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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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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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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을 지나 느즈막하게 져갈 무렵 나는 눈을 떴다. 자면서 침을 괴괴히 흘려 배겟머리가 축축하다.
그 침을 쓰읍 닦아내고 노곤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얼마나 잤을까. 머리가 째-하니 뒷골이 땡기다. 뒷목을
풀어주곤 기지개를 펴며 손을 뻗어 휴대폰으로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오후 3시다. 하루를 반 넘게 날린 셈
이다.

"하암"

터져나오는 하품과 함께 온 몸을 비비 꼬며 있는대로 다시 한번 기지개를 편다. 뿌드드드득 허리 등짝에서
시원하게 골심 빠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니 그제사 몸이 시원하다. 단숨에 몸이 개운해진다. 묵직하니 아까
부터 마려웠던 소변이 방광 가득히 찰랑찰랑 넘칠 듯 팽팽하다. 빤스 속으로 쑤욱 손을 넣어 꼴딱 솟아있는
자지의 위치 조절을  하고는 화장실로 터벅터벅 걸어가 드디어 콸콸 소리 내듯 죠루루루르르르르 해방감을
만끽한다.

"지저분하네"

거울을 본다. 그제 깎았음에도 수염이 덮수룩하니 모양새가 흉하다. 세수하고 면도도 해야겠다. 대충 씻고
잠깐 인터넷이나 깔짝대면 어느새 밤 열시일테고, 그 즈음이면 슬슬 수연이가 집에 올 시간이다. 


내 이름 장인수, 나이는 서른 넷. 장가를 이미 갔거나 목전에 두었어야 할 나이지만 실상은 어림없다. 나이
서른 둘에 계약직 일자리 재고용 불발된 이후로는 무려 2년째 백수다. 2년을 놀아도 여태 명줄이 붙어있는
것은 여섯 살 연하의 여자친구이자 동거녀 수연이 덕분이다. 

대학교 3학년 시절, 군 복학 직후 만난 애기 핏덩이 같은 고딩 여자친구.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어린 기집애
랑 아주 온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아냥을 받으며 물고 빨고 연애한 것이 올해로… 

년 수는 생각 안 나지만 어쨌거나 여지껏 안 헤어지고 잘도 만나온 것은 수연이 고 기집애가 멍청하도록
착한 탓이다. 재혼해서 남자 잘못 만나 평생을 고생하며 살고 있는 엄마를 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한 것이
무조건 착한 남자 잘 골라만나 그 사람과 결혼해 백년해로하는 것이란다. 참 요즘 세상에 마누라 패면서
사는 집구석이라니 기가 찰 일이지만, 옆에서 그저 마음 여린 연하 여친 달래주는 것 밖에 내 손 쓸 길이
없고 그러다보니 정만 깊어졌다. 

몇 번인가 고비고비 있었지만 눈물 뚝뚝 흘리는 그 어린 기집애를 보노라면 그저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
져서 고개 숙이고 다시 잘해보자며 부둥켜 안고 울다보니 그렇게 만나온 것이 오늘이고, 첫 직장 구하자
마자 엄마 돈 천만원 빌려 보증금 삼아 구한 것이 4년째 둘이 사는 원룸이다.
  
처음에는 내가 수연이를 먹여살렸으되, 지금은 수연이가 나를 먹여살린다. 어린 것이 그 빡세다는 광고
에이전시 회사에서 막내로 밤낮 없이 일하면서 벌어온 돈으로 월세도 내고 두 목구멍에 기름칠도 한다.
허나 쥐꼬리 월급으로 둘이 먹고 살긴 쉽지 않다.   
 
"빨리 일을 해야할텐데"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마우스 커서가 향하는 곳은 즐겨찾기에 등록된 
잡크루트가 아니라 온라인게임 섯다 페이지다.



"니미 씨부럴 끝발 뒤지게도 쳐 안붙네, 니미 좆같이"

일주일을 쌔빠져라 모은 게임머니 100억을 두어 시간만에 다 날렸다. 승질도 나고 입에선 쌍욕이 술술
터져나온다. 그러다 문득 출출해 먹을 것 없나 두리번거리다 저기 수연이 화장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노라니 차마 입 속에 뭘 쳐넣기 민망하도록 한심한 본인의 몰골이 비쳤다. 

