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둘 다 말이 없어졌다. 전철이 끊길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소주 두 병을 아주 천천히 더 비우면서 몇 시간의 시간을 더 흘려보낸 현재…
"큼"
드디어 겨우겨우 비워내던 소주병에 술이 떨어졌다. 둘 다 이미 마실만큼 마셨고, 무슨 진짜 뻗을 생각 아닌
다음에야 이 이상 술을 마실 이유도 없다.
"흐음…
현민은 힐끗 주아의 시선을 살폈고, 주아는 여전히 그저 아까부터 계속 1/4만 남은 소주잔을 놓고 뻘쭘하게
저 앞 소주병 라벨의 텍스트만을 눈으로 따르는 듯 했다. 그저 이쪽의 '용단'만을 기다리는 듯한 자세.
아까만 해도 제법 시끌벅적하던 가게 안은 어느새 조용해졌고, 테이블도 주아와 자신이 앉은 테이블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비어있다. 저기 앞을 보니 아마 이 가게 역시 곧 오늘 영업을 종료할 분위기다.
'나쁘지 않네'
미묘한 초조함과 달그락 거리는 주방의 마무리 설거지 소리, 말없이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적당히 취한 여자
후배…이 기묘한 분위기 속에, 급기야는 그 고요함이 손목시계의 초침소리까지 들려주었고 이건 좀 심했다,
라고 생각한 현민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주아야"
현민의 부름에 새삼 화들짝 놀란 그녀는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네 오빠" 하고 대답했다. 현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놀래기는. 피곤하지? 일어나자"
"네, 오빠 피곤하죠? 미안해요"
"미안하긴. 니가 왜 미안해? 흐, 일어나자. 내가 계산할께"
가게를 나섰다. 싸늘한 밤공기…알딸딸을 살짝 넘어 얼큰한 취기에 사실 똑바로 걷는 것조차 조금 부담스럽다.
그런 둘은 잠시 정신 좀 차리자면서 길가의 큼지막한 대리석 블록 위에 앉았다. 반팔 차림의 주아가 조금 추워
보였던 현민은 자신의 린넨 쟈켓을 벗어 그녀를 입혀주었다. 그래봐야 전혀 따뜻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이
라도 덜 춥길 바래서였다.
"주아야"
"네 오빠"
잠시 뜸을 들이던 현민은 말했다.
"내일 뭐하냐?"
무언가 중대한 말을 할까 하던 현민은 다시 그 얼른 주제를 바꾸었다. 주아 역시 그 어색한 공기를 어찌 모르겠
냐마는 "그냥, 집에 있을 거에요. 오빠는요?" 하고 평범하게 대답했다. 현민은 "나두" 하고 대답하고는 다시 속
으로 새삼 귀찮게 됐다고 생각했다.
"일어나자. 조금 더 걸을까? 술 깰 때까지만?"
"네"
한주아. 무려 여섯살 연하의 귀염둥이 팀 막내. 원래부터 단합이 잘 되던 팀이었던데다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
훤칠한 키, 시원시원한 성격의 현민은 팀원들 사이에서도 단연 빛나는 존재였고 모두와 잘 어울렸다. 주아는
특히 그런 현민을 잘 따랐다. 현민도 자기를 많이 의지하고 싹싹하게 잘하는 주아를 또 많이 예뻐하긴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동료로서.
'그런 그녀가 오늘 고백을 했다고. 그 남녀관계 쑥맥 한주아가!'
이제껏 23살 먹도록 남자라고는 딱 한번 사귀어 본 순둥이. 뭐 생긴 것도 귀엽고 착하고, 언니 오빠들에게
싹싹하고 다 좋은데…
'아…'
지금 2팀에 가 있는 현지 대리, 구 여친인 그녀를 떠올려보면 헤어진지 두 달만에 또 사내연애라니 이거 뭐
모양새가 너무 안좋다라는 생각도 들고, 슬슬 결혼도 생각해야 될 나이에 23살짜리 여자애랑 뭘 어쩔거냐란
생각도 들고, 워낙에 다들 친한 팀 사이에 그 안에서 또 커플이 생긴다고 치면 이래저래 골치 아픈 문제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핑계일까'
사실은 '연애'를 해야한다는 사실이 부담이 되었다. 팀의 귀여운 막내로선 정말 더할나위없이 사랑스럽고
분명 종종 '얘가 나 좋아하나?'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에 대해 분에 넘치는 애정을 보여준 적 있지만
그저 친한 동생으로서 그러려니 했을 뿐… 정말로 진지하게 연애를 한다면, 아니 그게 가능이나 할까.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저 어린 애랑 잘 수 있으면 됐지 뭐 어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잖아도 굶은지 오래라…
'아 새끼야 이건 아니지'
자꾸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빠지자 고민이 가득하던 차에 현민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자세로 주아의 손을
잡았다. 주아는 또 움찔 전기라도 온 듯 놀랬지만 가만히 그대로 손을 잡고 있었다.
"주아야"
"네 오빠"
현민은 주아에게 물었다.
"너 오늘 들어가야 돼?"
가게를 나와 조금 방향감각을 잃어 반대방향, 골목쪽으로 걷다보니 모텔촌이었다. 새벽시간, 둘 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손까지 잡고 걷는 이 와중에 모텔촌을 걸으면서 그런 질문… 12시는 이미 까마득한 예전에 넘긴 이
시간에 뜬금없이.
