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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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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진짜? 이야 임마 축하한다! 그래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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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결혼한 친구가, 와이프가 임신을 했다며 그 자랑을 해왔다. 벌써 4개월째란다. 나는 호들갑을 떨며 축하
해주었다. 다들 도대체 언제 가냐, 우리 이러다가 10년 뒤에 전세기 타고 베트남 가는거 아니냐 했지만 어느 틈
엔가 슬슬 하나둘씩 결혼 테이프를 끊더니 드디어는 아버지가 되는 놈도 곧 나오는 것이다.

"그래, 여튼 잘 지내고, 몸 잘 챙겨라. 어어, 조만간 보자. 그래"

이제부터는 진짜 좋은 세월은 다 갔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겁 반 기합 반도 넣어주고, 여튼 조만간 축하주 한번
사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후우"

전화를 끊고나자 새삼 삶이 무상하게 느껴진다. 벌써 누구는 장가를 가고 아버지까지 되었는데… 나는?


방구석을 새삼 휘 둘러보니 참 인생 허무하다. 언제 빤 지 기억도 없는 이불보와 이불. 아, 아니다. 지난 주에
윤택이 그 미친 새끼가 재워줬더니 이불 위에 토해서 빨았구나 참. 여튼, 벽 한 면을 다 가리는 행거 가득 걸린
옷가지들, 허리 높이까지 쌓인 잡지와 소설-절반은 읽지도 않은-, 세탁기 속 가득한 빨래거리, 책상 위를 가득
덮은 멀티미디어 기기들과 화장품, 그리고 영양제… 찬장 속 가득한 레토르트 식품과 냉장고 속의 닭가슴살,
탄산수와 야채들… 오랜 자취 경험으로 인해 절대 쌓이지 않는 것을 방침으로 하는 청결한 설거지통…

"흠"

나름 자학을 위해 그 '꺼리'를 찾았지만 생각보다는 양호한 점수를 줄만한 방구석이다. 물론 그래봤자 30대의
나이를 감안해보면 원룸 그 자체가 별로 그리 자랑스럽지 못하지만.

'그러나'

문제는 좀 더 근본적인 것이다. 나의 시선은 장농 여행가방 밑 작은 검은 파우치 속 통장으로 슬그머니 향한다.

'그래, 돈'


나이 서른 둘에 어이없지만 모은 돈이라고는 딱 1,800만원이 전부다. 나라고 내가 이 꼴이 날 줄 알았겠는가.
아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집 월세보증금 천만원까지 더 합하면 2,800만원이 되겠다. 뭐, 그 천 만원은 예전에
부모님이 빌려준 돈이라는게 함정이지만. 어쨌거나 말이다.

"후후"

취업을 일찍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때 이미 취업을 했다. 그렇다고 정직원으로 취업한 것은 아니고, 그냥
알바나 다름 없었다. 어차피 나야 4학년 2학기 탱자탱자 놀면서 시간 버리느니 일하면서 돈벌면 좋다고 생각
했으니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3개월만에 계약직 전환, 그리고 6개월만에 정직원으로 전환되었다.

"뭐…"

정직원이라고 해봐야 연봉 2천 간당간당한 일자리였다. 게다가 대학 시절의 자취생활을 잊지 못하고 바로
다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 아, 5년 내내 일한 것은 아니다. 중간에
1년 가까이 백수 생활을 했다. 2년 모은 돈을 그 1년 사이 다 까먹었고, 그 사이사이로도 연애다 자동차다
하면서 은근슬쩍 슬금슬금 쓰다보니, 아니 사실 진짜 가장 큰 문제는 앵겔지수였다.

'먹는거 하나는 정말 잘 먹었지'

먹는게 남는거다, 라는 지론 하에 나름 제대로 먹고 살았다. 고기를 먹어도 비싼 고기를, 하는 식으로 말이다.
확실히 삶의 질은 나아졌을지 몰라도 돈은 아주 확실하게 소모되었다. 하다못해 옷이나 IT 기기에 지르는
돈은 그것이 물건으로 남고, 결국 중고판매도 가능하지만 식품은 그렇지 않다. 사서 먹으면 똥이 되는거고,
먹지 않으면 쓰레기가 된다.

