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뭐 먹을까?"
눈이 참 큰 그녀. '왕눈이' 같은 나름 귀엽게 봐 줄 수도 있는 흔한 별명도 얼마든지 있건만, 왜 우린 그녀를
'왕눈깔'이란 참으로 독한 별명을 붙였던 것일까. 하기사, '우리'라고 하기에 그 시절의 다른 친구 녀석들은
이제 다들 너무 멀어져버렸구나.
"어? 뭐 먹냐구우"
내가 딴 생각에 잠겨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는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물었다. 내가 멍하니 딴 생각을 할 때는
몇 번 불러서는 대답조차 하지 않는 것을 잘 알기에 하는 행동이다. 이래저래 새삼스럽지만 세희의 손이 이
다지도 부드러웠던가.
나는 그저 생각없이 "그냥 김밥천국이나 먹으러 가자" 하고 대답을 하려했지만,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는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 아웃백 갈래, 빕스갈래?" 하고 말을 바꾸었다. 내 말에 "정말? 니가 쏘는거야?" 하고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는 그녀.
"내가 왜 쏘냐? 반띵이지"
하고 나는 정색하며 말했지만 그녀가 실망하기 전 바로 지갑에서 CJ상품권을 꺼내보이면서 웃었다.
"회사에서 명절이라고 꼴랑 이거줬다. 너한테 쏘마. 빕스 먹으러 가자. 아니면 차이나 팩토리?"
"아무거나 좋아"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큰 눈에 큰 입, 오늘따라 왜 세희가 왜이리 이뻐보일까.
"그 옷은 새로 산 옷이야?"
나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 산건데. 근데 안 입고 묵혀두긴 했었지. 살 좀 빠지면 입으려다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입어버렸지"
"아 그러고보니 너 살 좀 빠졌는데?"
"정말? 그래보여?"
얼굴을 매만지며 좋아라 하는 그녀. 나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 가슴살만"
팔뚝을 짝 소리나게 후려맞았다. 아프다. 팔뚝을 매만지며 말했다.
"너는 기집애가 뭔 손이 이렇게 맵냐?"
'짝' 소리에 지도 놀랬던지 조금 당황하던 그녀는 나의 핀찬에 쑥쓰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엄마 닮아서 그래. 울 엄마도 손이 엄청 매워. 딱 봐도 그렇지 않아? 다들 울 엄마 보면 첨에 무서워해"
문득 그녀의 어머니 '조 여사님'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정말 무섭게 생기시긴 했지. 어디가서도 10원 한장
손해 안 보시게 생기신 분이니까. 어쨌거나 나는 오늘 세희의 포인트 컬러가 들어간 엷은 아이보리 블라
우스가 그녀에게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녀답지않게' 여성스러워 보였다.
"너 참 오늘 그 옷 잘 어울린다. 이뻐"
"고마워. 근데 너한테 들으니까 하나도 안 기쁘다"
"으휴, 그렇지. 생전에 어디 그런 말을 들어봤어야 그런 말에 기쁘지. 익숙하지가 않으니까…"
"1절만 해에?"
"먹으러 가자"
윤세희. 중학교 시절, '반팅'으로 친해진 그녀다. 내가 나온 남중 바로 옆의 여중이었고, 또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버스 세 정거장 거리의 여고를 나왔다. 그만큼 오래 알았고, 또 친했다. 서로 그만큼 어렸을 때
부터 알았기에 또 그만큼 서로의 치부나 약점도 많이 아는 사이.
내가 부모님의 이혼과 함께 한동안 방황했던 시절을 그녀는 알고 있고, 또 나 역시 그녀가 '좀 많이 심하게
통통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알고 있다. 지금이야 누가봐도 늘씬하고 들어갈 데 들어간(나올 데는 나오지
못한) 여자지만.
그래서였을까. 같은 대학교에 오고, 또 중고교 시절부터 주변 친구들이 "너네는 왜 안 사귀냐?" 소리를 진지
하게 할 정도로 친했음에도 우리는 오늘날까지 그저 '친구'였다.
'흐음'
물론 대학 시절, 그녀에게 처음으로 남자친구가 생기고 그래서 은연 중에 자연스레 멀어졌을 때 처음으로
그녀도 여자였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곱씹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딱히 이성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아…
딱 한번. 일병 때 휴가를 나왔다가, 마침 그녀도 남자친구랑 거의 헤어지냐 마냐까지 이야기가 오가던 시절
이라 마음을 기댈 곳이 필요했을 적, 나야 당연히 굶주린 군바리였으니까 술김에 모텔 직전까지 갔었지만…
나도 그녀도 결국 모텔 문 앞에서
"좀 아닌거 같지?"
