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쯤에 들어갔다니까. 회식자리가 3차까지 갔다고"
"그런데 왜 전화를 꺼놨는데"
"폰 배터리 다 됐다고 몇 번을 말해. 그리고 술 많이 마셔서 집에 가자마자 거의 쓰러지듯 잤다니까"
희주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남친 현수에 대해 서운한 마음과 치솟는 짜증을 억누르며 겨우 대답하고 있었다.
3일만에 보는 남친이지만, 영화고 뭐고 당장이라도 그냥 집에 돌아가서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다 들
정도로. 가뜩이나 요즘 회사에서도 피곤한데 남친까지 이런 시시한 일로 피곤하게 하니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희주는 또 무어라 따지려 드는 남친의 말을 가로막았다.
"됐어, 그렇게 나 못 믿으면 다 관두던지"
희주의 뜻밖의 말에 그녀의 남친 현수는 조금 충격을 먹은 듯 했고, 자기가 너무 계속 다그쳤다 싶었는지 그제
서야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뒤늦게 이해하는 듯 "알았다, 그만하자. 영화나 보러가자" 라며 말싸움을 관두려
했다. 하지만 희주는 이미 단단히 토라진 상태였다.
"됐어, 나 그냥 집에 갈거야. 영화는 혼자 보던지 말던지"
집으로 돌아와서도 너무 짜증나고 피곤해서 오히려 잠이 안 오는 바람에 희주는 지끈지끈 핑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이나 고생하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그리고 채 3시간도 자지 못하고 몸살이라도
날 것 같은 몸으로 겨우 깨어났다.
"흐으…"
너무 힘들었다. 몸이 천근만근, 심지어 열도 조금 있었다. 자꾸 전화를 해대는 통에 또 밤새 꺼놓았던 휴대폰
에는 현수의 [ 미안해 ] 하는 카톡이 몇 통이나 와있었지만 그냥 답장을 하지 않기로 했다. 씻고 옷 입고 대충
화장하고 출근준비를 겨우 마쳤지만 막상 출근하려니 너무 힘들었다. 아프다고 하고 쉴까, 하고 고민하며
멍하니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아 한숨만 쉬다가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버스를 타려다가 그냥 택시를 타기로 했다. 목구멍도 따끔따끔하니 아팠다. 정말 몸살이라도 오려는 것일까.
그냥 모든 것이 다 짜증났다.
"언니, 어디 아파요?"
같은 팀 막내 은지는 그녀를 보자마자 놀라며 물었고, 희주는 어색한 표정으로 "왜? 나 아파보여?" 하고 묻자
은지는 "네, 얼굴도 빨갛고 퉁퉁 부었어요. 어디 아파요? 어머, 열도 장난 아니네?" 하며 그녀의 가방을 거의
뺏듯이 들었고, 희주는 겨우 자리로 가서 PC를 켜고 출근부 체크를 했다.
"어디 몸살이라도 났어요?"
역시 같은 팀 태준 대리가 은지의 말을 듣고 슥 돌아본다. 그러더니 슥 이마에 손을 대보곤 "몸살났나보네요"
하고는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요. 괜히 그러다가 쓰러지겠네. 약 좀 사다줘요?" 하고 물었다.
"괜찮아요"
희주는 고개를 저었다. 은지와 태주는 그런 희주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의 비몽사몽, 중간에 어지러워 잠깐 눈을 붙여가면서까지 겨우 점심시간까지 버텼다.
"나 안 먹을래"
"아픈데 먹을거라도 잘 먹어야지"
"괜찮아요, 드시고 오세요"
"언니, 그럼 내가 뭐 사다줄까요?"
"아냐 괜찮아"
팀원들은 걱정을 해주면서 점심을 먹으러 우르르 나갔다. 이윽고 다른 팀도 점심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웠고,
혼자 사무실에 남은 희주는 그대로 엎드려 눈을 감았다.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다. 그 와중에 꼬르륵, 하며 민망
하게 배가 허전함을 호소했지만 그녀는 배고픔을 애써 무시했다. 배고픔보다 현기증과 열이 더 힘들었다. 누가
좀 자상하게 돌봐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외로웠다.
"희주씨, 이거 먹어요"
잠에서 깬 그녀에게 태준이 야채 토띠아와 탄산수, 약 봉투를 내밀었다.
"몸 많이 힘들면 일찍 퇴근해요. 팀장님한테는 말해놨으니까"
"아니 괜찮아요. 그리고 이건, 잘 먹을께요"
"네, 빨리 나으세요"
태준은 그렇게 말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다가온 은지가 희주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언니 내가 어깨 주물러줄까요?"
"아냐 괜찮아, 정말 괜찮아"
그러자 은지는 다시 희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래도 태준 대리님이 언니 좋아하는거 같아요"
"뭐?"
은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까 점심 먹으러 가서도 언니 아픈거 같다고 계속 대리님이 걱정했거든요. 그래서 영란 언니가 '와 대리님
저번에 나 아플 때는 아무 소리 없더니 희주 대리님 아프다니까 완전 여친처럼 걱정하는 것 좀 봐' 하면서
뭐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얼굴 빨개졌어요. 그리고 그랬는데도 이거 사온 거에요. 내가 계산하려는데도
그냥 자기가 결제하고?"
