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일하지. 왜?"
"에이…아쉽다. 아니, 일 안하면 놀러나 갈까 했지"
아쉬워하는 그녀을 위해 또 오늘도 거짓말을 하기로 했습니다다.
"주말 근무 바꾸고 다음 주에 일하지 뭐"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습니다다.
"오빠 솔직히 말해 봐. 회사 짤렸지?"
가슴이 덜컹 내려 앉습니다. 무어라 변명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녀는 마구 쏟아붓습니다.
"전에는 주말 근무 때문에 그토록 뭐라뭐라 하더니 요샌 그냥 뭐 막 바꾸네? 추석 연휴 때도 근무 하루도
안 하고. 솔직히 말해 봐. 빨리. 오빠 짤린거 아냐?"
…다행히 확실히 안 것은 아니고 정황근거를 통해 추측한 말이었습니다. 참 눈치도 빠릅니다. 아니, 그저
내가 말이 안되는 거짓말을 한게 멍청한 거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을까 고민했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뭔 소리야. 그동안 내가 많이 사정도 봐주고 했으니까 좀 이럴 때 써먹는거지"
"회사에 전화 걸어 본다?"
"참나, 해봐라"
피식 웃으면서 애써 거짓말을 했지만 그녀 안에 번진 의심은 지울 길이 없겠지요. 전 표정관리를 열심히
했고 그녀 역시 "몰라, 짤렸으면 짤린거지" 하고 애써 의심을 부정하며 화장실로 향합니다.
'휴우'
침대에 드러눕습니다. 하기사 어차피 이대로 취업 못하면 걸려도 언젠가는 걸릴 거짓말입니다. 근데 저는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씨발…'
가슴이 답답합니다. 아니 그 무엇보다 그녀가 의심을 품은 이상 앞으로 구라치긴 점점 더 어려워지겠지요.
알아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뭐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묻는다고 그렇게 쉽게 대답해주지도 않을테고
그렇게까지 할 애는 아니…
순간 그녀의 친구 중에 우리 회사 다닌다고 했던 지숙이가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나와 같은 본사는 아니고
계열사 계약직 직원이라고 했지만, 통합 사내 전산망에서 사원조회 한 방이면 알아볼 수 있을테니.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어차피 걔랑 잘 연락도 안 하는 것 같던데, 하고 애써 아니길 빌며 저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창문을 열었습니다. 뭐 거짓말…
'털어놓으면 편했을 것을'
그런데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무능해보이는 것도 싫었고, 막막한 재취업 시장을 감안해보면 그녀 역시
마음이 많이 무거워질테니까요. 가뜩이나 맨날 회사 힘들다고 칭얼대는 그녀고, 확 돈 많은 남자한테
취집이나 가야겠다 하는 농담을 입에 달고 사는데 회사 관둔, 아니 짤린 이야기까지 하면 우리 분위기
알만하겠죠. 그나저나 얘는 똥을 싸나. 화장실에서 안 나오네.
TV를 켰습니다. 암담한 방 안 공기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노라니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옵니다. 첫 주제가 중요한데. 마음 졸이며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리노
라니 슥 그녀가 입을 뗍니다.
"배 안 고파?"
"배? 어…고파"
아 옘병. 마음이 위축되서인지 대답이 제깍제깍 안 나오고 한참 조심스럽게 끌다 나옵니다. 뜻밖에 정곡을
찔린 여파입니다. 마음을 모질게 먹기로 했습니다.
'까짓거 씨발, 무슨 회사 짤린게 죄냐?'
우둔하다면 우둔한 이야기죠. 일전에도 언젠가 비슷한 일로 싸운 적이 있었으니까. 그녀는 언젠가 걸려도
걸릴 일인데 왜 진실을 빨리 안 털어놓고 혼자 끙끙 앓다가 그러느냐고. 내가 그렇게 못 미덥냐고. 이러면
내가 오빠를 어떻게 신뢰하겠냐고.
맞는 말이죠. 근데 아주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못 미덥습니다. 내 밑바닥까지 보여주는게 가능한 여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여자가 있는데, 아주 솔직히 말해서 넌 후자니까.