"옘병…"

나는 기운이 빠져 게임창을 껐다. 그리곤 한참을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얼마를 그리 정신줄
놓고 있었을까. 화면보호기가 켜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한숨과 함께 잡크루트를 클릭했다. 

"어디보자…"

죽 리스트들을 훑어본다. 세상에 이다지도 일자리가 많은데 나 뽑아줄 곳은 없다니. 뽑아주기만 하면야
참 열심히 일할텐데. 기회만 주면 좋겠는데. 그런데 토익점수도 없고 경력도 2년이나 단절된 나이 34살
백수를 어느 눈먼 인사팀이 뽑아줄까.

간간히 좀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자리는 모두 단기 알바 아니면 연봉 2천 미만 계약직이다. 지금
상황에 그 돈이 어디냐 할 수도 있겠지만 2년 지나면 서른 여섯이다. 거기에 두달 더 지나면 서른 일곱.
남들은 과장 차장 달고 있을 나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침대에 벌렁 드러눕고 싶은 충동이 강렬히
몰려오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다. 반드시 이력서를 넣어야 한다. 떨어질게 뻔하더라도.


"으음"

눈을 뜨니 어느새 밤이다. 나는 배를 긁으며 일어났다. 이력서 3개를 쓰고나니 정신력이 올인났다. 종일
아무 것도 안 먹은 셈이지만 배가 안 고프다. 휴대폰으로 시계를 봤다. 9시 48분…수연이에게서 카톡이
와 있었다. 6시 35분에. 

[ 전수연 : 나 오늘 일찍 끝났어 ]
 
바로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신호음이 울리고 그녀가 받았다.

"끝났어?"
"어, 가는 중이야…"
"마중 나갈까?"
"아니야. 오늘은 걍 쉬어"
"어? 어어. 근데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어어…음. 조심해서 와"

수연의 목소리가 침울하다. 나는 어색하게 끊었다. 가슴이 뛴다. 무슨 일이지. 그녀의 기분이 다운될 
때 마다 긴장이 된다. 이제 와서 헤어진다면 정말로 죽도 밥도 안된다. 지금 수연은 삶의 모든 것이다. 
흔한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나는 조금이라도 수연의 기분이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부랴부랴 방
청소를 시작했다. 



삑, 삑, 삑, 삣, 삣 띠리링-

급하게 방청소를 하고나니 온 몸에서 땀이 샘솟는다. 더워서 빤스 바람에 노트로 부채질을 하고 있노
라니 수연이가 현관문 비번을 누르고 들어온다.

"나 왔어…"
"어, 오늘도 수고했어"

웃으며 그녀를 맞이하지만 수연의 표정은 어둡다. 그리고 신경질부터 낸다.

"사람이 뭘 좀 들고 들어오면 좀 받아. 방 안에서 멀뚱멀뚱 바라보지만 말고"
"어, 어어"

그녀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 마트에서 반찬거리 좀 사온 모양이다. 나는 서둘러 봉투를 받아들고 조심
스레 눈치를 보며 냉장고에 잘 쟁여넣는다. 신발을 벗은 수연은 바로 화장실로 들어간다. 나는 할 말이
없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고개만 수그린다. 찬 거리를 쟁여넣고 비닐봉투는 찬장 안 위에 잘 모아둔다.
그리곤 다시 침대 위로 가서 앉는다. 아까 일어나면서 실수로 음소거 버튼을 누른 TV 볼륨을 다시 올리
려니 화장실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 달려가보니 수연이 울고 있었다. 


"하아…"

수연은 자기가 왜 울었는지 말을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뻔한 것 아니겠는가. 꽃다운 20대를 등신 같은
백수 새끼랑 동거하며 보내려니 한심했겠지. 아무리 잊고 살려고 아둥바둥 해봤자 가끔씩 현실에 지치
다보면 그 암담함에 눈물만 샘솟겠지. 난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고는 또 옥상으로 향했다.