"참…"
희주는 피식 웃었다. 은지는 희주에게 말했다.
"태준 대리님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옷도 잘 입고, 키도 뭐 작진 않고, 스타일 괜찮잖아요. 좀 너무 멋부
리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자상하기도 하고. 언닌 어때요?"
"뭐가 어때"
"아 맞다. 언니 남친 있었지. 아 근데 무슨 남친이 이렇게 존재감이 없어? 아픈데 전화도 안 해줘요?"
희주는 대답 대신 그냥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은지는 "내가 말이 심했나? 언니 미안" 하고 또 씨익 애교미소를
지었다.
"멍청이"
"헤헤, 여튼 언니 빨리 저거 먹고 약 먹어요"
"알았어. 너도 고마워"
이태준. 두달 전쯤 이직해 온 같은 팀의 동갑내기 웹 디자이너다. 원래 패션 업계에서 MD일 하던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쪽 업계에 대한 선입견과는 별개로 사람도 착하고 확실히 은지 말대로 스타일이 좋다. 늘씬하고 탄
탄한 몸에, 옷도 잘 입고… 누나 많은 집에 막내답게 성격도 꽤 자상하다고 하고. 차도 중형차 끌고 다니는 것
보면 집도 잘 사는 것 같다.
'현수는'
역시 동갑내기인 남친 현수를 떠올리면 한숨부터 나온다. 희주는 손에 또띠아만 든채 멍하니 있다가 태준이
"왜 손에 들고 안 먹어요? 기도해요?" 하고 농담을 건내자 그제서야 멋적게 웃고는 "잘 먹을게요" 라며 웃었다.
생각해보니 오늘 처음 웃는 것 같다.
뭘 좀 먹고 약을 먹어서 그런지 오후에는 그럭저럭 버틸만 했다. 열도 내린 듯 하고, 잠깐 팀장님한테 허가를
얻어서 은지, 태준, 영란씨랑 같이 1층의 까페에 내려와 커피를 한잔씩 했다.
"정말? 대리님 막 초식남 그런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 완전 육식남이에요"
"육식남은 또 뭐야"
연애 쉰지 2년이 넘었다는 말에 영란이 초식남이라고 놀리자 태준은 펄쩍 뛰며 부정했다. '육식남'이라는 말에
다들 웃다가 문득 태준이 희주를 향해 물었다.
"그러면 희주 대리님은요? 연애 안 하세요?"
그러자 영란과 은지가 또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웃다가 은지가 말했다.
"언니는 남자친구 있어요"
"아…그래요? 아 있었구나"
태준의 표정에서 역력한 아쉬움을 발견한 영란과 은지는 또 웃다가, 영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대리님, 희주 대리님 좋아해요?"
"뭔 소리야"
희주가 영란을 툭 치며 면박을 주었지만 영란은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태준을 바라보았다. 은지도 마찬가지.
둘 다 눈에 이채를 띄고 있었다. 태준은 당혹스럽다는 듯이 우물쭈물하다가 "아, 뭘 이런 식으로 사람을 고백
하게 만들어?"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에 다들 "어머어머" 하고 웃으며 놀라자 태준은 얼른 "전 우리 팀
여사우들 다 너무너무 사랑해요" 하고 얼버무렸지만, 분명 그 전의 한 마디에서 모두 진심을 느꼈다.
"언니, 가요"
"그래, 저 그러면 먼저 일어나볼께요"
"네에, 그럼 잘 들어가세요. 아프면 내일은 쉬어요"
"다 나았어요"
인사하는 희주에게 또 자상하게 한 마디 건내는 태준. 그리고 옆에 있다가 "누가 보면 태준 대리님이 팀장님
인 줄 알겠네" 하고 한 마디 하는 영란. 태준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다가 영란에게 "앞으로 영란씨도 아프면
꼭 잘 챙겨줄께요. 너무 서운해말아요. 아 왤케 사람 민망하게 해요" 하고 농담을 건냈다.
사무실을 빠져나와 걷는 은지와 희주. 몇 번이고 몸 상태를 묻는 은지. 그리고 울리지 않는 휴대폰.
"언니 혹시 아픈거 남친님 땜에 그래요?"
"아냐"
"그럼 남친님이랑 싸웠어요?"
"아니야. 그냥 요즘 좀 바빠"
희주는 '남친님'이라는 은지의 표현이 재밌다고 생각하며, 어쨌거나 바빠서 그런 거라고 둘러냈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요즘 현수는 툭하면 야근으로 바쁘다.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읽었는지 얼른
은지는 "언니, 우리 맛있는거 먹으러 갈래요? 저번에 먹으려고 했던 거 있잖아요. 그, 해물요리 전문점" 하고
말을 돌렸지만 희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 그냥 집에 가서 쉴래. 나 택시 타고 갈건데, 태워줄까?"