'물론 니가 나쁘다는게 아니야'
그저, 니가 나를 감당 못하고 떠나버릴까 두려운, 니가 영원히 내 곁에 있어줄 거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런
것 뿐이야. 이미 몇 번인가 그랬었고. 동거 7개월차 또 한번의 위기일까.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나, 라면 물을 올리고 서있는 그녀. 이 어색한 공기. 그녀는 분명 뭔가 감을 잡은
것 같습니다. 아 똥싸는 척 하더니 지숙인가 하는 친구랑 카톡이라도 했나. 아니 어차피 걔도 지금은 퇴근
했을 시간인데. 아니다, 어쩌면 아직 안 했을 수도 있겠구나.
"오빠"
"응?"
"나 봐봐"
시선을 맞추고 이야기 하자는 그녀. 착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심상찮음을 느낍니다.
"잠깐…이야기 좀 해"
라면 물을 올려놓은 전기렌지의 불을 끈 그녀. 무겁게 가라앉은 방 안의 분위기. 전 애써 허세를 떨어봅니다.
"갑자기 분위기 왜 이래?"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툭 던진 그 말. 하지만 그 말은 독이었습니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그녀는 그냥 성큼성큼
옷장 쪽으로 가서 캐리어를 꺼내듭니다.
"뭐하는거야"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하는 나. 그녀가 몇 번이나 관두자면서 싸울 때마다 하던
클리셰적인 행동. 너무나 싫은 저 행동. 그래, 나는 이래서 널 못 믿는거야.
"오빠는 거짓말쟁이야"
흐, 맞구만. 좆같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어. 항상. 아주 단 한번을 틀리는 적이 없어. 개좆같은 개씹발. 니미
좆씨발.
"방금 지숙이한테 카톡으로 물어봤어. 오빠… 왜 뻔한 거짓말을 해? 왜? 알아보면 바로 털릴 거짓말을?"
전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니가 이럴까봐서. 회사 짤렸다는 진실을 감당 못하고 니가 날 떠날까 봐"
내 말에 그녀는 울컥하며 눈물까지 보이고는 말했습니다.
"나는, 오빠가 회사를 관둬서가 아니라, 나한테 두달간이나 감쪽같이 속인게 싫어서 관두자는거야"
그래. 전 아무 말도 안 하고, 이번에는 그녀가 짐을 싸는 것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다 내 잘못입니다.
다 잘못입니다. 그냥 다 귀찮고, 짜증이 납니다. 저 자신이요.
차라리 짤렸을 때 속 시원히 말했다면…아니아니. 아예 안 짤렸다면? 좀 더 열심히 일하고, 좀 더 알랑방귀
뀌면서 눈치 좀 봤더라면? 그랬더라면, 아니 애시당초 그 좆같은 회사로 이직한 것부터가 만악의 근원이지.
하아. 씨팔.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거야. 다 귀찮고 머리가 아팠습니다.
'그래, 차라리 떠나라. 갈라서자'
이 지랄 하는 것도 귀찮습니다. 가방 싸는 여자, 막는 남자, 문 앞에서 실랑이, 택시 타고 떠나는 여자,
고뇌하는 남자, 괴로워하다 시간이 흘러 연락하는 남자, 한동안의 냉각기를 거쳐… 아, 좆같은 씨발.
다 피곤하고 귀찮다. 그래, 어차피 너랑 나랑은 안 맞아. 다 관두자. 다 포기할께. 좋은 남자 만나서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 다 싫어. 다…
분한 마음, 서러운 마음에 그만 나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바보같이 눈물을 보이곤, 그 눈물을 손목으로
훔치며 침대에 다시 주저 앉았습니다. 이거 봐. 어찌됐던 내가 직장을 잃으니까 너도 떠나잖아. 혼자 헛
웃음이 나왔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입에는 웃음이. 아주 병신같은 모습입니다. 무슨 미친 사람 같네요.
그녀도 놀랬던지 짐싸던 손을 멈추고 저를 쳐다봅니다. 민망하고, 무안하고…서러웠습니다.
"그래, 내가 이런 새끼야. 못난 새끼라고. 솔직하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고. 찌질한 새끼야"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리고는 짐을 싸던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니가 도와주면 좋겠어. 내 옆에서, 나 좀…"
"나도 힘들어…"
그래…
힘들겠지. 알지. 너 많이 힘든거. 근데 내 손 한번 먼저 잡아주고 힘들다고 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래.