미안했다. 그러고보니 문득 낮에 게임이나 쳐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한심한 얼굴이 떠오른다. 너무
한심해서 헛웃음이 다 흘러나왔다. 여섯 살이나 어린 여자친구는 맨날 저렇게 힘들게 일하는데 도대체
나이 쳐먹은 나는 그녀에 빌붙어 살고 있다니… 하는 생각에 손이 바르르 떨렸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한숨을 쉬고 있노라니 등 뒤에서 누가 옥상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수연이겠지.

"추운데 여기서 뭐해"

수연이는 뒤에서 나를 안았다. 예전 같으면 이 타이밍에 울컥해서 찔끔하던 눈물이 빵 터졌을게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메이는 목을 침을 꿀꺽 삼켜 넘기고 대답했다.

"그냥…. 내가 한심해서…미안하다"

수연이는 내 등에 얼굴을 기대고 말했다.

"내가 더 미안해"

잠시나마 얼었던 마음이 다시 녹는 기분이었다. 심장을 조여대던 마음 속 고통이 사그라드는 기분.

"수연아, 내가 진짜로…취업해서…취업하면…잘할께"
"부담 갖지마. 돈은 내가 벌잖아"
"고맙다…"

도대체 나같은 새끼가 뭐 좋다고…가끔 생각한다. 나같은 놈 때문에 이리 착한 애가 꽃다운 시절을
다 헛되이 날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래서 두렵다. 정말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차라리 그녀가
나를 떠나서 더 멋진 남자를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정말 그래도 하나도 안 미울 것 같다.



눈을 떠보니 아침 10시 반이다. 간밤에는 간만에 그녀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인사를 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긴가민가하다. 책상 위에는 만원짜리 한장과 메모가 놓여있었다.

[ 나 없다고 맨날 라면으로 떼우지 말고, 뭐 맛난거라도 사먹어 ]
 
사실 밥버러지 노릇이라도 좀 덜해보려고 요새는 아침은 아예 안 먹고, 점심도 대충 먹었다. 눈치 빠른
수연이가 그걸 알았는지 메모를 남기고 출근했다. 자장면이라도 시켜먹을까 생각했지만, 그보단 그냥
주머니에 잘 찔러넣었다. 비상금을 마련해두면 어디 쓸 일이 생기겠지. 그렇게 모은 비상금의 벌써 한
8만원 된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청소기를 틀고 방을 한번 슥 밀었다. 수연의 빠진
머리카락과 방 안의 먼지가 빨려들어간다. 매일 청소해도 어쩌면 이렇게 매일 먼지가 생길까. 그리고
간밤에 벗어놓은 내 속옷과 바지, 그녀의 티셔츠를 세탁기 속에 넣었다. 

간만에 구석구석 청소했다. 맨날 대충 바닥만 슥 청소기로 밀었는데, 오늘은 달라진 마음으로 청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정갈한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창문은 그대로 열어두었다. 이제는 시원
하다못해 조금 춥지만, 나는 정신을 차려야한다. 

또 몇 군데 이력서를 썼다. 새삼 후회스러운 마음이 든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열심히 찾아보면 분명
이렇게 몇 군데 쓸 곳이 나오는데. 항상 대충대충 넘기고, 대기업이면 '대기업이 나를 뽑아주겠어?'
하는 마음으로 넘기다보니 그렇게 날린 2년 아닌가. 

시간이 정말 잘 갔다. 뭐 게임 좀 하고, 인터넷 좀 하다보면 훌쩍훌적 가는게 시간이긴 하지만, 암만
그래도 이력서 2개 썼다고 벌써 1시 반이다. 깜짝 놀랄 정도다. 이틀간 5개의 이력서를 썼다. 

어제 먹고 남긴 햇반 반 개를 계란 후라이 하나 곁들여서 대충 먹었다. 조금 부족하단 느낌은 들지만
식비라도 아껴야지. 생활비 통장에 남은 잔액이 36만원 4천원. 이번 달 통신 요금과 전기세, 수도세,
보험료 내고 나면 수연이 월급이 들어오는 말일까지 2주간 14만원으로 생활해야 된다. 아껴야지. 

침대에 누웠다. 