"그래요 언니, 집에 가서 쉬세요. 전 그냥 버스 타고 갈께요. 어차피 나 태워다주고 가면 언니 빙 돌아가야
되는데. 괜찮아요"
"알았어, 그럼 잘 들어가"
"네, 그럼 집에 가서 푹 쉬세요 언니"
은지랑 헤어지고 큰 길 쪽으로 가서 택시를 기다린다. 여전히 휴대폰을 만지작 거렸지만 전화는 걸려 올 줄을
모른다. 사귄지 3년, 익숙해짐도 익숙해짐이지만 점점 현수의 애정이 식어가는 것이 역력히 느껴져서 희주는
갈수록 생각이 많다. 물론, 그에 대한 희주의 애정 역시 예전같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후우'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빈 택시가 없다. 차도 막힐텐데. 그냥 버스를 타고 가야하나? 고민하노라니 문득 전화
가 울린다. 현수인가? 싶어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뜻밖에 태준이었다. 왠일인가 싶어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희주 대리님, 저 태준인데요"
"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아니 뭘 새삼스럽게 인사까지. 아, 별 건 아니고 지금 저 퇴근하려고 보니까 책상에 대리님
지갑을 두고 가신거 같길래. 혹시나 해서요"
지갑? 희주는 서둘러 가방을 열어보았지만 역시나 지갑이 없었다. 언제 빼놓은거지? 아… 희주는 아까 조은
상사 쪽 담당자 명함을 찾느라고 뒤지다가 지갑을 꺼낸 것을 기억해냈다.
"아 그러네요, 전화해주셔서 감사해요. 지금 사무실로 다시 갈께요"
다시 사무실까지 가자니 귀찮기도 하고 짜증이 치솟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수중에 천원짜리 하나 없는데.
하지만 태준은 "저 지금 퇴근하는 길이니까 가져다 드릴께요. 어디 쪽이세요?" 하고 물었다.
"여기, 큰 길 쪽인데, 그, 사거리 쪽이요"
"아 그럼 금방 갈께요. 그럼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세요"
"네에, 아 정말 감사해요 대리님"
"뭘요,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화를 끊고나니 다행이다 싶었다. 만약 아까 택시라도 탔더라면 내릴 때 얼마나 난감했겠는가. 앞으로
가방에 만원짜리라도 하나 넣어놔야겠다 생각하며 그녀는 횡단보도 앞에서 태준을 기다렸다. 그리고
언제오나, 빼꼼히 기다리노라니 문득 자기 앞에 흰색 SN5 한 대가 섰다. 태준이었다.
"대리님, 타세요. 태워다 드릴께요"
"아, 괜찮아요"
"타세요, 괜히 몸도 안 좋으신데"
태준의 선의에 희주는 선선히 차에 올랐다.
"…장난 아니었거든요. 거긴 완전 군대 식으로 돌아가요. 업무량도 엄청나고, 실수라도 하나 하면 막 정말 위
에서 장난 아니게 뭐라고 하니까, 다 1년도 못 버티고 나가는 편이에요. 여기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다들
착하고, 예쁘시고"
태준이 전에 일하던 직장은 분위기가 여기완 아예 다르다고. 여기도 사실 그리 널널한 분위기만은 아니지만.
"그나저나 대리님은 집에 가면 뭐하세요?"
"그냥…뭐, 방 좀 치우고, 밥 먹고, 씻고…"
희주는 왠지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일상이 너무 단조롭고 허무하다고 싶어 순간 조금 부끄러웠지만, 굳이
포장할 말도 없었다.
"딱히 오늘 남친 분이랑 데이트 약속 없으시면, 같이 저녁 안 드실래요? 저기 고개 넘어가는 길에 괜찮은
가게 한군데 아는데. 새로 생긴 비건 레스토랑인데, 단호박 찜 같은거 되게 맛있거든요. 몸에도 좋고"
조금 부담스러운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어차피 딱히 약속도 없고 아까보다 몸도 많이 나아져서 희주는
태준의 제안을 승락했다.
"맛있죠?"
"네, 맛있어요. 그런데 대리님 이런 데 잘 아세요? 맛집 같은거"
"잘 아는건 아니고, 예전에 한참 이런 거에 꽂혔거든요. 맛집 같은거 막 주말마다 찾아다니고…"
"정말 대리님 초식남 맞네요"
"육식남이라니까"
"당장 여기부터가 채식주의 식당이잖아요"
희주의 말에 태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럼 잡식남이라고 해두죠 뭐" 하고 또 웃었다. 그 상쾌한 웃음을 보며,
희주는 왠지 요즘 일에 치여 표정이 항상 어두운 현수를 떠올렸다. 희주는 태준의 말에 웃어주었다.
"희주 대리님은 지금 남자친구 분이랑 얼마나 사귀셨어요?"
"3년, 조금 안 되었어요"
"아 오래 사귀셨구나. 그럼 결혼 같은 건 준비 안 하세요?"
결혼…
"뭐, 그냥, 아직은"
희주는 무어라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음으로 질문을 넘겼다. 언제부턴가 희주와 현수 둘 다, '결혼'에 대해선
금기어처럼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그래, 아마 그 언젠가부터가… 예전같지 않은 지금의 시초였으
리라.