"그으래, 너랑은 못 자겠다"
하고 허무하게 발걸음을 돌린 것이 가장 우리가, '이성'으로서 접근했던 순간이었다. 게다가 휴가 복귀 이후
다시 남자친구랑 잘 해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편지로 접했을 때 솔직히 차라리 정말 잘 됐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그러고보니 그게 어느새 6년 전 이야기다.
"아 완전 배부르다"
"난 좀 그저 그렇던데. 뭘 그렇게 열심히 먹냐?"
"어? 넌 맛없었냐?"
"어. 여기는 좀 별론 거 같애"
"그래? 난 맛만 좋던데. 넌 공짜로 얻어먹어서 맛 없었나보다"
"원래 공짜가 더 맛있어야 되는거 아냐?"
배불리 먹고 나오니 어느새 8시였다. 좀 웃긴 이야기지만, 그녀와 나는 항상 그랬다. 만나서 영화나 보고,
저녁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고, 혹은 가끔 그리 과하지 않은 술을 마시고, 그러다가 10시 전에 헤어지는…
마치 중고딩 시절의 만남에서 그 메뉴만 바뀌었다 뿐 그 틀이 거의 바뀌지 않은 만남이었다. 데이트 아닌
데이트. 그만큼 우리 사이는 남녀간의 스파크가 튀기에는 너무 익숙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히 나도 남자다. 가끔은 그녀를 '이성'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하다못해 야동을 보다가도 그녀와 닮은
여자가 나오면 왠지 묘한 생각도 들고, 어쨌거나 그녀를 만나는 날은 옷을 입어도 거울이라도 한번 더 보
게되는…
그럼에도 결국 그렇게 '건전하게 먹고 마시고 헤어지는' 만남을 지속해왔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 들어갈래?"
나의 물음에 그녀는 "그럴까?" 하고 운을 떼었지만 아무래도 8시에 벌써 집에 들어가기는 좀 아쉬운 시간.
나는 "맥주는 배부르니까, 요 앞에서 칵테일이라도 마실래?" 하고 제안했다. 그녀도 OK했다.
"그러고보니 넌 연애 안 해?"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뭐, 해야지. 걔랑 헤어진지도 벌써 그러고보니 반년이네. 아 오래 쉬었다. 이제
진짜 연애해야겠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되물었다.
"넌 안해? 뭐 주변에 따라다니는 남자 없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너 따라다닌다는 그 방송국 남자애는?"
"아 됐어. 그런 타입 완전 싫어"
"가리기는 또 엄청 가려요"
칵테일 한잔을 그렇게 마시다가, 저 앞 자리에서 키스를 나누는 커플이 눈에 띄였다. 나보다 먼저 발견했는지
그녀는 나를 툭 치며 작게 말했다.
"어머, 쟤네 봐"
"아주 모텔방을 차렸구만"
"완전 싫어"
"근데 뭐 넌 연애하면 안 저러겠냐"
"내가 하는건 괜찮지만 남이 하는건 안 돼. 보기 싫어"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칵테일을 한 모금 넘겼다. 그리고 딱히 할 말이 없어졌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슬슬
집에 가야되나 하고 생각할 무렵…
"내일은 뭐해?"
"내일? 그냥 뭐, 일요일이니까, 간만에 푹 쉬려고. 넌?"
"나도 뭐 딱히 약속 없어"
청춘남녀가 주말 밤에, 데이트 코스로 놀고 바에서 술까지 한잔 하고 심지어 다음 날은 노는 날. 그렇다고 또
대뜸 뭘 어떻게 하자고 하는 것도 어색한 그런 사이.
'왠지 재미없네'
싱거운데. 그래, 이럴 바에야 그냥 차라리…
'됐어'
그래, 그래서 얘랑 뭐 지금 대뜸 자자고 해서, 잔다고 치자. 그럼? 그 다음에는? 사귈건가? 아니면 그냥 뭐
어색하게 굿바이? 아니면 가끔 만나서 잠이나 자게 되는 그런 사이? 문득 이런걸 또 고민까지 해야되는게
웃기지만-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하루 이틀 만난 사이도 아니고 근 10년을 넘게 알고 지내는
사이라면,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하루 아침에 글로벌 프리 섹스피플이 될 수야
없는 것 아니겠는가. 뭐 또 미드 보면 양놈들도 이런 고민은 똑같두만.
"넌 말이야"
나의 긴 사색을 그녀의 말이 깼다.
"나 뭐?"
"넌 가끔…"
"어"
"아니야"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녀가 "아니야" 라면서 입을 다문다.
"뭐가 아냐?"
"아니, 아니야"
"싱겁게 뭔 말을 하다가 마냐? 나 뭐?"