자린고비의 일화로 왜 먹는 이야기가 채택되었겠는가. 왜 '앵겔 지수'가 빈부의 척도로 사용되겠는가. 말이
좀 돌았지만 어쨌거나 그런 연유로 인해 핑계를 대보자면 먹을거 잘 먹고, 쓸거 잘 쓰고, 호구 짓도 분명히
남 부럽지않게 하고, 허튼 짓도 많이 하고 다니고, 여름이면 어디 해외로 여행도 다니고 그러면서 헛지랄을
하다보니 어느새 이 날 이태껏 모은 돈이 꼴랑 그것 뿐인 것이다.

'아차'

부채를 감안 안 했네. 현재 대출금 1,100만원이 있다. 지지난 달에 금융플래너에게 상담 받았더니 당장 여유
자금으로 대출금부터 갚으라던데. 모르는건 아닌데, 왠지 정말로 통장에 남은 돈이 딱 700만원만 찍혀 있음
너무너무 쓸쓸할 것 같아서 좀 미적대게 된다.

'끙'

이래서야 어디 장가갈 수 있을까. 자, 그래, 어느 사랑이 눈이 먼 불쌍한 소녀가 있다고 치자. 그녀가 나에게
사랑 하나만을 바라면서 달려온다고 치자, 그래, 나야 고맙지, 얼른 품에 안는다. 그런데 그런 다음은?

어?

그런 다음은 어쩔거냔 말이다. 아 물론 고맙게도 그녀도 나에게 큰 거 안 바라고 잠깐의 연애만 즐기다가 그리
떠나준다? 그럼 뭐 마음이야 편하지. 그런데 그런 식으로 언제까지 갈건데?

남자 나이 서른 둘. 아직 늦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있는 나이도 아니잖는가? 게다가 돈도 없는 놈이.
생각해보면 기가 차다. 도대체 나는 뭐했나? 지난 5년간 1년에 돈 천만원씩만, 1년은 좀 봐준다 쳐도 그래도
최소한 4천만원은 모았어야 되는거 아닌가? 거기에다가 집에서 한 기천만원 도움받고, 대출 좀 내고 그래서
남들처럼 대충 그렇고 그렇게 뭐 적당히 살면 되는거 아닌가?

왜 너는 남들 다 하는 그런걸 못했나?

앞으로 잘하면 되지 않냐고? 내 말 똑바로 안 보니? 지금 있는 돈에서 부채 갚고 나면 돈 천만원도 없는데,
이제 나이 서른둘부터 부지런히 모아봐야 후우.

"됐어"

다 때려치우고 이렇게 대충 살다가 정말로 서른 대여섯살에 뭐, 대충… 베트남 처자 얻어다가 나름 대우 잘
해주고 살면, 그러면 되지 않을까? 최소한 어쨌든 나랑 같이 살아주기만 한다면야 여자 하나 행복하게 해주는
거야 그 무에 힘든 일일까.

아니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베트남이 다 뭐냐. 진짜 베트남 여자랑 뭐 같이 살 자신 있냐? 어? 말도
안 통하는 여자랑? 사회적 시선은 감당할 자신 있어? 2세 교육은? 노후 생활을 함께 해나가며 같이 오순도순
늙어갈 자신 있어?

"후우"

아니 내가 지금 왜 이런 고민을 하지? 아 맞다. 그 새끼 임신했다고 했지. 씨발. 참나, 기가 막히는구나. 친구
새끼 아버지 된다고 지금 내가 혼자 신세 한탄 하고 있는거야? 어휴 찌질하다 어휴 찌질해.

"찌질하고 어쩌고의 문제가 아니지. 항상 그냥 외면하고 있는 시급한 문제지"

그래, 도대체 뭘 어쩔 셈이냐. 미래 없는 오늘, 내일 없는 현재를 사는 나다. 그냥 하루하루, 이렇게 막연하게
대충 우울한 내일은 대충 잊고 그렇게 살아간다. 답답하고 우울하다.

그냥 우렁각시 같은 처자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생각해보면 그것도 그렇다. 오죽 막막했음
우렁이가 마누라가 되는 망상을 다 했을까. 수백년 전 그 조상님은 나같은 고민을 했던 것일까. 하기사 그렇지.
어느 여자가 그 무슨 죄가 있어 나같은 놈과 한 평생 살아가나.

그저 나 혼자 조금 더 외롭고, 그렇게 혼자 살다 대충 이승하직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너무나도
외롭고, 쓸쓸하다. 아니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무덤덤하다. 단지, 부모님께 죄송하고,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한게 불안하고 두려울 따름이다. 그리고 새삼 다시 나를 자학하게 된다.

이렇게 살다 어느 순간 다시 우울증이 찾아오면, 그때는 뭐… 허허,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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