우리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물론 니 마음 알지. 미래도 없는 남친 새끼랑 몸 섞으며 살고 있는데 이제
그 새끼는 또 칠칠맞게 회사에서도 짤리고 그 사실은 또 병신같이 숨기고, 찌질하게 궁상떨고…얼마나
싫겠니.
근데 그게 나야.
그런 나를 좀… 에이 아니다. 그래, 똑똑하게 처신해라. 나 같은 새끼 버리고 가라. 이제는 연락 안할께.
이제는 니가 먼저 연락해도 모르는 척 할께. 잘가라.
…마음을 독하게 먹었습니다. 니가 오늘 짐을 싸서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는, 절대로, 영원히 너를 보지
않을 것이라 마음 먹었습니다. 그건 나를 위한게 아니라 너를 위한거니까. 그게… 내가 너를 좋아한만큼
너한테 해줄 수 없는 유일한 거니까.
열어둔 창문 틈으로 싸늘한, 아니 시원한 바람이 한줄기 들어왔습니다. 가슴을 시렵게 합니다. 모든게 다
허무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떠날까? 다시 우리 보지 말까?"
그녀의 말. 아니지… 니가 떠나길 왜 떠나… 말했잖아.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근데…
"아니…"
내 입에서 흘러나온 건 겨우 그 한 마디. 모질게 마음 먹고 혼자 그토록 다짐을 해도 끝내 그녀를 붙잡는
바보같은 나.
"어휴"
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쉬는 그녀. 머리를 쓸어올리는 그녀, 입맛을 다시는 나.
"라면 물 다시 올릴께"
내 말에 허탈하게 웃는 그녀. 울적한 나.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이대로 넘길지라도, 내일 머릿 속이 복잡해
질 그녀가 또 언제 훌쩍 떠나버릴지. 어쩌면 저는 그 날을 기다리고만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날이야말로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날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녀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무능한 저 자신이…정말이지 죽도록 밉고 싫습니다.
"에이…아쉽다. 아니, 일 안하면 놀러나 갈까 했지"
아쉬워하는 그녀을 위해 또 오늘도 거짓말을 하기로 했습니다다.
"주말 근무 바꾸고 다음 주에 일하지 뭐"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습니다다.
"오빠 솔직히 말해 봐. 회사 짤렸지?"
가슴이 덜컹 내려 앉습니다. 무어라 변명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녀는 마구 쏟아붓습니다.
"전에는 주말 근무 때문에 그토록 뭐라뭐라 하더니 요샌 그냥 뭐 막 바꾸네? 추석 연휴 때도 근무 하루도
안 하고. 솔직히 말해 봐. 빨리. 오빠 짤린거 아냐?"
…다행히 확실히 안 것은 아니고 정황근거를 통해 추측한 말이었습니다. 참 눈치도 빠릅니다. 아니, 그저
내가 말이 안되는 거짓말을 한게 멍청한 거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을까 고민했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뭔 소리야. 그동안 내가 많이 사정도 봐주고 했으니까 좀 이럴 때 써먹는거지"
"회사에 전화 걸어 본다?"
"참나, 해봐라"
피식 웃으면서 애써 거짓말을 했지만 그녀 안에 번진 의심은 지울 길이 없겠지요. 전 표정관리를 열심히
했고 그녀 역시 "몰라, 짤렸으면 짤린거지" 하고 애써 의심을 부정하며 화장실로 향합니다.
'휴우'
침대에 드러눕습니다. 하기사 어차피 이대로 취업 못하면 걸려도 언젠가는 걸릴 거짓말입니다. 근데 저는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씨발…'
가슴이 답답합니다. 아니 그 무엇보다 그녀가 의심을 품은 이상 앞으로 구라치긴 점점 더 어려워지겠지요.
