는 사람들은 없는 모양이다.
G열 11, 12석. 자리에 앉아 한참 영화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내 팔뚝에 그녀의 팔뚝이 닿아있음을
느낀다. 왠일인지 나는 살짝 두근거림을 느낀다. 나는 팔을 치울 생각이 없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
로 그저 그녀는 영화에만 집중한 채 즐겁게만 보고 있다. 살짝 흘낏 보았지만 정말 새삼스레 그녀의
얼굴 옆라인이 참 예쁘장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흠'
내가 요즘 궁한가. 왜 자꾸 얘가 여자로 보일까. 아니 뭐 사내 새끼가 또래 여자랑 만나서 문득문득
새삼스레 여자로 느끼는 일이야 흔한 일이지만 살짝 두근대며 설레이는 이 마음은 또 뭐란 말인가.
아 정말…
'하지만'
문득 바로 몇 센치 옆에 놓인 그녀의 손을 새삼스레 잡고 싶어졌다. 아 물론 이래저래 놀면서 수도
없이 잡아본 손이지만 새삼 영화보면서 잡고 싶어지는 이 마음은 또 정말이지 뭐란 말인가.
'크흠'
마음 속으로 헛기침을 삼키면서 헛지랄 말고 다시 영화에 집중하기로 한다. 하지만 계속 맞닿아
있는 팔뚝의 온기는 묘하게 기분이 좋다. 영화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황정민의 열연도
지금 내 마음의 설레임을 가라앉히기에는 부족하다.
만약, 대뜸 갑자기 내가 손을 확 잡아버리면 어떻게 반응할까. 확 빼버리고 정색을 할까? 아니면
픽 웃으면서 팔꿈치로 "어디서! 확!" 하고 웃으면서 넘길까? 아니면 가만있을까?
문득 이렇게 '친구가 되어버린 여자'에 대해 새삼 머릿 속에서 그녀에 대한 내 안의 어떤 정의를
새삼 정리해본다. 아주 대단한 미인은 아니더라도 매력 있는 얼굴에, 늘씬하고, 가슴도 볼륨있고,
내 말에 잘 웃어주고, 책도 많이 보고, 밥도 잘 쏘고, 제 할 일 딱 부러지게 잘 처리하고, 보이시
하면서도 가끔 여자처럼 챙겨입을 때는 또 나름 스타일 있고… 괜찮네.
'하 참 내가 오늘 제대로 미쳤구나'
기가 막혀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딱히 웃긴 장면이 아니라서 나 혼자 크게 픽
웃은 셈이 되었고, 나의 그 킥! 하는 혼자만의 웃음 소리에 그녀는 '아 저게 뭐가 웃겨!' 하는 톤으로
웃으면서 팔로 내 팔을 툭 쳤다.
"아니 그냥"
얼버무리고 다시 영화로 시선을 돌린다.
영화가 끝나고 "밥 어디서 먹지?" 하고 두리번 거리다가 대뜸 짬뽕이 먹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우리는 영화관 아랫층의 식당가에서 중국요리점에 들어갔다. 사실은 매드포갈릭이나 아니면 세븐
스프링스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뭘 비싼 걸 먹어" 하면서 그냥 중화요리나 먹잔다.
"아 내일은 출근이야 이제"
테이블에 앉자마자 내일의 출근 생각에 우울해졌는지 한숨을 쉬며 엎드린 그녀를 향해 "아 직장인의
비애다 정말"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는데, 동그랗고 작은 그녀의 머리가 또 왠일인지 귀엽다.
"아 만지지마. 나 오늘 머리 안 감았단 말이야"
"어휴"
귀여운 마음에 머리를 슥 쓰다듬었건만 그녀의 말에 그저 산통이 확 깨진다. 너털웃음을 흘리자 그녀는
고개를 들면서 "근데 말이야, 너, 여자들 막 이렇게 머리 만지고 그러지 마라? 이거 여자애들 좋아하는
애들은 또 막 좋아라하는데, 싫어하는 애들은 완전 싫어해" 하고 나에게 말한다.
