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짐은 총무과 윤정씨한테 부탁해서 회사 퀵으로 쏴주기로 했다. 뭐 이미 지난 주부터 하나둘씩 빼서
별로 집으로 부칠 것도 없지만.
'후우'
나이 서른 여섯에 여지껏 계약직에 파견직이나 전전하다 대리 한번 못 달고 만년 말단사원으로 겉도는 나.
그래도 두어살이라도 젊었을 때만 해도 '이러다 잘 풀리겠지' 하는 생각이라도 있었다만 이제는 그딴 생각
조차 들지 않는다.
"허허, 참"
서른 셋, 지지난 번 게임 회사에서 GM으로 일할 때 배운 담배… 참 뒤늦게 배운 담배. 뭘하던 뒤늦은 나.
인생을 참 어설프게 사는 나.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아직도 회사를 관두고 나오는 날은 입맛이 참
쓰다. 무엇보다 좆같은 것은 가는 마당이라고 조언이랍시고 씨부리는 것들의 한 마디들.
…떠올릴까 했지만 속이 쓰려 그냥 안 하기로 한다. 길가에 서서 피우던 담배를 끄고 난 터덜터덜 다시 역
쪽으로 향한다.
낮 두 시.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것이 참 청명하고 좋은 날씨이건만 하늘이 밝다한들 내 마음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중충한 마음에 길거리 밝은 사람들의 표정마저 아니꼬와 보인다.
'그렇다고 한들 시비조차 못 걸 놈이'
집에서는 이제 더이상 결혼하라 어쩌라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언젠가 백수로 지낼 때 낮술 퍼마시다
엄마한테 걸려온 전화에 폭언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씨팔 그 놈의 결혼결혼결혼은 무슨 쳐얼어죽을 결혼! 집구석에서 땡전 한 푼을 보태줄 수가 있어,
아니면 내가 모은 돈이 있기를 해 씨부럴! 망할 구석의 집구석이 수챗구멍마냥 돈을 좍좍 빨아가는데 거
무슨 돈이 있어 장가를 가냐고. 현구 그 개병신 새끼는 사고 치고 돈 빨아가고, 영감은 사기를 당한 것도
모잘라서 명의 팔려서 남 돈까지 물어주고. 엄마는… 후우. 엄만 아픈 거니까 관두자. 하여간 니미 씨팔
내 팔자가 이 모양 이 꼴인데 무슨 놈의 결혼이냐고. 어느 눈 먼 여자가 나같은 놈한테 결혼을 올 거냐고
말이야 말이. 만에 하나 와도 그게 무슨 개얼어쳐죽을 년의 개고생이야. 아주 나같은 건, 이 배라먹을 뭐
우리 집구석 같은 집구석은 그냥 대가 끊어지는게 맞는거야. 현구 그 병신 새끼도 깜방에서 나오면 기냥
혼자 살라고 해. 어느 불쌍한 집 여자를 고생시킬 것이며 그 망할 애새끼들은 누가 다 키울거야. 커봤자
지 애비나 닮겠지 염병할. 그러니까 엄마도 그냥 이제 다시는 나보고 결혼이네 장가네 하는 좆같은 소리
도 고만 좀 하라고 원 씨팔! 아주 미쳐버릴 거 같으니까. 무슨 돈으로 무슨 낯짝으로! 어!"
…하아. 내 말을 듣고 엄마는 한 거의 몇 번을 아무 말도 못하다가 전화를 끊으셨다지. 솔직히 쓰러진 건
아닐까 걱정도 됐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도 애써 무시했었다. 그냥 세상이 다 망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전부였으니까.
터덜터덜 걷다보니 어느새 역 근처다. 출구 옆 휴대폰 대리점에서는 새끈하게 잘 빠진 나레이터 여자애
둘이 춤을 추며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만 그래봐야 내 주제에 눈길주는 것도 부담스럽다. 역으로
내려와 카드를 찍고 오후 두 시의, 텅 비었을 것을 기대했지만 의외로 적당히 사람이 차 있는 전철에 몸
을 싣는다.
'다 뭐하는 사람들일까'
피곤한 표정에 손에 가방 하나씩 든 정장 입은 사람들은 중소기업 영업맨이겠고, 잠바떼기에 무표정한
얼굴 시커먼 아저씨들은 뭐 적당히 볼 일 있는 한 가정의 가장들이겠지. 저어기 소근거리며 밝은 표정
으로 전화하고 있는 예쁘장한 아가씨인지 학생인지는 뭐. 에휴, 다 내 알바 아니다.
전철 차창 밖으로 비치는 빌딩들, 건물들을 바라보며 저 많은 건물 속 직장들 속에 나같은 사람 대우해
줄 자리 하나가 없나, 내가 그렇게 무능력한 사람인가 생각 해보면 한없이 내 기분은 바닥 속까지 파고
들어간다.
답답한 가슴은 어느새 검디 검은 색으로 물들어 그 깊은 곳에서 나 혼자 어디론가 아무리 소리치고 외친
들 반향조차 들려오지 않는 칠흑의 바다가 되고, 바닥부터 나를 삼켜가는 그 고독과 음울의 괴로움은 날
서서히 미쳐가게 한다.
촛점 없는 눈으로 차창 너머를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문득 내가 내릴 역이 다음 역이라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고, 어느새 나는 몇 명 앉아있지도 않은 한산한 전철 칸 안에서 혼자 멀뚱히 서있는 또라이가 되어
있었다. 머쓱해진 얼굴을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가리고 문 앞으로 움직인다.
언제나 그랬다. '남들도 다'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해보았자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다 제 살 길을
찾고 있었고 나 혼자 그저 고독하게 서있을 따름이었다. 병신같이.
전철에서 내려 다시 카드를 찍고 역 출구로 향하는 계단. 나는 이유없이 흐르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닦아
내며 서둘러 택시…정류장을 향하다가 그냥 버스 정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직장을 찾을 때까지는 돈을 아껴야 한다. 한달치 퇴직금이 내 생명줄이니까. 그 한달치 퇴직금으로
얼마를 버텨야 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제는 정말 나같은 놈을 어느 누가 써줄지 두렵기까지 하다. 그
두려움에 서러운 한숨이 쏟아졌지만 난 그것도 애써 참았다.
모든 것을 아껴야 한다. 눈물도 돈도 한숨도 모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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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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