내가 실실 웃으면서 묻자 그녀도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문득 언제 어디에선가 읽었던 아주 올드
하고 쉰내 팍팍 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흐려서 남자의 관심을 동하게 하는 연애의 비법'이 문득
떠올라 이번에는 내가 낄낄 웃었다. 물론 세희가 그런 촌스럽고 잔망스러운 '비법'을 쓰는 애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더 웃긴 것이었지만.
"왜 웃어?"
이번에는 그녀가 물었지만 난 "아니야" 하고 말했다. 그녀는 나의 부정이 그저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은 것
에 대한 유치한 돌려주기라고 생각했는지 "치" 하고 피식 한 마디 하더니 "이제 슬슬 일어날까?" 하고 말했다.
언제나처럼, 이라면 지금이 슬슬 일어날 때이긴 하지.
그리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실 솔직히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그 말이 왠지 또 오늘도 입에서 맴맴 돌았
지만 어설프게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이 싫어서 나는 또 비겁하게 오늘도 '좋은 친구'가 되기로 한다.
"그래"
바를 나와 걷는데, 문득 그녀가 힐을 신은 것을 이제야 눈치챘다. 아니, 힐 신은거야 아까도 당연히 알았지만
그것을 오늘 중 처음으로 비로소 그 힐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세희의 힐'
너무 과한 의미부여일까. 그냥 옷에 맞춰입다보니 힐 신을 수도 있지 뭐. 나한테 딱히 이뻐보이고 싶은게 뭐
아니라서. 무슨 연애 처음하는 찌질이도 아니고 뭘 그리 일일히 다 의미부여를 하려고 해.
그렇게 다시 스스로를 달랜 후 걷노라니 그녀가 "넌 어떻게 갈거야? 그냥 택시 타고 갈거야? 아니면 전철?"
하고 물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혼자 쓸데없는 짱구를 굴린 탓일까, 그녀의 얼굴이 또 새삼 예뻐보였다.
'왜 지난 10년도 넘게 그냥 친구로 잘 지내오다가, 딱히 별 다른 것도 없는 오늘에서야 혼자 지랄인데?'
하고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혼자만의 지랄을 달래보지만, 이미 나의 입은 그보다 빠르게 열리고 있었다.
"세희야"
그녀는 "어" 하고 바로 대답했고, 그 주저없는 대답에서 일말의 성적 긴장감이나 묘한 기대감을 캐치 못한
나는 곧바로 실패, 를 예감했지만…이렇게 언제까지 그냥 허무하게, 싱겁게, 친구로서 지낼건데? 그러다
언젠가 다른 남자가 생겨서 세희가 떠나면 또 뒤늦게 혼자 청승떨며 후회할 것인가? 하는 언젠가의 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드디어 '그 말'을 꺼냈다.
사실 그 말을 꺼내면서도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나 '사실 꽤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거
지만' 아니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구, 그냥 솔직한 지금 내 마음인데' 라거나 하다못해 '하하, 이거 웃긴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같은 비겁한 수식어들을 떠올렸지만 그냥 다 뭉개버렸다. 나는 알고 있다. 저런 말
들이 얼마나 자신의 용기없음을 비겁하게 가리려는 말들인지. 그리고 여자들은 그것을 더욱 잘 알고 있고.
그저 나는 솔직하게 직구를 던졌다. 상대가 훅 걷어낼 수도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시원하게 얻어맞고
빨랫줄처럼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큰 타구와 함께 어이없이 강판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와 나의 언제나
같은 '밍숭맹숭한 오랜 남녀 친구' 사이에 나는 오늘 획을 긋고 싶었다. 충동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이거야말로 아주 최악의 접근이라고 해도 좋지만, 어설프게 혼자 마음 졸이게 되는 것보다는 이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오늘 안 들어가면 안 돼?"
…직구는 직구지만 아무리 직구를 던진다고 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하는 법. 그녀와의 관계 제의에
대해 그렇게 물은 나의 말에 세희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는지 잠시 멈칫하다가 역시나
"야, 미쳤어? 내가 너랑 왜 자"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부드럽게 손을 거두는 것도, 뭐 그리 나쁜 수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애시
당초 그렇게 수습할 것 같았으면 공을 아예 안 던지는 편이 나았겠지. 물론 본디 도박이나 주식이나 일단
털리기 시작했다 싶으면 바로 손 빼고 나오는게 맞겠지만… 10년도 넘게 지켜만 보다가 끼어든 판이라면
한번 털렸다고 거기에서 손 빼는 것이야말로 차라리 신나게 쫄쫄 거지가 되도록 털리는 것보다도 더욱
안 좋은 결말 아닐까. 나는 와인드업을 시작했고, 그 사이 무슨 말로 제 2구를 던질까 고민했지만 사실
선수가 너무 깊이 고민을 하다보면 악수를 두게 되는 법. 나는 그저 별 생각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너랑 자고 싶어. 양아치처럼 가볍게 생각한 건 아니고, 그냥… 너랑 이렇게 헤어져서 집에 들어
가려니 아쉽고, 너랑 같이 있고 싶다"
포장 없는 진심 그대로의 말. 싸대기 한대 맞아도, 아니면 "다시 우리 보지 말자" 라는 말을 들어도 까짓거
그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런 식의 고백이 그녀를 얼마나 부담스럽고 혼란스러우며
짜증나게 할지에 대해서도 지금 잠깐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만약 나와의 새로운 관계 진입이 꼭 그렇게
싫기만 하다면 그건 또 그대로 나 역시 서운한 일이다. 그래, 나는 차라리 지금 이 순간만은 나에게 가장
진실하며 나에 대해서만 진실한 것이 오히려 그녀에게도 예의라 생각하기로 했다.