"아무렴 내가 미친 놈도 아니고 길가는 아무 여자나 머리통 쓰다듬겠니?"
"어 그럴 같애. 남녀 안 가리고. 바람둥이 새끼"
"허허, 남녀 안가리고 바람둥이면 대단하구만"
실없이 웃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남자가 머리 만져주는거 좋아하는 편이야, 싫어하는 편이야? 확실히 갈리긴 갈리는 거 같애"
"난, 뭐, 잘 생긴 남자가 만져주면 좋지. 아 원빈 같은 남자가 내 머리 쓰다듬어주면 죽어버릴 정도로 막
좋을 거 같다 아 원빈님"
"내가 만져주는게 그렇게 좋았냐?"
"아니 혐오스러워서 소름 돋았어"
"느꼈구만"
헛소리를 주고 받노라니 짬뽕이 나왔다.
"여기 짬뽕 맵고 맛있어"
"여기 와봤어?"
"어"
"역시 이 새키, 여자랑 안 다녀본 데가 없구만"
나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구만.
"아 저번에 승희랑 너 기다리다 여기서 먹은거야"
"승희는 여자 아니냐?"
"고추 없는 남자지"
한참을 웃다가 그녀는 "너 승희한테 다 이를거야" 하고 말하고는 젓가락을 들고는 맛나게 짬뽕을 시식
하기 시작한다.
"천천히 좀 먹어"
단무지 그릇을 먹기좋게 그녀 앞에 놓았다.
"으으 춥다"
밥을 먹고 나오자 날씨가 많이 쌀쌀했다. 속 안에 앙고라 티에 두툼한 양털 달린 야상에 심지어 목도리까지
둘둘 만 그녀가 춥다고 난리다. 나는 그냥 목티에 코트 하나 입은게 전부인데.
"넌 나 입은거 보면 춥다고 말하는게 미안하지 않냐?"
"누가 춥게 입고 다니라니?"
"너가 너무 껴입은거지"
"다음 주부터 엄청 춥대"
추위를 많이 타는 그녀. 나는 코를 슥 비빈 후에 말했다.
"너도 그럼 빨리 늑대 목도리 하나 만들어라"
"그러게. 아 내 늑대 목도리는 누가 짜고 있는거야 빨리 나와라"
"그거 비싸대"
"내 전재산 털어서라도 산다"
나는 그 말에 픽 웃고는 모르는 척 그녀의 등을 감싸듯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뭐하는거야 지금?"
"춥다며? 따뜻하게 해주려고"
"아 너는 늑대가 아니라 그냥 짐승이고. 아 됐어"
말은 뚱하니 말하지만 딱히 뿌리치거나 정색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그녀가 귀엽다.
"저기 택시 타는 데까지만 늑대할께"
"넌 어떻게 갈거야? 너도 택시 타?"
"어 너무 춥다. 이 날씨에 버스타고 이러는게 싫다"
날씨가 많이 춥다. 택시 타면 한 만원 좀 넘게 나오겠지만 그냥 그러기로 했다.
"그래. 추운데 택시타구 가. 같은 방향이면 좋을텐데"
"그럼 내가 오늘 너네 집에서 잘까?"
"미친 놈, 택시비 아까우니까 하는 말이지"
"그러니까"
이래저래 짖궂은 말들을 던지면서 묘하게… 그녀의 가느다란 체구와 동그란 어깨가 참 귀엽고, 왠지
여자친구 같아서 좋았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그녀도 나도 잠시 말이 없어졌고 그렇게 조금 더
걷다보니 어느새 택시정류장이다.