그리고 문득 거기까지 이야기가 나오자 식욕이 새삼 사라졌다. 레스토랑은 엄청 맛있었지만. 다음에 현수와
함께 와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잠깐 그 근처 까페에서 20분 정도 커피를 마시다가 일어섰다.
"어이쿠, 제가 아픈 분 붙잡고 너무 오래 시간을 뺏었네요. 집에 가서 저 욕하는거 아니시죠?"
집까지 차로 바래다 준 태준의 너스레에 희주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저녁 정말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그럼 내일 봐요"
"네, 그럼 들어가서 푹 쉬세요"
차에서 내려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다 희주는 집으로 들어왔다. 8시 50분. 가방을
내려놓고 이제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간 순간, 누군가가 문을 쿵쿵쿵 두드렸다.
"누구세요?"
"나야"
현수였다. 하루종일 전화 한 통 없더니, 왠일로 집에 다 왔나 싶어 문을 열어주니 잔뜩 골이 난 표정이었다.
어제의 싸움을 다시 하기라도 하겠다는 그 표정을 보자마자 짜증을 느꼈다.
"왠일이야?"
"왠일?"
현수는 마치 기가 막히다는 듯 픽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포장 박스를 거의 내팽겨치듯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문 앞에 서서 물었다.
"방금 너 태워다 준 그 사람 뭐냐?"
그 말을 듣는 순간 희주는 현수가 오해를 했구나, 하고 단박에 깨달았지만 연 이틀 의심병에 미친 사람처럼
이렇게 쪼아대니 미칠 것만 같았다.
"뭐냐니, 회사 사람이야"
"회사 사람? 그제도 회식, 오늘도 회식이냐? 너 솔직히 말해 저 사람 누구야"
"그게 아니라…"
무어라 변명을 하려했지만, 희주는 그저 지금 상황 자체가 너무 확 짜증이 났다. 자기를 오해하는 현수가
너무나 서운했다. 갑자기 어젯 밤부터 아프고 힘들었던 생각이 나 억울한 마음에 눈물부터 샘솟았다.
"그게 아니라… 오늘 나, 아프다고 회사 사람이 그냥 태워다 준거야. 너 자꾸 왜 이래… 나 그렇잖아도
요새 아프고 힘들어 죽겠는데"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슥 손으로 훔치고 희주는 현수에게 말했다. 희주가 눈물까지 흘리자 조금 당황
했는지 현수는 그제서야 문을 닫고 들어와 물었다.
"어디 아픈데"
"됐어… 여자친구가 어디 아프건 말건, 후우, 니가 나를 못 믿는만큼, 나도 이제 널 의지할 수만은 없어"
"야, 너라면 지금 내가… 후우, 알았다. 미안해"
곧바로 현수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듯 미안하다는 말을 꺼냈지만, 너무 쉽게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는
그것도 싫었고, 연 이틀 연속으로 다짜고짜 따지고 드는 남친이 정말 너무 싫었다.
"가, 나 이제 씻고 잘거야"
현수는 잠시 말을 못 잇고 한숨을 쉬다가 "알았다. 미안해. 그리고 저거, 저번에 니가 백화점에서…"
하고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희주는 그 말을 잘랐다.
"필요없어, 가져가"
희주는 그대로 무시하고는 현수를 마치 없는 사람인 양 그 앞에서 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섰다. 현수는
당혹스러운 듯 서있다가, "그래, 후우, 쉬어라" 하고 그 선물 꾸러미를 두고 집을 나섰다. 자동문이 잠기고
희주는 화장실 변기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 속 괜찮으세요? 전 아까 너무 급하게 먹어선지 배탈이 났네요ㅜㅜ 혹시 뭐 음식에 문제 있었나 싶어
걱정스러워서 그런데, 대리님은 속 괜찮으세요? ]
누워 한참 잠에 들락말락 하는데 카톡이 왔다. 태준이었다. 후우. 진이 다 빠진 터에 만사가 귀찮았지만
또 저녁 사준 사람이 그렇게 걱정해주는데 모른 척 할 수도 없어
[ 아니요 전 괜찮아요. 대리님 어쩐지 아까 좀 급하게 드신다 했어요. ㅜㅜ 소화제 드시고 빨리 나으세요 ]
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곧이어
[ 다행이네요. 네, 그럼 쉬세요. 혹시 저 내일 출근 못하면 변기에 빠져 죽은 줄 아시구요 ]
하고 그의 답장이 왔다. 무어라 답장을 할지 조금 고민하다가
[ 네, 빨리 나으시고 내일 건강한 얼굴로 뵈어요 ]
하는 재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치웠다. 피곤하다. 남자고 뭐고 다 짜증만 난다.
희주는 길게 한숨을 쉬고,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이제 겨우 9시 50분. 피곤하지만 또 잠은 오지 않는다. 그저
뒷목만 아프고 머리만 윙윙 울린다.
현수도 짜증나고, 다 짜증만 난다. 그냥 이대로 어디론가 휙 사라져버리고만 싶다.