이 손바닥만한 방 안에서 수연이와 나는 지난 4년을 부부처럼 살았다. 그녀에게 나는 어떨지 몰라도
만약 누가 지금 나에게 수연이 대신 죽으라고 하면 난 꺼리낌 없이 죽을 것이다. 내가 가장 힘들 때
내 곁에 있어준 그녀다. 

가끔은 우울한 마음에 죽고 싶을 때도 있다. 설령 내일 당장 취업된다고 하더라도 그 뿐이다. 언제 
돈 모으고 언제 장가가나. 수연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평생 호강 한번 못 시켜줄게 뻔하다. 시골의 
어머니 아버지는 요새 전화도 잘 안하신다. 전화하면 뭣하나. 내내 내 걱정만 하시다 끊는데. 심지
어 이 시골 할마씨는 

"암만 생각혀도 니가 여자를 잘못 만나지 않았나 싶다" 

라고 죄 없는 수연이를 탓하기까지 한다. 물론 그럴 때마다 "이제는 답이 없다. 여튼 그 애 붙잡고
살어" 하고 한숨을 쉬며 끊으실 뿐이다. 씁쓸하다.

"에에이 씨발"

다시 벌떡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잡크루트 대신 다시 섯다 페이지로 들어간다.
로그인을 하자 5만 포인트가 채워져있다.

"어? 뭐야?"

놀라는 순간 번쩍이는 배너 하나가 떴다. [ 오늘부터 매일 5만 포인트 쏜다! 돌아온 타짜 이벤트! ]
대박… 얼른 환전해서 미친듯이 달려야지.



"오빠"

늦게까지 계속 게임만 하다 침대에 잠깐 누웠는데 그 사이 잠이 들었고, 수연이가 들어온 모양이다.
나는 흠칫 놀라면서 대답했다.

"어어, 미안. 왔니?"

하지만 수연이는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책상 의자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잠깐
눈치를 보건데 그녀는 차분한 표정이지만…왠지 슬퍼보였다. 

"오빠, 나 사실 고백할 거 있어"

생전에 없는 일이다. 이 분위기 뭐야. 

"뭔데?"

수연은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 회사 선배랑 잤어"

…뭐라고 말을 해야되지. 아니 듣고도 뭔가 머릿 속에서 말이 정리가 안되고 혼란스러웠다. 겨우겨우
한 대답이 겨우 한 마디였다.

"뭐?"

하지만 여전히 수연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나 다른 남자랑 잤다고"

보통 다른 남자들 같았으면 화를 냈을까. 하지만 난 화조차 낼 수 없었다. 그냥 힘이 빠졌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그냥 웃음이 나왔다. 

"그랬구나"

화도, 눈물도, 서러움도, 미움도, 실망도 아니었다. 오히려 굳이 따지자면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겨우…
이별의 명분이 주어졌구나 하는 느낌. 

"그랬어"

나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나의 눈은 수연을 향하지 않았다. 그저 요새 며칠 안 깎은 발톱에 눈이
갔다.

'발톱이 기네'

그리고 그때 수연이 또 말했다.

"화 안나?"

화… 글쎄. 난다고 해야되나. 귓방망이라도 올려붙여야 하나. 아니 그보다 그저 궁금했다.

"언제 잔거야? 선배라고 했지? 어떤 사람이야? 어디서?"

내 질문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조금 화가 났다. 하지만 콧방귀 정도였다. 다시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그리 화는 안 났다고 생각하는데, 모진 말들은 미친듯이 떠올랐다. 그녀와 나 사이를 확
끝내버릴 온갖 쌍욕이 다 생각났다. 하지만 참았다. 그리고 겨우 가슴 속의 그 생각들을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돼?"

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볍게 그녀가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궁금했다. 대뜸 갑자기 왜 그런 고백을 했는지.

"고백 안 했으면 몰랐을 일인데 왜 고백한거야? 나랑 헤어지려고? 아니면 죄책감 때문에 말하고 다시
잘 해보려고?"

이번에는 그녀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난 또 허허, 하고 웃었다. 그리고 그저 슬리퍼를 신고 다시 옥상으로 향했다. 문은 닫지 않았다. 아니,
닫을 힘이 없었다. 