"어 바로 기다리고 있네. 먼저 타고 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내 손을 풀고 택시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럼 조심
해서 들어가. 이따가 도착하면 문자할께" 하고는 택시에 올랐다. "조심해서 들어가" 하는 인사와 함께
별로 설마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택시번호를 입으로 두어번 중얼거리며 외우
고는 다음 택시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흠'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까페에 들어서자 그녀는 저기 구석에서 뭔 책을 무심한 듯 하면서도 열심히 보고 있다. 살그머니 다가가서
묻자 순간 깜짝 놀라더니 나를 향해 소리친다.
"아 왜 이렇게 늦게 와"
"차가 막혔어"
바로 앞 의자를 빼어 앉고 그녀가 읽는 책을 슥 들어 제목을 확인한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아 이거 밀레니엄 원작 소설이구나"
"어, 너 그거 영화 봤어?"
"어. 리스베트 완전 섹시해"
"변태새끼"
나는 목이 말라 그녀의 남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려고 잔을 확인했지만 비어있다.
"다 마셨네"
"어. 나 근데 또 마실래.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실래. 니가 좀 사와"
그녀는 카드를 내밀었지만 나는 사양했다.
"내가 사줄께. 아이스 아메리카노? 너 쿠폰 찍냐?"
"어, 잠깐만"
그녀는 지갑에서 조물조물 뒤적이더니 쿠폰을 나한테 건내줬다. 나는 계산대로 가서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오늘의 커피 하나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둘 다 레귤러 사이즈로요"
"네에, 오른쪽에서 기다리시면 커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바로 준비되어 나올 모양이다. 그 사이 다시 우리 테이블쪽을 바라보자 그녀는
여전히 책을 열심히 보고 있다. 참 책도 많이 본다.
"네 고객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오늘의 커피 준비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커피를 받아와 테이블에 올려놓자 그녀는 "고마워, 잘 마실께" 하면서 커피를 받아들고는 책을 덮었다.
"요새 일은 어때?"
그녀의 근황에 대해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맨날 똑같지 뭐. 이제 다음 주부터는 나 완전 죽었어. 프로젝트 들어가면 아무 것도 못해. 아 싫다"
"으휴, 그래서 너 어디 연애는 언제하고 또 시집은 언제가니"
"아 몰라, 우울한 이야기 하지마"
검은 나시에 회색 앙고라티를 입은 그녀. 가냘픈 체구지만 의외로 볼륨감 있는 바스트에 슬쩍 시선이
꽂히지만 그래봐야 뭐 만질 가슴도 아닌데 시선은 그만주고… 아, 그러고보니 머리 좀 자른 모양이다.
"어? 그러고보니 머리 잘랐네?"
"어.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 나 쫌 망한 거 같애"
"아니 괜찮아. 꼭 남자 같아서 좋네"
살짝 자른 머리지만 과하게 '남자 같다'라고까지 짖궃게 말하자 그녀는 웃으면서 "아 미친 소리 좀
하지마" 하면서 내 손을 툭 친다.
"근데 오늘 뭐할까? 이따 영화나 볼래?"
"영화? 뭐 봐?"
"댄싱퀸 어때?'
"재밌대?"
"무난하대"
두 줄기의 굵은 은줄기가 꼬인 모양의 금속 시계줄이 인상적인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그래, 그러지 뭐"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영화는 내가 결제할께, 밥은 니가 쏴"
"오케이"
바로 아이폰을 들어 휴대폰으로 예매를 하는 그녀. "5시 반 영화 있네. 이거 보자" 라며 계속 휴대폰으로
영화 예매를 하면서 그녀는 물었다.
"요새 연애는 안 해?"
"안 해"
"너 솔로 된지 꽤 오래되지 않았어?"
"니나 나나"
"왜 안 해?"
"그냥"
그리고 문득 그녀와 사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름 잘 맞을 거 같긴 하다. 섹스는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지만 음, 나름 몸매도 좋으니까…를 떠나서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거야.
"예매 다 했다"
"오케이. 아 근데 나 배고프다"
"점심 안 먹었어? 뭐라도 먹을래?"