"그런데 왜 전화를 꺼놨는데"
"폰 배터리 다 됐다고 몇 번을 말해. 그리고 술 많이 마셔서 집에 가자마자 거의 쓰러지듯 잤다니까"
희주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남친 현수에 대해 서운한 마음과 치솟는 짜증을 억누르며 겨우 대답하고 있었다.
3일만에 보는 남친이지만, 영화고 뭐고 당장이라도 그냥 집에 돌아가서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다 들
정도로. 가뜩이나 요즘 회사에서도 피곤한데 남친까지 이런 시시한 일로 피곤하게 하니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희주는 또 무어라 따지려 드는 남친의 말을 가로막았다.
"됐어, 그렇게 나 못 믿으면 다 관두던지"
희주의 뜻밖의 말에 그녀의 남친 현수는 조금 충격을 먹은 듯 했고, 자기가 너무 계속 다그쳤다 싶었는지 그제
서야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뒤늦게 이해하는 듯 "알았다, 그만하자. 영화나 보러가자" 라며 말싸움을 관두려
했다. 하지만 희주는 이미 단단히 토라진 상태였다.
"됐어, 나 그냥 집에 갈거야. 영화는 혼자 보던지 말던지"
집으로 돌아와서도 너무 짜증나고 피곤해서 오히려 잠이 안 오는 바람에 희주는 지끈지끈 핑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이나 고생하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그리고 채 3시간도 자지 못하고 몸살이라도
날 것 같은 몸으로 겨우 깨어났다.
"흐으…"
너무 힘들었다. 몸이 천근만근, 심지어 열도 조금 있었다. 자꾸 전화를 해대는 통에 또 밤새 꺼놓았던 휴대폰
에는 현수의 [ 미안해 ] 하는 카톡이 몇 통이나 와있었지만 그냥 답장을 하지 않기로 했다. 씻고 옷 입고 대충
화장하고 출근준비를 겨우 마쳤지만 막상 출근하려니 너무 힘들었다. 아프다고 하고 쉴까, 하고 고민하며
멍하니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아 한숨만 쉬다가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버스를 타려다가 그냥 택시를 타기로 했다. 목구멍도 따끔따끔하니 아팠다. 정말 몸살이라도 오려는 것일까.
그냥 모든 것이 다 짜증났다.
"언니, 어디 아파요?"
같은 팀 막내 은지는 그녀를 보자마자 놀라며 물었고, 희주는 어색한 표정으로 "왜? 나 아파보여?" 하고 묻자
은지는 "네, 얼굴도 빨갛고 퉁퉁 부었어요. 어디 아파요? 어머, 열도 장난 아니네?" 하며 그녀의 가방을 거의
뺏듯이 들었고, 희주는 겨우 자리로 가서 PC를 켜고 출근부 체크를 했다.
"어디 몸살이라도 났어요?"
역시 같은 팀 태준 대리가 은지의 말을 듣고 슥 돌아본다. 그러더니 슥 이마에 손을 대보곤 "몸살났나보네요"
하고는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요. 괜히 그러다가 쓰러지겠네. 약 좀 사다줘요?" 하고 물었다.
"괜찮아요"
희주는 고개를 저었다. 은지와 태주는 그런 희주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의 비몽사몽, 중간에 어지러워 잠깐 눈을 붙여가면서까지 겨우 점심시간까지 버텼다.
"나 안 먹을래"
"아픈데 먹을거라도 잘 먹어야지"
"괜찮아요, 드시고 오세요"
"언니, 그럼 내가 뭐 사다줄까요?"
"아냐 괜찮아"
팀원들은 걱정을 해주면서 점심을 먹으러 우르르 나갔다. 이윽고 다른 팀도 점심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웠고,
혼자 사무실에 남은 희주는 그대로 엎드려 눈을 감았다.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다. 그 와중에 꼬르륵, 하며 민망
하게 배가 허전함을 호소했지만 그녀는 배고픔을 애써 무시했다. 배고픔보다 현기증과 열이 더 힘들었다. 누가
좀 자상하게 돌봐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외로웠다.
"희주씨, 이거 먹어요"
잠에서 깬 그녀에게 태준이 야채 토띠아와 탄산수, 약 봉투를 내밀었다.
"몸 많이 힘들면 일찍 퇴근해요. 팀장님한테는 말해놨으니까"
"아니 괜찮아요. 그리고 이건, 잘 먹을께요"
"네, 빨리 나으세요"
태준은 그렇게 말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다가온 은지가 희주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언니 내가 어깨 주물러줄까요?"
"아냐 괜찮아, 정말 괜찮아"
그러자 은지는 다시 희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래도 태준 대리님이 언니 좋아하는거 같아요"
"뭐?"
은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까 점심 먹으러 가서도 언니 아픈거 같다고 계속 대리님이 걱정했거든요. 그래서 영란 언니가 '와 대리님
저번에 나 아플 때는 아무 소리 없더니 희주 대리님 아프다니까 완전 여친처럼 걱정하는 것 좀 봐' 하면서
뭐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얼굴 빨개졌어요. 그리고 그랬는데도 이거 사온 거에요. 내가 계산하려는데도
그냥 자기가 결제하고?"