"너는 나랑 자고 싶냐? 알거 모를거 다 아는 사이에?"
세희는 여전히 애써 웃음 띈 얼굴로 대답했지만, 나는 또 유머러스하게 받았다.
"생각보다 모르는거 많지 않냐?"
나의 말에 그녀는 참나, 하면서 멋적게 당혹스러워했지만 나는 그녀가 또 다른 변명을 생각해내기 전에
그 예쁜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고 가자" 라고 작게 말했다. 세희는 많이 당혹스러워
하며 어쩔까 고민하는 듯 했지만, 결국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나에게 물었다.
"너 오늘 일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솔직히 말해 미래의 일을 오늘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나보다
훨씬 더 난감할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확신과 안심을 줘야하지 않겠는가.
"그럼, 난 후회 안 해. 너랑이라면"
뒤에 붙인 '너랑이라면' 이라는 말이 조금 오그라들긴 했지만 세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런데 나랑 자는게 꼭 한숨까지 쉬어야 할 일인가?- "그래, 그러면 자고 가자" 하면서도 내 손은 슥
가볍게 뿌리쳤다.
"손은 놓고"
막상 같이 자기로 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잠까지 자는 것은 분명 그녀로선
많은 부담이 따를 것이 분명한 이야기. 모텔 골목에 들어서자 그녀의 걸음은 좀 느려졌고, 나 역시 너무
충동적인 제안이었던 탓에 이 모텔 골목 내 모텔 천지 중에 어디에 들어가야 좋을지 조금은 고민이
되었다.
"들어가자"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은지 개중에 가장 그래도 외형적으로 새 건물이고 설비도 좋다고 현수막을 걸어
자랑해놓은 모텔에는 방이 없었고, 결국 플랜B로 생각해두었던 그 옆의 큰 모텔로 들어섰다.
"502호실입니다. 엘리베이터는 저 쪽입니다"
다행히 방이 있었고 열쇠와 소모품을 받아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붉은 조명 속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솔직히 세희에 대해 강렬한 키스의 충동을 느꼈지만 아직 우리의 새로운 관계가 정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이미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을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키스까지 하는 것은 또 조금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꾸욱 참았다.
"넌 근데 뭔 특실까지 끊냐?"
"일반실 끊었다가 왜 싸구려 방 골랐냐고 너한테 혼날까 봐"
"멍청이"
아무리 그래도 너랑 처음 자는 특별한 날인데, 어디 좋은 호텔까지야 아니더라도 싸구려 유흥가 모텔에서도
대실용 방보다야 조금 나은 방이… 뭐 그렇게 스스로 의미부여를 하기로 했다.
방에 들어서자 이제서야 뭔가 실감이 났다. 세희와 모텔에 왔다는 사실이. 열쇠키를 꽂고, 가방을 대충 책상
위에 올려놓고 아직도 조금 어색하게 침대에 슥 걸터앉는 그녀의 어색함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려 나는 TV
부터 켰다.
"자 그럼 다음 코너는…"
케이블에서는 뭔 듣보잡 예능 프로를 하고 있었고 나는 채널을 정규방송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피곤
하다. 나 먼저 씻을께" 하고 생각보다 대범하게 일어날 적, 나는 그러고보니 TV부터 켜고 리모콘부터 만지
작 거린 것이 멋적어 그 실수(?)를 속으로 혼자 담담히 인정하며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세희야"
"응"
나 여기 걸터앉았던 침대에서 스윽 몸을 일으키며 그녀 앞에 서서 말했다. 느낌 탓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살짝 떨고있다고 느꼈다. 기분 탓이겠지. 나는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몇 초간 주억거리다 겨우 싱거운
말을 토해내 듯 말했다.
"좋아해"
세희는 나의 그 멋적은 고백에 유치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난 너 안 좋아하…" 라면서 대답하려 했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조금 타이밍이 어색하긴 했지만 나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으니까.
그녀는 생각보다 순순히 내 '접촉'을 받아들였고, 그녀의 입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저 아까 마신 칵테일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달콤했다.