알아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뭐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묻는다고 그렇게 쉽게 대답해주지도 않을테고
그렇게까지 할 애는 아니…
순간 그녀의 친구 중에 우리 회사 다닌다고 했던 지숙이가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나와 같은 본사는 아니고
계열사 계약직 직원이라고 했지만, 통합 사내 전산망에서 사원조회 한 방이면 알아볼 수 있을테니.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어차피 걔랑 잘 연락도 안 하는 것 같던데, 하고 애써 아니길 빌며 저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창문을 열었습니다. 뭐 거짓말…
'털어놓으면 편했을 것을'
그런데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무능해보이는 것도 싫었고, 막막한 재취업 시장을 감안해보면 그녀 역시
마음이 많이 무거워질테니까요. 가뜩이나 맨날 회사 힘들다고 칭얼대는 그녀고, 확 돈 많은 남자한테
취집이나 가야겠다 하는 농담을 입에 달고 사는데 회사 관둔, 아니 짤린 이야기까지 하면 우리 분위기
알만하겠죠. 그나저나 얘는 똥을 싸나. 화장실에서 안 나오네.
TV를 켰습니다. 암담한 방 안 공기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노라니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옵니다. 첫 주제가 중요한데. 마음 졸이며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리노
라니 슥 그녀가 입을 뗍니다.
"배 안 고파?"
"배? 어…고파"
아 옘병. 마음이 위축되서인지 대답이 제깍제깍 안 나오고 한참 조심스럽게 끌다 나옵니다. 뜻밖에 정곡을
찔린 여파입니다. 마음을 모질게 먹기로 했습니다.
'까짓거 씨발, 무슨 회사 짤린게 죄냐?'
우둔하다면 우둔한 이야기죠. 일전에도 언젠가 비슷한 일로 싸운 적이 있었으니까. 그녀는 언젠가 걸려도
걸릴 일인데 왜 진실을 빨리 안 털어놓고 혼자 끙끙 앓다가 그러느냐고. 내가 그렇게 못 미덥냐고. 이러면
내가 오빠를 어떻게 신뢰하겠냐고.
맞는 말이죠. 근데 아주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못 미덥습니다. 내 밑바닥까지 보여주는게 가능한 여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여자가 있는데, 아주 솔직히 말해서 넌 후자니까.
'물론 니가 나쁘다는게 아니야'
그저, 니가 나를 감당 못하고 떠나버릴까 두려운, 니가 영원히 내 곁에 있어줄 거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런
것 뿐이야. 이미 몇 번인가 그랬었고. 동거 7개월차 또 한번의 위기일까.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나, 라면 물을 올리고 서있는 그녀. 이 어색한 공기. 그녀는 분명 뭔가 감을 잡은
것 같습니다. 아 똥싸는 척 하더니 지숙인가 하는 친구랑 카톡이라도 했나. 아니 어차피 걔도 지금은 퇴근
했을 시간인데. 아니다, 어쩌면 아직 안 했을 수도 있겠구나.
"오빠"
"응?"
"나 봐봐"
시선을 맞추고 이야기 하자는 그녀. 착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심상찮음을 느낍니다.
"잠깐…이야기 좀 해"
라면 물을 올려놓은 전기렌지의 불을 끈 그녀. 무겁게 가라앉은 방 안의 분위기. 전 애써 허세를 떨어봅니다.
"갑자기 분위기 왜 이래?"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툭 던진 그 말. 하지만 그 말은 독이었습니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그녀는 그냥 성큼성큼
옷장 쪽으로 가서 캐리어를 꺼내듭니다.
"뭐하는거야"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하는 나. 그녀가 몇 번이나 관두자면서 싸울 때마다 하던
클리셰적인 행동. 너무나 싫은 저 행동. 그래, 나는 이래서 널 못 믿는거야.
"오빠는 거짓말쟁이야"
흐, 맞구만. 좆같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어. 항상. 아주 단 한번을 틀리는 적이 없어. 개좆같은 개씹발. 니미
좆씨발.
"방금 지숙이한테 카톡으로 물어봤어. 오빠… 왜 뻔한 거짓말을 해? 왜? 알아보면 바로 털릴 거짓말을?"
전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니가 이럴까봐서. 회사 짤렸다는 진실을 감당 못하고 니가 날 떠날까 봐"
내 말에 그녀는 울컥하며 눈물까지 보이고는 말했습니다.