"아냐 됐어. 이따 영화 끝나고 먹던지 하자. 넌 점심 먹었냐?"
"어 먹었어. 햄버거"
"왠일로? 너 햄버거 존나 싫어하잖아"
"그냥 배고파서"
그러다가 문득 옆을, 하이힐 신은 아주 스타일 좋은 여자 둘이 내 옆으로 해서 저기 또 다른 구석에 가서
앉았다.
"남자들이 봤을 때 저런 스타일들 어때?"
"어떤 스타일?"
"그냥 뭐, 섹시하고 늘씬한 뭐 그런. 하이힐 잘 어울리는 도시 여자 느낌?"
"당연히 좋지"
"저런 스타일이 남자들한테는 무조건 1등이지?"
항상 '남자들의 시선'에 대해 궁금해하는 그녀.
"글쎄, 뭐 취향에 따라 갈리겠지만 이쁘면 뭐, 저런 스타일 싫어하지는 않지 당연히. 왜 너도 도시여자
스타일로 꾸미고 다니게?"
"내가 저렇게 꾸미면 어떨 것 같애?"
글쎄다. 언제나 캐쥬얼한 의상을 좋아하는 그녀. 루부땅보다 뉴발란스가 더 잘 어울리고, 샤넬 트위드
보다 카키색 야상이 더 잘 어울리는 그녀지만… 뭐, 의외로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보니까 내가 너 정장 스타일로 입은건 단 한번도 못 본 것 같애"
"내가? 왜? 저번에 지희 언니 결혼식 때도 입었잖아"
"그랬나? 아 맞다 너 그 까만거에 여기 뭐 달린 그 재킷?"
"어"
그때도 맞어, 새삼 되게 여성스럽다고 생각하긴 했다.
"음, 그런 스타일도 나름 잘 어울릴 것 같긴 하네. 머리도 쫌 이제 아멜리에 같은 스타일 좀 그만하고
길러보면 어때?"
"관리하기 귀찮아. 너네 남자들은 긴 머리 관리하는게 얼마나 귀찮은지 모른다? 자기 전에 씻고 머리
말리는 것도 일이야"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이쁘면 그만이니까. 하긴 근데 넌 쫌…음…"
내가 구태여 좀 아니라는 듯 표정을 짓자 그녀가 또 웃으면서 "아 너한테 평가받기 싫어 평가하지마"
하면서 손사레를 친다. 나는 그녀의 아이폰을 슥 터치하면서 "노래 뭐 있어?" 하고 묻자 그녀는 비밀
번호를 해제하고는 나한테 넘겨줬다.
"뭐 없어. 요새 업데이트 잘 안 해서"
리스트를 좀 훑었지만 과연 다듀 신보 정도 이외에는 별로 눈에 띄는게 없다.
"요즘에 쉬는 날은 주로 뭐해?"
아이폰을 슥 밀어놓고 일상에 대해 묻자 그녀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냥 뭐, 회사 끝나면 집에 와서,
밥 먹고, 컴퓨터 잠깐 하다가, 책 좀 보던가, 아니면 승희랑 술 마시던가, 아니면… 아 근데 요즘에
일 진짜 너무 짜증나. 같이 일하던 남자애가 관뒀는데 새로 사람을 안 뽑아줘"
"아 그러고보니 요새 승희는 뭐한대?"
"요즘 쇼핑몰 디자인하는거 알바 하나 맡아서 그거 땜에 바쁜가 봐. 계속 오더를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니까 짜증나는거지. 150받고 일하기로 했는데 지금 단가로 따지면 거의 300짜리 일을 해주고
있는거래. 근데 아는 사람이니까 또 뭐라고 하기도 거시기하고, 너무 또 잘 모르고 요구하니까"
이래저래 쉽게 사는 사람들은 없는 모양이다.