눈이 참 큰 그녀. '왕눈이' 같은 나름 귀엽게 봐 줄 수도 있는 흔한 별명도 얼마든지 있건만, 왜 우린 그녀를
'왕눈깔'이란 참으로 독한 별명을 붙였던 것일까. 하기사, '우리'라고 하기에 그 시절의 다른 친구 녀석들은
이제 다들 너무 멀어져버렸구나.
"어? 뭐 먹냐구우"
내가 딴 생각에 잠겨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는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물었다. 내가 멍하니 딴 생각을 할 때는
몇 번 불러서는 대답조차 하지 않는 것을 잘 알기에 하는 행동이다. 이래저래 새삼스럽지만 세희의 손이 이
다지도 부드러웠던가.
나는 그저 생각없이 "그냥 김밥천국이나 먹으러 가자" 하고 대답을 하려했지만,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는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 아웃백 갈래, 빕스갈래?" 하고 말을 바꾸었다. 내 말에 "정말? 니가 쏘는거야?" 하고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는 그녀.
"내가 왜 쏘냐? 반띵이지"
하고 나는 정색하며 말했지만 그녀가 실망하기 전 바로 지갑에서 CJ상품권을 꺼내보이면서 웃었다.
"회사에서 명절이라고 꼴랑 이거줬다. 너한테 쏘마. 빕스 먹으러 가자. 아니면 차이나 팩토리?"
"아무거나 좋아"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큰 눈에 큰 입, 오늘따라 왜 세희가 왜이리 이뻐보일까.
"그 옷은 새로 산 옷이야?"
나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 산건데. 근데 안 입고 묵혀두긴 했었지. 살 좀 빠지면 입으려다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입어버렸지"
"아 그러고보니 너 살 좀 빠졌는데?"
"정말? 그래보여?"
얼굴을 매만지며 좋아라 하는 그녀. 나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 가슴살만"
팔뚝을 짝 소리나게 후려맞았다. 아프다. 팔뚝을 매만지며 말했다.
"너는 기집애가 뭔 손이 이렇게 맵냐?"
'짝' 소리에 지도 놀랬던지 조금 당황하던 그녀는 나의 핀찬에 쑥쓰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엄마 닮아서 그래. 울 엄마도 손이 엄청 매워. 딱 봐도 그렇지 않아? 다들 울 엄마 보면 첨에 무서워해"
문득 그녀의 어머니 '조 여사님'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정말 무섭게 생기시긴 했지. 어디가서도 10원 한장
손해 안 보시게 생기신 분이니까. 어쨌거나 나는 오늘 세희의 포인트 컬러가 들어간 엷은 아이보리 블라
우스가 그녀에게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녀답지않게' 여성스러워 보였다.
"너 참 오늘 그 옷 잘 어울린다. 이뻐"
"고마워. 근데 너한테 들으니까 하나도 안 기쁘다"
"으휴, 그렇지. 생전에 어디 그런 말을 들어봤어야 그런 말에 기쁘지. 익숙하지가 않으니까…"
"1절만 해에?"
"먹으러 가자"
윤세희. 중학교 시절, '반팅'으로 친해진 그녀다. 내가 나온 남중 바로 옆의 여중이었고, 또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버스 세 정거장 거리의 여고를 나왔다. 그만큼 오래 알았고, 또 친했다. 서로 그만큼 어렸을 때
부터 알았기에 또 그만큼 서로의 치부나 약점도 많이 아는 사이.
내가 부모님의 이혼과 함께 한동안 방황했던 시절을 그녀는 알고 있고, 또 나 역시 그녀가 '좀 많이 심하게
통통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알고 있다. 지금이야 누가봐도 늘씬하고 들어갈 데 들어간(나올 데는 나오지
못한) 여자지만.
그래서였을까. 같은 대학교에 오고, 또 중고교 시절부터 주변 친구들이 "너네는 왜 안 사귀냐?" 소리를 진지
하게 할 정도로 친했음에도 우리는 오늘날까지 그저 '친구'였다.
'흐음'
물론 대학 시절, 그녀에게 처음으로 남자친구가 생기고 그래서 은연 중에 자연스레 멀어졌을 때 처음으로
그녀도 여자였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곱씹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딱히 이성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아…
딱 한번. 일병 때 휴가를 나왔다가, 마침 그녀도 남자친구랑 거의 헤어지냐 마냐까지 이야기가 오가던 시절
이라 마음을 기댈 곳이 필요했을 적, 나야 당연히 굶주린 군바리였으니까 술김에 모텔 직전까지 갔었지만…
나도 그녀도 결국 모텔 문 앞에서
"좀 아닌거 같지?"