"나는, 오빠가 회사를 관둬서가 아니라, 나한테 두달간이나 감쪽같이 속인게 싫어서 관두자는거야"
그래. 전 아무 말도 안 하고, 이번에는 그녀가 짐을 싸는 것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다 내 잘못입니다.
다 잘못입니다. 그냥 다 귀찮고, 짜증이 납니다. 저 자신이요.
차라리 짤렸을 때 속 시원히 말했다면…아니아니. 아예 안 짤렸다면? 좀 더 열심히 일하고, 좀 더 알랑방귀
뀌면서 눈치 좀 봤더라면? 그랬더라면, 아니 애시당초 그 좆같은 회사로 이직한 것부터가 만악의 근원이지.
하아. 씨팔.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거야. 다 귀찮고 머리가 아팠습니다.
'그래, 차라리 떠나라. 갈라서자'
이 지랄 하는 것도 귀찮습니다. 가방 싸는 여자, 막는 남자, 문 앞에서 실랑이, 택시 타고 떠나는 여자,
고뇌하는 남자, 괴로워하다 시간이 흘러 연락하는 남자, 한동안의 냉각기를 거쳐… 아, 좆같은 씨발.
다 피곤하고 귀찮다. 그래, 어차피 너랑 나랑은 안 맞아. 다 관두자. 다 포기할께. 좋은 남자 만나서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 다 싫어. 다…
분한 마음, 서러운 마음에 그만 나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바보같이 눈물을 보이곤, 그 눈물을 손목으로
훔치며 침대에 다시 주저 앉았습니다. 이거 봐. 어찌됐던 내가 직장을 잃으니까 너도 떠나잖아. 혼자 헛
웃음이 나왔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입에는 웃음이. 아주 병신같은 모습입니다. 무슨 미친 사람 같네요.
그녀도 놀랬던지 짐싸던 손을 멈추고 저를 쳐다봅니다. 민망하고, 무안하고…서러웠습니다.
"그래, 내가 이런 새끼야. 못난 새끼라고. 솔직하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고. 찌질한 새끼야"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리고는 짐을 싸던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니가 도와주면 좋겠어. 내 옆에서, 나 좀…"
"나도 힘들어…"
그래…
힘들겠지. 알지. 너 많이 힘든거. 근데 내 손 한번 먼저 잡아주고 힘들다고 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래.
우리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물론 니 마음 알지. 미래도 없는 남친 새끼랑 몸 섞으며 살고 있는데 이제
그 새끼는 또 칠칠맞게 회사에서도 짤리고 그 사실은 또 병신같이 숨기고, 찌질하게 궁상떨고…얼마나
싫겠니.
근데 그게 나야.
그런 나를 좀… 에이 아니다. 그래, 똑똑하게 처신해라. 나 같은 새끼 버리고 가라. 이제는 연락 안할께.
이제는 니가 먼저 연락해도 모르는 척 할께. 잘가라.
…마음을 독하게 먹었습니다. 니가 오늘 짐을 싸서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는, 절대로, 영원히 너를 보지
않을 것이라 마음 먹었습니다. 그건 나를 위한게 아니라 너를 위한거니까. 그게… 내가 너를 좋아한만큼
너한테 해줄 수 없는 유일한 거니까.
열어둔 창문 틈으로 싸늘한, 아니 시원한 바람이 한줄기 들어왔습니다. 가슴을 시렵게 합니다. 모든게 다
허무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떠날까? 다시 우리 보지 말까?"
그녀의 말. 아니지… 니가 떠나길 왜 떠나… 말했잖아.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근데…
"아니…"
내 입에서 흘러나온 건 겨우 그 한 마디. 모질게 마음 먹고 혼자 그토록 다짐을 해도 끝내 그녀를 붙잡는
바보같은 나.
"어휴"
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쉬는 그녀. 머리를 쓸어올리는 그녀, 입맛을 다시는 나.
"라면 물 다시 올릴께"
내 말에 허탈하게 웃는 그녀. 울적한 나.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이대로 넘길지라도, 내일 머릿 속이 복잡해
질 그녀가 또 언제 훌쩍 떠나버릴지. 어쩌면 저는 그 날을 기다리고만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날이야말로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날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녀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무능한 저 자신이…정말이지 죽도록 밉고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