저어기 골목길 아래 가로등 밑으로 이 시간까지 파지 줍는 할머니가 힘들게 손수레를 끌고 다닌다. 참
후진 동네라서 경쟁도 치열한 터라 한달 내내 해봤자 단돈 몇 만원 못 번다. 더럽고 위헙한 동네다. 못
사는 사람이 많은 동네다. 그래도 어쨌거나 저 할매는 일한다. 나보다는 낫다. 나같은 식충이보다는 
낫다.

그나저나 안되겠지? 사실 난 그냥… 이대로 이렇게 그녀 곁에서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 외로
별로 화가 안 났다. 왜냐하면 당장 어제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하고 바라기까지 했으니까. 그녀가 다른
남자 만나서 떠났으면 했으니까. 그게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만 한다면.

"쩝"

입맛을 다신다. 그보다 그럼 어제의 화해와 어젯 밤의 섹스는 다 뭐야. 나 혼자만의 작은 행복이었나.
머리가 아프다. 그리고 문득 아까 낮에 한 생각이 떠올라 기가 막혔다.

'부부?'

좆까네. 부부는 무슨 씨발…흐흐 씨발. 걍 연애 놀음 한거지. 허송세월 한거지. 그러고보면 엄마 말이  
맞다. 그래,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년을 만난 이후로 내 팔자가 꼬인 거 같다. 좆같이. 애비도 없는 년
하기사 씨발 갈보 년 딸이 갈보 밖에 더 되나. 

'하아…'

답답하다. 가슴이 답답하다. 독하게 마음 먹고 수연이 욕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죄책감이 들었다. 다 나 때문인데. 걔가 잘못한게 아닌데. 수연이가 그럴…

그리고 그 순간 번개같이 내 뇌리를 스쳐가는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게 아니길 바랬다. 차라리 수연이가 정말로 그 남자를 좋아해서 바람 피운 것이길 바랬다. 5층 옥상
에서 미친듯이 뛰어내려와 방문을 활짝 열었다. 방 안에는 수연이가 없었다. 나는 무서운 생각이 또
들었다. 1층으로 미친듯이 뛰어내려갔다. 

"수연아!"

운동부족이다. 고작 계단 몇 층 내려왔다고 숨이 차다. 나는 정신없이 얼빠진 표정으로 큰 길 쪽으로
향했다.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빌었다. 그리고 요 며칠 간 수연이의 행동을 떠올렸다. 이상했나? 글쎄
잘 모르겠다. 요 며칠간 그녀에 대해 별 관심을 안 두었다. 아니 관심은 두지만… 아니아니 그저 눈치
만 살폈을 뿐이다. 그저 눈치만 살폈다. 그녀의 남자친구로서, 배우자로서 살핀 것이 아니라 그녀가 
벌어다주는 돈으로 기생하는 빈대의 눈으로 그녀의 눈치만 살폈다.

그게 아니길 빌었다. 그래, 뭐든 좋다. 설령 그녀가 백번 다른 남자와 잤어도 다 용서한다. 제발 그것
만은 아니길 빌었다. 

"허억…허억…허억…"

그녀가 저 골목 길 앞에 서있었다. 내가 뒤에서 헉헉대며 쫒아오는 것을 깨닫고 그녀가 뒤돌아 보았다.
그리고 난 그녀에게 달려들어 와락 끌어안았다. 

"아니지? 너… 아니지? 이상한거 뭐, 뭐 당하고 뭐 그런거…저기…"

아니 대답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아니었으면 된다. 그거였으면 내가 앞으로 평생동안 정말 내가
그 마음 속 상처 다 나을 때까지 정말로 조심스럽게 다 치료시켜줄거고, 그게 아니라 그저 단순히 바람
피운거면… 그때는 그녀가 원하는대로 해줄 생각이다. 용서해달라면 용서해주고, 떠나가겠다면 보내
줄 생각이다. 그래, 그러면 된다.

그저 난… 

"수연아,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내 가슴이 수연의 눈물로 축축해졌다. 내 헐떡이는 거친 숨은 멈출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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