"그으래, 너랑은 못 자겠다"
하고 허무하게 발걸음을 돌린 것이 가장 우리가, '이성'으로서 접근했던 순간이었다. 게다가 휴가 복귀 이후
다시 남자친구랑 잘 해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편지로 접했을 때 솔직히 차라리 정말 잘 됐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그러고보니 그게 어느새 6년 전 이야기다.
"아 완전 배부르다"
"난 좀 그저 그렇던데. 뭘 그렇게 열심히 먹냐?"
"어? 넌 맛없었냐?"
"어. 여기는 좀 별론 거 같애"
"그래? 난 맛만 좋던데. 넌 공짜로 얻어먹어서 맛 없었나보다"
"원래 공짜가 더 맛있어야 되는거 아냐?"
배불리 먹고 나오니 어느새 8시였다. 좀 웃긴 이야기지만, 그녀와 나는 항상 그랬다. 만나서 영화나 보고,
저녁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고, 혹은 가끔 그리 과하지 않은 술을 마시고, 그러다가 10시 전에 헤어지는…
마치 중고딩 시절의 만남에서 그 메뉴만 바뀌었다 뿐 그 틀이 거의 바뀌지 않은 만남이었다. 데이트 아닌
데이트. 그만큼 우리 사이는 남녀간의 스파크가 튀기에는 너무 익숙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히 나도 남자다. 가끔은 그녀를 '이성'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하다못해 야동을 보다가도 그녀와 닮은
여자가 나오면 왠지 묘한 생각도 들고, 어쨌거나 그녀를 만나는 날은 옷을 입어도 거울이라도 한번 더 보
게되는…
그럼에도 결국 그렇게 '건전하게 먹고 마시고 헤어지는' 만남을 지속해왔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 들어갈래?"
나의 물음에 그녀는 "그럴까?" 하고 운을 떼었지만 아무래도 8시에 벌써 집에 들어가기는 좀 아쉬운 시간.
나는 "맥주는 배부르니까, 요 앞에서 칵테일이라도 마실래?" 하고 제안했다. 그녀도 OK했다.
"그러고보니 넌 연애 안 해?"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뭐, 해야지. 걔랑 헤어진지도 벌써 그러고보니 반년이네. 아 오래 쉬었다. 이제
진짜 연애해야겠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되물었다.
"넌 안해? 뭐 주변에 따라다니는 남자 없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너 따라다닌다는 그 방송국 남자애는?"
"아 됐어. 그런 타입 완전 싫어"
"가리기는 또 엄청 가려요"
칵테일 한잔을 그렇게 마시다가, 저 앞 자리에서 키스를 나누는 커플이 눈에 띄였다. 나보다 먼저 발견했는지
그녀는 나를 툭 치며 작게 말했다.
"어머, 쟤네 봐"
"아주 모텔방을 차렸구만"
"완전 싫어"
"근데 뭐 넌 연애하면 안 저러겠냐"
"내가 하는건 괜찮지만 남이 하는건 안 돼. 보기 싫어"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칵테일을 한 모금 넘겼다. 그리고 딱히 할 말이 없어졌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슬슬
집에 가야되나 하고 생각할 무렵…
"내일은 뭐해?"
"내일? 그냥 뭐, 일요일이니까, 간만에 푹 쉬려고. 넌?"
"나도 뭐 딱히 약속 없어"
청춘남녀가 주말 밤에, 데이트 코스로 놀고 바에서 술까지 한잔 하고 심지어 다음 날은 노는 날. 그렇다고 또
대뜸 뭘 어떻게 하자고 하는 것도 어색한 그런 사이.
'왠지 재미없네'
싱거운데. 그래, 이럴 바에야 그냥 차라리…
'됐어'
그래, 그래서 얘랑 뭐 지금 대뜸 자자고 해서, 잔다고 치자. 그럼? 그 다음에는? 사귈건가? 아니면 그냥 뭐
어색하게 굿바이? 아니면 가끔 만나서 잠이나 자게 되는 그런 사이? 문득 이런걸 또 고민까지 해야되는게
웃기지만-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하루 이틀 만난 사이도 아니고 근 10년을 넘게 알고 지내는
사이라면,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하루 아침에 글로벌 프리 섹스피플이 될 수야
없는 것 아니겠는가. 뭐 또 미드 보면 양놈들도 이런 고민은 똑같두만.
"넌 말이야"
나의 긴 사색을 그녀의 말이 깼다.
"나 뭐?"
"넌 가끔…"
"어"
"아니야"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녀가 "아니야" 라면서 입을 다문다.
"뭐가 아냐?"
"아니, 아니야"
"싱겁게 뭔 말을 하다가 마냐? 나 뭐?"