"참…"
희주는 피식 웃었다. 은지는 희주에게 말했다.
"태준 대리님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옷도 잘 입고, 키도 뭐 작진 않고, 스타일 괜찮잖아요. 좀 너무 멋부
리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자상하기도 하고. 언닌 어때요?"
"뭐가 어때"
"아 맞다. 언니 남친 있었지. 아 근데 무슨 남친이 이렇게 존재감이 없어? 아픈데 전화도 안 해줘요?"
희주는 대답 대신 그냥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은지는 "내가 말이 심했나? 언니 미안" 하고 또 씨익 애교미소를
지었다.
"멍청이"
"헤헤, 여튼 언니 빨리 저거 먹고 약 먹어요"
"알았어. 너도 고마워"
이태준. 두달 전쯤 이직해 온 같은 팀의 동갑내기 웹 디자이너다. 원래 패션 업계에서 MD일 하던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쪽 업계에 대한 선입견과는 별개로 사람도 착하고 확실히 은지 말대로 스타일이 좋다. 늘씬하고 탄
탄한 몸에, 옷도 잘 입고… 누나 많은 집에 막내답게 성격도 꽤 자상하다고 하고. 차도 중형차 끌고 다니는 것
보면 집도 잘 사는 것 같다.
'현수는'
역시 동갑내기인 남친 현수를 떠올리면 한숨부터 나온다. 희주는 손에 또띠아만 든채 멍하니 있다가 태준이
"왜 손에 들고 안 먹어요? 기도해요?" 하고 농담을 건내자 그제서야 멋적게 웃고는 "잘 먹을게요" 라며 웃었다.
생각해보니 오늘 처음 웃는 것 같다.
뭘 좀 먹고 약을 먹어서 그런지 오후에는 그럭저럭 버틸만 했다. 열도 내린 듯 하고, 잠깐 팀장님한테 허가를
얻어서 은지, 태준, 영란씨랑 같이 1층의 까페에 내려와 커피를 한잔씩 했다.
"정말? 대리님 막 초식남 그런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 완전 육식남이에요"
"육식남은 또 뭐야"
연애 쉰지 2년이 넘었다는 말에 영란이 초식남이라고 놀리자 태준은 펄쩍 뛰며 부정했다. '육식남'이라는 말에
다들 웃다가 문득 태준이 희주를 향해 물었다.
"그러면 희주 대리님은요? 연애 안 하세요?"
그러자 영란과 은지가 또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웃다가 은지가 말했다.
"언니는 남자친구 있어요"
"아…그래요? 아 있었구나"
태준의 표정에서 역력한 아쉬움을 발견한 영란과 은지는 또 웃다가, 영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대리님, 희주 대리님 좋아해요?"
"뭔 소리야"
희주가 영란을 툭 치며 면박을 주었지만 영란은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태준을 바라보았다. 은지도 마찬가지.
둘 다 눈에 이채를 띄고 있었다. 태준은 당혹스럽다는 듯이 우물쭈물하다가 "아, 뭘 이런 식으로 사람을 고백
하게 만들어?"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에 다들 "어머어머" 하고 웃으며 놀라자 태준은 얼른 "전 우리 팀
여사우들 다 너무너무 사랑해요" 하고 얼버무렸지만, 분명 그 전의 한 마디에서 모두 진심을 느꼈다.
"언니, 가요"
"그래, 저 그러면 먼저 일어나볼께요"
"네에, 그럼 잘 들어가세요. 아프면 내일은 쉬어요"
"다 나았어요"
인사하는 희주에게 또 자상하게 한 마디 건내는 태준. 그리고 옆에 있다가 "누가 보면 태준 대리님이 팀장님
인 줄 알겠네" 하고 한 마디 하는 영란. 태준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다가 영란에게 "앞으로 영란씨도 아프면
꼭 잘 챙겨줄께요. 너무 서운해말아요. 아 왤케 사람 민망하게 해요" 하고 농담을 건냈다.
사무실을 빠져나와 걷는 은지와 희주. 몇 번이고 몸 상태를 묻는 은지. 그리고 울리지 않는 휴대폰.
"언니 혹시 아픈거 남친님 땜에 그래요?"
"아냐"
"그럼 남친님이랑 싸웠어요?"
"아니야. 그냥 요즘 좀 바빠"
희주는 '남친님'이라는 은지의 표현이 재밌다고 생각하며, 어쨌거나 바빠서 그런 거라고 둘러냈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요즘 현수는 툭하면 야근으로 바쁘다.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읽었는지 얼른
은지는 "언니, 우리 맛있는거 먹으러 갈래요? 저번에 먹으려고 했던 거 있잖아요. 그, 해물요리 전문점" 하고
말을 돌렸지만 희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 그냥 집에 가서 쉴래. 나 택시 타고 갈건데, 태워줄까?"