G열 11, 12석. 자리에 앉아 한참 영화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내 팔뚝에 그녀의 팔뚝이 닿아있음을
느낀다. 왠일인지 나는 살짝 두근거림을 느낀다. 나는 팔을 치울 생각이 없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
로 그저 그녀는 영화에만 집중한 채 즐겁게만 보고 있다. 살짝 흘낏 보았지만 정말 새삼스레 그녀의
얼굴 옆라인이 참 예쁘장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흠'
내가 요즘 궁한가. 왜 자꾸 얘가 여자로 보일까. 아니 뭐 사내 새끼가 또래 여자랑 만나서 문득문득
새삼스레 여자로 느끼는 일이야 흔한 일이지만 살짝 두근대며 설레이는 이 마음은 또 뭐란 말인가.
아 정말…
'하지만'
문득 바로 몇 센치 옆에 놓인 그녀의 손을 새삼스레 잡고 싶어졌다. 아 물론 이래저래 놀면서 수도
없이 잡아본 손이지만 새삼 영화보면서 잡고 싶어지는 이 마음은 또 정말이지 뭐란 말인가.
'크흠'
마음 속으로 헛기침을 삼키면서 헛지랄 말고 다시 영화에 집중하기로 한다. 하지만 계속 맞닿아
있는 팔뚝의 온기는 묘하게 기분이 좋다. 영화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황정민의 열연도
지금 내 마음의 설레임을 가라앉히기에는 부족하다.
만약, 대뜸 갑자기 내가 손을 확 잡아버리면 어떻게 반응할까. 확 빼버리고 정색을 할까? 아니면
픽 웃으면서 팔꿈치로 "어디서! 확!" 하고 웃으면서 넘길까? 아니면 가만있을까?
문득 이렇게 '친구가 되어버린 여자'에 대해 새삼 머릿 속에서 그녀에 대한 내 안의 어떤 정의를
새삼 정리해본다. 아주 대단한 미인은 아니더라도 매력 있는 얼굴에, 늘씬하고, 가슴도 볼륨있고,
내 말에 잘 웃어주고, 책도 많이 보고, 밥도 잘 쏘고, 제 할 일 딱 부러지게 잘 처리하고, 보이시
하면서도 가끔 여자처럼 챙겨입을 때는 또 나름 스타일 있고… 괜찮네.
'하 참 내가 오늘 제대로 미쳤구나'
기가 막혀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딱히 웃긴 장면이 아니라서 나 혼자 크게 픽
웃은 셈이 되었고, 나의 그 킥! 하는 혼자만의 웃음 소리에 그녀는 '아 저게 뭐가 웃겨!' 하는 톤으로
웃으면서 팔로 내 팔을 툭 쳤다.
"아니 그냥"
얼버무리고 다시 영화로 시선을 돌린다.
영화가 끝나고 "밥 어디서 먹지?" 하고 두리번 거리다가 대뜸 짬뽕이 먹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우리는 영화관 아랫층의 식당가에서 중국요리점에 들어갔다. 사실은 매드포갈릭이나 아니면 세븐
스프링스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뭘 비싼 걸 먹어" 하면서 그냥 중화요리나 먹잔다.
"아 내일은 출근이야 이제"
테이블에 앉자마자 내일의 출근 생각에 우울해졌는지 한숨을 쉬며 엎드린 그녀를 향해 "아 직장인의
비애다 정말"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는데, 동그랗고 작은 그녀의 머리가 또 왠일인지 귀엽다.
"아 만지지마. 나 오늘 머리 안 감았단 말이야"
"어휴"
귀여운 마음에 머리를 슥 쓰다듬었건만 그녀의 말에 그저 산통이 확 깨진다. 너털웃음을 흘리자 그녀는
고개를 들면서 "근데 말이야, 너, 여자들 막 이렇게 머리 만지고 그러지 마라? 이거 여자애들 좋아하는
애들은 또 막 좋아라하는데, 싫어하는 애들은 완전 싫어해" 하고 나에게 말한다.
