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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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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지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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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근 10년은 족히 된 이야기지만 갑자기 생각나서.



저녁에 한참 놀다 집에 들어가자, 아버지가 휴대용 MP3 플레이어를 들으면서 거실에 앉아 계시다가 나를 보고 무언가 생각났다듯 다가오셨다.

"이거 노래 듣는거, 찌그 좀 지워줘"

원래 가끔 밑도 끝도 없는 퀘스트를 종종 던지시는 아버지지만, 이번에야말로 의뢰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찌그가 뭘까.

"찌그?"
"응, 찌그"

아니 그러니까 찌그가 뭘까. 일단 그가 내민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를 받아들었다. IHP-100모델. HDD를 채용해서 10기가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수준의 엄청난 용량을 가진 모델이긴 하지만 그런 만큼 묵직하고 크다. 모르는 사람들은 MP3 플레이어라고는 쉽게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도 너무 무겁다. 나도 몇 번 쓰다가 무겁다는 이유로 던져두고 쳐박아 둔 모델이지만 아버지에게는 현역이다. 들고 다니기 힘드셨을텐데 참. 좋은 모델 하나 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묘한 기분을 느끼며 어쨌든 MP3 플레이어를 PC에 연결한다. 그리고 003_ZIG.MP3 파일이라는, 그 문제의 '찌그'로 추정되는 파일을 찾았다.

지그.

나도 호기심이 동해서 바로 플레이를 눌러봤고, 그 결과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시에 인기를 끌던 게임, 슈퍼로봇대전에 나오는 고전 로봇 '강철 지그'의 오프닝곡 파일이다. 

아마 당시 슈퍼로봇대전에 심취해서 관련 원작 올드 애니메이션 오프닝곡 파일들을 구해놓았다가, 그게 아버지가 원하던 뽕짝 트로트 파일 속에 같이 섞여 들어간 모양이다. 한번에 몽땅 뽕짝 노래들을 집어넣고 그 이후로 업데이트를 한 적이 없으니 그는 1년 반 이상을 매일 같이 들은 것이다. 

아 원 세상에.  

"단다다다다 다단다다단 하는 이거 지우면 되는거지?"

그 말에 아버지는 "어 그거"하고 흡족해하신다. 

"이거 그럼 맨날 이 노래 들은거야?"
"어"


003으로 시작하는 빠른 순위의 파일명 덕분에 매번 그 노래가 제일 처음 흘러나왔고, 셔플 기능 같은 것을 잘 몰랐던(IHP100 모델이 또 UI가 좀 복잡한 편이다) 아버지는 결국 아마도 매번 MP3 플레이러를 가동할 때마다 "단다다다다 다단다다단" 하는 70년대 일본 아동 로봇 만화 오프닝곡을 무슨 가요무대 시그널곡이라도 되는 듯 매번 들으셔야 했을게다.

족히 1년 반 이상은 출퇴근 때마다, 그리고 집에서 쉴 때마다 들으셨을테니 아버지는 아마도 강철 지그의 오프닝곡을 대한민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많이 들은 중장년인지도 모른다. 

왠만한 로봇만화 덕후, 슈퍼로봇대전 마니아라고 하더라도 보통 인기작에 관심을 갖지, 지그의 팬은 아닐테니까 말이다. 기왕의 로봇만화라면 건담 시리즈나 단쿠가나 여튼 좀 더 좋은 노래도 많았을텐데 하필이면 단다다다다 지그라니. 안타까웠다. 

아니, 어쩌면 그 동요와 뽕짝 사이 어딘가쯤에 위치한 고전 만화 특유의 단조로운 멜로디가 그나마 뽕짝 취향인 그에게 익숙했을지도 모르니 다행인지도 모르지만.

"삭제 완료"
"잘했어" 


죄스러운 마음에 나는 신곡 뽕짝 노래를 좀 더 넣어드리며 문득 생각했다. 

출퇴근길마다 슈퍼로봇대전에 나오는 특정 로봇만화의 오프닝곡을 듣는 50대 장년 남자의 덕후력은 얼마쯤 되는 것일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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