"그래요 언니, 집에 가서 쉬세요. 전 그냥 버스 타고 갈께요. 어차피 나 태워다주고 가면 언니 빙 돌아가야
되는데. 괜찮아요"
"알았어, 그럼 잘 들어가"
"네, 그럼 집에 가서 푹 쉬세요 언니"
은지랑 헤어지고 큰 길 쪽으로 가서 택시를 기다린다. 여전히 휴대폰을 만지작 거렸지만 전화는 걸려 올 줄을
모른다. 사귄지 3년, 익숙해짐도 익숙해짐이지만 점점 현수의 애정이 식어가는 것이 역력히 느껴져서 희주는
갈수록 생각이 많다. 물론, 그에 대한 희주의 애정 역시 예전같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후우'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빈 택시가 없다. 차도 막힐텐데. 그냥 버스를 타고 가야하나? 고민하노라니 문득 전화
가 울린다. 현수인가? 싶어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뜻밖에 태준이었다. 왠일인가 싶어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희주 대리님, 저 태준인데요"
"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아니 뭘 새삼스럽게 인사까지. 아, 별 건 아니고 지금 저 퇴근하려고 보니까 책상에 대리님
지갑을 두고 가신거 같길래. 혹시나 해서요"
지갑? 희주는 서둘러 가방을 열어보았지만 역시나 지갑이 없었다. 언제 빼놓은거지? 아… 희주는 아까 조은
상사 쪽 담당자 명함을 찾느라고 뒤지다가 지갑을 꺼낸 것을 기억해냈다.
"아 그러네요, 전화해주셔서 감사해요. 지금 사무실로 다시 갈께요"
다시 사무실까지 가자니 귀찮기도 하고 짜증이 치솟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수중에 천원짜리 하나 없는데.
하지만 태준은 "저 지금 퇴근하는 길이니까 가져다 드릴께요. 어디 쪽이세요?" 하고 물었다.
"여기, 큰 길 쪽인데, 그, 사거리 쪽이요"
"아 그럼 금방 갈께요. 그럼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세요"
"네에, 아 정말 감사해요 대리님"
"뭘요,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화를 끊고나니 다행이다 싶었다. 만약 아까 택시라도 탔더라면 내릴 때 얼마나 난감했겠는가. 앞으로
가방에 만원짜리라도 하나 넣어놔야겠다 생각하며 그녀는 횡단보도 앞에서 태준을 기다렸다. 그리고
언제오나, 빼꼼히 기다리노라니 문득 자기 앞에 흰색 SN5 한 대가 섰다. 태준이었다.
"대리님, 타세요. 태워다 드릴께요"
"아, 괜찮아요"
"타세요, 괜히 몸도 안 좋으신데"
태준의 선의에 희주는 선선히 차에 올랐다.
"…장난 아니었거든요. 거긴 완전 군대 식으로 돌아가요. 업무량도 엄청나고, 실수라도 하나 하면 막 정말 위
에서 장난 아니게 뭐라고 하니까, 다 1년도 못 버티고 나가는 편이에요. 여기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다들
착하고, 예쁘시고"
태준이 전에 일하던 직장은 분위기가 여기완 아예 다르다고. 여기도 사실 그리 널널한 분위기만은 아니지만.
"그나저나 대리님은 집에 가면 뭐하세요?"
"그냥…뭐, 방 좀 치우고, 밥 먹고, 씻고…"
희주는 왠지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일상이 너무 단조롭고 허무하다고 싶어 순간 조금 부끄러웠지만, 굳이
포장할 말도 없었다.
"딱히 오늘 남친 분이랑 데이트 약속 없으시면, 같이 저녁 안 드실래요? 저기 고개 넘어가는 길에 괜찮은
가게 한군데 아는데. 새로 생긴 비건 레스토랑인데, 단호박 찜 같은거 되게 맛있거든요. 몸에도 좋고"
조금 부담스러운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어차피 딱히 약속도 없고 아까보다 몸도 많이 나아져서 희주는
태준의 제안을 승락했다.
"맛있죠?"
"네, 맛있어요. 그런데 대리님 이런 데 잘 아세요? 맛집 같은거"
"잘 아는건 아니고, 예전에 한참 이런 거에 꽂혔거든요. 맛집 같은거 막 주말마다 찾아다니고…"
"정말 대리님 초식남 맞네요"
"육식남이라니까"
"당장 여기부터가 채식주의 식당이잖아요"
희주의 말에 태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럼 잡식남이라고 해두죠 뭐" 하고 또 웃었다. 그 상쾌한 웃음을 보며,
희주는 왠지 요즘 일에 치여 표정이 항상 어두운 현수를 떠올렸다. 희주는 태준의 말에 웃어주었다.
"희주 대리님은 지금 남자친구 분이랑 얼마나 사귀셨어요?"
"3년, 조금 안 되었어요"
"아 오래 사귀셨구나. 그럼 결혼 같은 건 준비 안 하세요?"
결혼…
"뭐, 그냥, 아직은"
희주는 무어라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음으로 질문을 넘겼다. 언제부턴가 희주와 현수 둘 다, '결혼'에 대해선
금기어처럼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그래, 아마 그 언젠가부터가… 예전같지 않은 지금의 시초였으
리라.