"아무렴 내가 미친 놈도 아니고 길가는 아무 여자나 머리통 쓰다듬겠니?"
"어 그럴 같애. 남녀 안 가리고. 바람둥이 새끼"
"허허, 남녀 안가리고 바람둥이면 대단하구만"
실없이 웃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남자가 머리 만져주는거 좋아하는 편이야, 싫어하는 편이야? 확실히 갈리긴 갈리는 거 같애"
"난, 뭐, 잘 생긴 남자가 만져주면 좋지. 아 원빈 같은 남자가 내 머리 쓰다듬어주면 죽어버릴 정도로 막
좋을 거 같다 아 원빈님"
"내가 만져주는게 그렇게 좋았냐?"
"아니 혐오스러워서 소름 돋았어"
"느꼈구만"
헛소리를 주고 받노라니 짬뽕이 나왔다.
"여기 짬뽕 맵고 맛있어"
"여기 와봤어?"
"어"
"역시 이 새키, 여자랑 안 다녀본 데가 없구만"
나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구만.
"아 저번에 승희랑 너 기다리다 여기서 먹은거야"
"승희는 여자 아니냐?"
"고추 없는 남자지"
한참을 웃다가 그녀는 "너 승희한테 다 이를거야" 하고 말하고는 젓가락을 들고는 맛나게 짬뽕을 시식
하기 시작한다.
"천천히 좀 먹어"
단무지 그릇을 먹기좋게 그녀 앞에 놓았다.
"으으 춥다"
밥을 먹고 나오자 날씨가 많이 쌀쌀했다. 속 안에 앙고라 티에 두툼한 양털 달린 야상에 심지어 목도리까지
둘둘 만 그녀가 춥다고 난리다. 나는 그냥 목티에 코트 하나 입은게 전부인데.
"넌 나 입은거 보면 춥다고 말하는게 미안하지 않냐?"
"누가 춥게 입고 다니라니?"
"너가 너무 껴입은거지"
"다음 주부터 엄청 춥대"
추위를 많이 타는 그녀. 나는 코를 슥 비빈 후에 말했다.
"너도 그럼 빨리 늑대 목도리 하나 만들어라"
"그러게. 아 내 늑대 목도리는 누가 짜고 있는거야 빨리 나와라"
"그거 비싸대"
"내 전재산 털어서라도 산다"
나는 그 말에 픽 웃고는 모르는 척 그녀의 등을 감싸듯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뭐하는거야 지금?"
"춥다며? 따뜻하게 해주려고"
"아 너는 늑대가 아니라 그냥 짐승이고. 아 됐어"
말은 뚱하니 말하지만 딱히 뿌리치거나 정색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그녀가 귀엽다.
"저기 택시 타는 데까지만 늑대할께"
"넌 어떻게 갈거야? 너도 택시 타?"
"어 너무 춥다. 이 날씨에 버스타고 이러는게 싫다"
날씨가 많이 춥다. 택시 타면 한 만원 좀 넘게 나오겠지만 그냥 그러기로 했다.
"그래. 추운데 택시타구 가. 같은 방향이면 좋을텐데"
"그럼 내가 오늘 너네 집에서 잘까?"
"미친 놈, 택시비 아까우니까 하는 말이지"
"그러니까"
이래저래 짖궂은 말들을 던지면서 묘하게… 그녀의 가느다란 체구와 동그란 어깨가 참 귀엽고, 왠지
여자친구 같아서 좋았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그녀도 나도 잠시 말이 없어졌고 그렇게 조금 더
걷다보니 어느새 택시정류장이다.
"어 바로 기다리고 있네. 먼저 타고 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내 손을 풀고 택시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럼 조심
해서 들어가. 이따가 도착하면 문자할께" 하고는 택시에 올랐다. "조심해서 들어가" 하는 인사와 함께
별로 설마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택시번호를 입으로 두어번 중얼거리며 외우
고는 다음 택시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흠'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