내가 실실 웃으면서 묻자 그녀도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문득 언제 어디에선가 읽었던 아주 올드
하고 쉰내 팍팍 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흐려서 남자의 관심을 동하게 하는 연애의 비법'이 문득
떠올라 이번에는 내가 낄낄 웃었다. 물론 세희가 그런 촌스럽고 잔망스러운 '비법'을 쓰는 애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더 웃긴 것이었지만.
"왜 웃어?"
이번에는 그녀가 물었지만 난 "아니야" 하고 말했다. 그녀는 나의 부정이 그저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은 것
에 대한 유치한 돌려주기라고 생각했는지 "치" 하고 피식 한 마디 하더니 "이제 슬슬 일어날까?" 하고 말했다.
언제나처럼, 이라면 지금이 슬슬 일어날 때이긴 하지.
그리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실 솔직히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그 말이 왠지 또 오늘도 입에서 맴맴 돌았
지만 어설프게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이 싫어서 나는 또 비겁하게 오늘도 '좋은 친구'가 되기로 한다.
"그래"
바를 나와 걷는데, 문득 그녀가 힐을 신은 것을 이제야 눈치챘다. 아니, 힐 신은거야 아까도 당연히 알았지만
그것을 오늘 중 처음으로 비로소 그 힐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세희의 힐'
너무 과한 의미부여일까. 그냥 옷에 맞춰입다보니 힐 신을 수도 있지 뭐. 나한테 딱히 이뻐보이고 싶은게 뭐
아니라서. 무슨 연애 처음하는 찌질이도 아니고 뭘 그리 일일히 다 의미부여를 하려고 해.
그렇게 다시 스스로를 달랜 후 걷노라니 그녀가 "넌 어떻게 갈거야? 그냥 택시 타고 갈거야? 아니면 전철?"
하고 물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혼자 쓸데없는 짱구를 굴린 탓일까, 그녀의 얼굴이 또 새삼 예뻐보였다.
'왜 지난 10년도 넘게 그냥 친구로 잘 지내오다가, 딱히 별 다른 것도 없는 오늘에서야 혼자 지랄인데?'
하고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혼자만의 지랄을 달래보지만, 이미 나의 입은 그보다 빠르게 열리고 있었다.
"세희야"
그녀는 "어" 하고 바로 대답했고, 그 주저없는 대답에서 일말의 성적 긴장감이나 묘한 기대감을 캐치 못한
나는 곧바로 실패, 를 예감했지만…이렇게 언제까지 그냥 허무하게, 싱겁게, 친구로서 지낼건데? 그러다
언젠가 다른 남자가 생겨서 세희가 떠나면 또 뒤늦게 혼자 청승떨며 후회할 것인가? 하는 언젠가의 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드디어 '그 말'을 꺼냈다.
사실 그 말을 꺼내면서도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나 '사실 꽤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거
지만' 아니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구, 그냥 솔직한 지금 내 마음인데' 라거나 하다못해 '하하, 이거 웃긴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같은 비겁한 수식어들을 떠올렸지만 그냥 다 뭉개버렸다. 나는 알고 있다. 저런 말
들이 얼마나 자신의 용기없음을 비겁하게 가리려는 말들인지. 그리고 여자들은 그것을 더욱 잘 알고 있고.
그저 나는 솔직하게 직구를 던졌다. 상대가 훅 걷어낼 수도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시원하게 얻어맞고
빨랫줄처럼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큰 타구와 함께 어이없이 강판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와 나의 언제나
같은 '밍숭맹숭한 오랜 남녀 친구' 사이에 나는 오늘 획을 긋고 싶었다. 충동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이거야말로 아주 최악의 접근이라고 해도 좋지만, 어설프게 혼자 마음 졸이게 되는 것보다는 이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오늘 안 들어가면 안 돼?"
…직구는 직구지만 아무리 직구를 던진다고 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하는 법. 그녀와의 관계 제의에
대해 그렇게 물은 나의 말에 세희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는지 잠시 멈칫하다가 역시나
"야, 미쳤어? 내가 너랑 왜 자"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부드럽게 손을 거두는 것도, 뭐 그리 나쁜 수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애시
당초 그렇게 수습할 것 같았으면 공을 아예 안 던지는 편이 나았겠지. 물론 본디 도박이나 주식이나 일단
털리기 시작했다 싶으면 바로 손 빼고 나오는게 맞겠지만… 10년도 넘게 지켜만 보다가 끼어든 판이라면
한번 털렸다고 거기에서 손 빼는 것이야말로 차라리 신나게 쫄쫄 거지가 되도록 털리는 것보다도 더욱
안 좋은 결말 아닐까. 나는 와인드업을 시작했고, 그 사이 무슨 말로 제 2구를 던질까 고민했지만 사실
선수가 너무 깊이 고민을 하다보면 악수를 두게 되는 법. 나는 그저 별 생각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너랑 자고 싶어. 양아치처럼 가볍게 생각한 건 아니고, 그냥… 너랑 이렇게 헤어져서 집에 들어
가려니 아쉽고, 너랑 같이 있고 싶다"
포장 없는 진심 그대로의 말. 싸대기 한대 맞아도, 아니면 "다시 우리 보지 말자" 라는 말을 들어도 까짓거
그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런 식의 고백이 그녀를 얼마나 부담스럽고 혼란스러우며
짜증나게 할지에 대해서도 지금 잠깐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만약 나와의 새로운 관계 진입이 꼭 그렇게
싫기만 하다면 그건 또 그대로 나 역시 서운한 일이다. 그래, 나는 차라리 지금 이 순간만은 나에게 가장
진실하며 나에 대해서만 진실한 것이 오히려 그녀에게도 예의라 생각하기로 했다.