그리고 문득 거기까지 이야기가 나오자 식욕이 새삼 사라졌다. 레스토랑은 엄청 맛있었지만. 다음에 현수와
함께 와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잠깐 그 근처 까페에서 20분 정도 커피를 마시다가 일어섰다.
"어이쿠, 제가 아픈 분 붙잡고 너무 오래 시간을 뺏었네요. 집에 가서 저 욕하는거 아니시죠?"
집까지 차로 바래다 준 태준의 너스레에 희주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저녁 정말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그럼 내일 봐요"
"네, 그럼 들어가서 푹 쉬세요"
차에서 내려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다 희주는 집으로 들어왔다. 8시 50분. 가방을
내려놓고 이제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간 순간, 누군가가 문을 쿵쿵쿵 두드렸다.
"누구세요?"
"나야"
현수였다. 하루종일 전화 한 통 없더니, 왠일로 집에 다 왔나 싶어 문을 열어주니 잔뜩 골이 난 표정이었다.
어제의 싸움을 다시 하기라도 하겠다는 그 표정을 보자마자 짜증을 느꼈다.
"왠일이야?"
"왠일?"
현수는 마치 기가 막히다는 듯 픽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포장 박스를 거의 내팽겨치듯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문 앞에 서서 물었다.
"방금 너 태워다 준 그 사람 뭐냐?"
그 말을 듣는 순간 희주는 현수가 오해를 했구나, 하고 단박에 깨달았지만 연 이틀 의심병에 미친 사람처럼
이렇게 쪼아대니 미칠 것만 같았다.
"뭐냐니, 회사 사람이야"
"회사 사람? 그제도 회식, 오늘도 회식이냐? 너 솔직히 말해 저 사람 누구야"
"그게 아니라…"
무어라 변명을 하려했지만, 희주는 그저 지금 상황 자체가 너무 확 짜증이 났다. 자기를 오해하는 현수가
너무나 서운했다. 갑자기 어젯 밤부터 아프고 힘들었던 생각이 나 억울한 마음에 눈물부터 샘솟았다.
"그게 아니라… 오늘 나, 아프다고 회사 사람이 그냥 태워다 준거야. 너 자꾸 왜 이래… 나 그렇잖아도
요새 아프고 힘들어 죽겠는데"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슥 손으로 훔치고 희주는 현수에게 말했다. 희주가 눈물까지 흘리자 조금 당황
했는지 현수는 그제서야 문을 닫고 들어와 물었다.
"어디 아픈데"
"됐어… 여자친구가 어디 아프건 말건, 후우, 니가 나를 못 믿는만큼, 나도 이제 널 의지할 수만은 없어"
"야, 너라면 지금 내가… 후우, 알았다. 미안해"
곧바로 현수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듯 미안하다는 말을 꺼냈지만, 너무 쉽게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는
그것도 싫었고, 연 이틀 연속으로 다짜고짜 따지고 드는 남친이 정말 너무 싫었다.
"가, 나 이제 씻고 잘거야"
현수는 잠시 말을 못 잇고 한숨을 쉬다가 "알았다. 미안해. 그리고 저거, 저번에 니가 백화점에서…"
하고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희주는 그 말을 잘랐다.
"필요없어, 가져가"
희주는 그대로 무시하고는 현수를 마치 없는 사람인 양 그 앞에서 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섰다. 현수는
당혹스러운 듯 서있다가, "그래, 후우, 쉬어라" 하고 그 선물 꾸러미를 두고 집을 나섰다. 자동문이 잠기고
희주는 화장실 변기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 속 괜찮으세요? 전 아까 너무 급하게 먹어선지 배탈이 났네요ㅜㅜ 혹시 뭐 음식에 문제 있었나 싶어
걱정스러워서 그런데, 대리님은 속 괜찮으세요? ]
누워 한참 잠에 들락말락 하는데 카톡이 왔다. 태준이었다. 후우. 진이 다 빠진 터에 만사가 귀찮았지만
또 저녁 사준 사람이 그렇게 걱정해주는데 모른 척 할 수도 없어
[ 아니요 전 괜찮아요. 대리님 어쩐지 아까 좀 급하게 드신다 했어요. ㅜㅜ 소화제 드시고 빨리 나으세요 ]
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곧이어
[ 다행이네요. 네, 그럼 쉬세요. 혹시 저 내일 출근 못하면 변기에 빠져 죽은 줄 아시구요 ]
하고 그의 답장이 왔다. 무어라 답장을 할지 조금 고민하다가
[ 네, 빨리 나으시고 내일 건강한 얼굴로 뵈어요 ]
하는 재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치웠다. 피곤하다. 남자고 뭐고 다 짜증만 난다.
희주는 길게 한숨을 쉬고,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이제 겨우 9시 50분. 피곤하지만 또 잠은 오지 않는다. 그저
뒷목만 아프고 머리만 윙윙 울린다.
현수도 짜증나고, 다 짜증만 난다. 그냥 이대로 어디론가 휙 사라져버리고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