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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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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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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출퇴근길에 지나게 되는 곳이지만, 직접 걷는 것은 참 간만이다. 노을이 비친 한강은 아름다웠다.

버얼개진 하늘과 온 세상이 주홍빛으로 물드는 가운데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을 가만히 내려다보니 가슴이
차분해지면서 또 한편으로는 어지럽고 울적해졌다.

'하하…'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꼭 무슨 자살이라도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였는지 한 마른 장년의
아저씨가 아래 위로 나를 훑으며 지나간다. 별로 그런 거 아닌데. 찝찝한 마음에 괜히 휴대폰을 들어 카메라
라도 찍는 것처럼 손에 쥐었다.

눈을 들어 저어기 멀리를 바라보았다. 뒤로는 차들이 쌩쌩 달리는 가운데, 시원하다 못해 싸늘한 가을바람이
온 몸을 스쳐갔다. 가슴까지 시려웠다. 저기 멀리는 우뚝 솟은 여의도 건물들이 보이는 가운데, 언젠가 다짐
하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떠올라 우울해졌다.

언젠가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다짐한 패기 넘치던 시절의 유치한 생각들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민망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지 않는가. 멋진 야경을 바라다보며 혼자 생각에 젖어 성공을 다짐하는 장면. 그리고
죽도록 열심히 노력해서 빠른 화면 전개와 함께 어느새 시간이 흘러 멋지게 성공한 미래가 펼쳐지는 뭐 그런
흔한 연출 말이다.

하지만 역시 그건 픽션일 뿐.

난 열심히 뭘 해본 적이 없다. 뭘 어떻게 열심히 해야하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할 기회 같은 것도 온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저 대충 오늘 하루만 좀 무사히 어떻게, 하면서 살았을 뿐이다. 허튼 짓만 열심히 해왔다.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이는 먹고, 모은 돈도 없고, 성공은 커녕 또래만큼도 안 되는 것 같고…아 스스로에게 징징대는 것도 다
질리고 싫다. 그냥 다 답답하고 싫다.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하고 다녔지만 되돌아보면 다 우둔하고 멍청한
짓들 뿐이었다. 나는 등신 바보 천치였다. 죽어도 싼 놈이고, 그저 모두에게 미안한 짓들만 하고 다녔다.

긴 한숨을 내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노을도 거의 지고 밤이 다가오고 있다. 쌔액 쌔액 지나가는
차 소리는 귓가를 스치고 어느새 매연 냄새는 코를 답답하게 한다. 이어폰이라도 있으면 노래를 들으면서
걸을텐데. 그러면 더 우울해지거나 조금은 기분이 나아질텐데. 집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즈음 될 거다.

조금 추웠다. 가디건을 입기는 했지만 그래도 추웠다. 엄마 아빠 생각을 한다. 그저 한없이 평생을 죽도록
일만 하신 분들이라 왠지 불쌍했다. 이유도 없이 눈시울이 붉어진다. 호강시켜 드리고 싶은데. 이 못난 놈
은 허튼 생각이나 하고.

…사실 아까 조금은 허튼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것을 실제 실행까지 옮길 용기도, 그 정도 상태도 아니지만 그냥 문득 그러고 싶었다. 병신처럼.


그냥…기회라도 주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미 주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존재조차 모를 정도로
스쳐지나간 것 같다. 모든 것을 불태워서 혼신을 다하고 그렇게 사그라들고 싶다. 다 관두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불꽃을 태우고 싶었다.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게 바로 그런 '기회'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니 그저 우습고 허무하고 씁쓸했다.

정말로 많은게 갖고 싶었다. 하지만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평범하게라도 잘 살고 싶었다. 아…
아냐아냐, 다 그만하자. 다 귀찮고 다 싫다. 청승 떠는 나 자신이 너무 싫다. 나는 몸을 틀어서 택시를
세웠다.


집으로 돌아왔다. 가벼운 우울증이 온 것 같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샀다. 피우지는 않고 그저 입에 물고
침대에 누웠다. 모든게 다 막막하고 답이 없다.

옛날에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성공이라는게 별 게 아닐 거라고. 어떻게든 머리를 써서, 그리고 그게
좀 운이 좋으면 잘 될 수 있을거라고. 근데 어디 세상 일이 그리 쉬운가.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아니다.
이런 생각 하는 자체가 한심하고 실패하는 길이다. 기운내자. 잘 할 수 있다. 힘내자. 열심히 하자.

그런데 뭘. 뭘 잘하고 뭘 열심히 하고 뭘 힘을 내는데. 뭘, 도대체 뭘. 후우우. 아주 가슴 속에 불덩이가
들어앉은 것 같다. 천장이 낮다. 낮아보인다. 확 내려앉아 그대로 나를 깔아뭉개주면 좋을 것 같다. 눈을
감았다. 졸립다. 피곤했다. 오래 걸어 피곤하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본다. 하아.

주변에 힘 내라고 말해줄 사람은 많다. 아니 많지도 않지만 징징대면 들어줄 사람쯤은 있다. 그런데 뭐
그러면 뭘하는가. 힘도 안 나고, 그 사람 기분만 잡칠텐데. 흐. 참. 이건 뭐 사춘기 중딩도 아니고. 

조용한 방 안에는 냉장고 소리만이 아주 작게, 그리고 점점 크게 내 귀를 신경쓰이게 했다. 예민해진다.
평소에는 들리지도 않는 오만 소리가 내 귓 속을, 내 머리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 이게 다 전부 감정이
예민해지고, 배가 쳐불러서 이러는거다. 다 씨발 다 내가 모자라서 이러는거다. 이게 다… 하아.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싶은건가. 뭘 혼자 이렇게 계속 생각하는건가. 뭘 바라고 삶을 사는건가. 공허하고
이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저 다…

"닥쳐"

방의 불을 껐다. 마음을 비운다. 새하얀 페인트로 내 마음 속의 도화지를 칠해버린다. 머릿 속도 칠해
버린다. 그리고 그 새하얀 페인트 속으로 다이빙을 하고 그렇게 조금씩 이성의 끊을 놓아간다. 그렇게
이 지루하고 우울하고 재미없는 하루를 또 넘긴다.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모든게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정말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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