"너는 나랑 자고 싶냐? 알거 모를거 다 아는 사이에?"
세희는 여전히 애써 웃음 띈 얼굴로 대답했지만, 나는 또 유머러스하게 받았다.
"생각보다 모르는거 많지 않냐?"
나의 말에 그녀는 참나, 하면서 멋적게 당혹스러워했지만 나는 그녀가 또 다른 변명을 생각해내기 전에
그 예쁜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고 가자" 라고 작게 말했다. 세희는 많이 당혹스러워
하며 어쩔까 고민하는 듯 했지만, 결국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나에게 물었다.
"너 오늘 일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솔직히 말해 미래의 일을 오늘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나보다
훨씬 더 난감할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확신과 안심을 줘야하지 않겠는가.
"그럼, 난 후회 안 해. 너랑이라면"
뒤에 붙인 '너랑이라면' 이라는 말이 조금 오그라들긴 했지만 세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런데 나랑 자는게 꼭 한숨까지 쉬어야 할 일인가?- "그래, 그러면 자고 가자" 하면서도 내 손은 슥
가볍게 뿌리쳤다.
"손은 놓고"
막상 같이 자기로 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잠까지 자는 것은 분명 그녀로선
많은 부담이 따를 것이 분명한 이야기. 모텔 골목에 들어서자 그녀의 걸음은 좀 느려졌고, 나 역시 너무
충동적인 제안이었던 탓에 이 모텔 골목 내 모텔 천지 중에 어디에 들어가야 좋을지 조금은 고민이
되었다.
"들어가자"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은지 개중에 가장 그래도 외형적으로 새 건물이고 설비도 좋다고 현수막을 걸어
자랑해놓은 모텔에는 방이 없었고, 결국 플랜B로 생각해두었던 그 옆의 큰 모텔로 들어섰다.
"502호실입니다. 엘리베이터는 저 쪽입니다"
다행히 방이 있었고 열쇠와 소모품을 받아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붉은 조명 속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솔직히 세희에 대해 강렬한 키스의 충동을 느꼈지만 아직 우리의 새로운 관계가 정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이미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을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키스까지 하는 것은 또 조금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꾸욱 참았다.
"넌 근데 뭔 특실까지 끊냐?"
"일반실 끊었다가 왜 싸구려 방 골랐냐고 너한테 혼날까 봐"
"멍청이"
아무리 그래도 너랑 처음 자는 특별한 날인데, 어디 좋은 호텔까지야 아니더라도 싸구려 유흥가 모텔에서도
대실용 방보다야 조금 나은 방이… 뭐 그렇게 스스로 의미부여를 하기로 했다.
방에 들어서자 이제서야 뭔가 실감이 났다. 세희와 모텔에 왔다는 사실이. 열쇠키를 꽂고, 가방을 대충 책상
위에 올려놓고 아직도 조금 어색하게 침대에 슥 걸터앉는 그녀의 어색함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려 나는 TV
부터 켰다.
"자 그럼 다음 코너는…"
케이블에서는 뭔 듣보잡 예능 프로를 하고 있었고 나는 채널을 정규방송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피곤
하다. 나 먼저 씻을께" 하고 생각보다 대범하게 일어날 적, 나는 그러고보니 TV부터 켜고 리모콘부터 만지
작 거린 것이 멋적어 그 실수(?)를 속으로 혼자 담담히 인정하며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세희야"
"응"
나 여기 걸터앉았던 침대에서 스윽 몸을 일으키며 그녀 앞에 서서 말했다. 느낌 탓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살짝 떨고있다고 느꼈다. 기분 탓이겠지. 나는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몇 초간 주억거리다 겨우 싱거운
말을 토해내 듯 말했다.
"좋아해"
세희는 나의 그 멋적은 고백에 유치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난 너 안 좋아하…" 라면서 대답하려 했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조금 타이밍이 어색하긴 했지만 나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으니까.
그녀는 생각보다 순순히 내 '접촉'을 받아들였고, 그녀의 입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저 아까 마신 칵테일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