그것도 고백에 대한 예스냐 노냐 대답도 없는 상태에서…
"… …"
주아의 대답이 없었고, 현민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지금 이미 전철은 끊겼으니까, 가야되면 택시 타고 가야 돼. 너 돈 있어? 없지. 없으면 내가 빌려줄께"
현민의 뜬금없는 말에 주아는 순간 발걸음까지 반 걸음 멈췄을 정도로 오만 생각을 다 한듯 했지만 곧 다시
살짝 희미한,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에, 아니에요. 저 돈 있어요"
"그래"
현민은 그저 혼자 피식 웃었다. 어느새 둘의 걸음은 큰 길가에 다 와있었고 텅 빈 도로였지만 저 멀리 붉은
빈 택시등을 켜고 달려오는 택시를 발견한 주아는 말했다.
"오빠 저 들어갈께요"
하지만 현민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주아야"
대답 대신 몸을 돌린 주아를 바라보면서 현민은 뒷머리를 살짝 긁적이고는 대답했다.
"너 정말 들어가려고?"
그러자 주아는 가벼운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저 멀리서 오던 택시는 빠른 속도로 그대로 둘 곁을 스쳐지나
갔고, 다시 도로는 텅 비었다. 짐작컨데 이미 새벽 4시를 넘겨 거의 4시 반은 족히 되었을 시간. 현민은 잠시
콧바람을 내쉬면서 말했다.
"결론부터 말해서, 니 고백에 대한 내 대답은 노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그저 사귀기에는
생각컨데 너무 장벽이 많아. 너 스스로도 잘 알거야"
주아는 현민의 그 말에 아주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힘없이. 하지만 현민은 다시, 그런 너무나도
피곤해보이는 기색의 그녀에게 어쩌면 아주 잔인한 요구를 해왔다.
"그런데 오늘은…너 집에 안 들어갔으면 좋겠어"
주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현민은 스스로의 찌질함과 그 병신같은 욕망을 저주했지만
뜻밖에 주아는 다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민은 무표정하게 그대로 서있었지만, 주아는 다시 현민의
손을 잡았다.
"… …"
현민은 무어라 한 마디를 할까 하다가 그대로 말을 꿀꺽 삼키고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바로 근처의 한
모텔로 들어섰다. 새벽 4시 45분, 이미 하늘은 희끄므레하게 밝아오고 있었지만 그 두 남녀의 '밤'은 지금
부터 시작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욕구와 부질없는 희망의 밤 말이다.
그로부터 또 소주 두 병을 아주 천천히 더 비우면서 몇 시간의 시간을 더 흘려보낸 현재…
"큼"
드디어 겨우겨우 비워내던 소주병에 술이 떨어졌다. 둘 다 이미 마실만큼 마셨고, 무슨 진짜 뻗을 생각 아닌
다음에야 이 이상 술을 마실 이유도 없다.
"흐음…
현민은 힐끗 주아의 시선을 살폈고, 주아는 여전히 그저 아까부터 계속 1/4만 남은 소주잔을 놓고 뻘쭘하게
저 앞 소주병 라벨의 텍스트만을 눈으로 따르는 듯 했다. 그저 이쪽의 '용단'만을 기다리는 듯한 자세.
아까만 해도 제법 시끌벅적하던 가게 안은 어느새 조용해졌고, 테이블도 주아와 자신이 앉은 테이블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비어있다. 저기 앞을 보니 아마 이 가게 역시 곧 오늘 영업을 종료할 분위기다.
'나쁘지 않네'
미묘한 초조함과 달그락 거리는 주방의 마무리 설거지 소리, 말없이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적당히 취한 여자
후배…이 기묘한 분위기 속에, 급기야는 그 고요함이 손목시계의 초침소리까지 들려주었고 이건 좀 심했다,
라고 생각한 현민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주아야"
현민의 부름에 새삼 화들짝 놀란 그녀는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네 오빠" 하고 대답했다. 현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놀래기는. 피곤하지? 일어나자"
"네, 오빠 피곤하죠? 미안해요"
"미안하긴. 니가 왜 미안해? 흐, 일어나자. 내가 계산할께"
가게를 나섰다. 싸늘한 밤공기…알딸딸을 살짝 넘어 얼큰한 취기에 사실 똑바로 걷는 것조차 조금 부담스럽다.
그런 둘은 잠시 정신 좀 차리자면서 길가의 큼지막한 대리석 블록 위에 앉았다. 반팔 차림의 주아가 조금 추워
보였던 현민은 자신의 린넨 쟈켓을 벗어 그녀를 입혀주었다. 그래봐야 전혀 따뜻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이
라도 덜 춥길 바래서였다.
"주아야"
"네 오빠"
잠시 뜸을 들이던 현민은 말했다.
"내일 뭐하냐?"
무언가 중대한 말을 할까 하던 현민은 다시 그 얼른 주제를 바꾸었다. 주아 역시 그 어색한 공기를 어찌 모르겠
냐마는 "그냥, 집에 있을 거에요. 오빠는요?" 하고 평범하게 대답했다. 현민은 "나두" 하고 대답하고는 다시 속
으로 새삼 귀찮게 됐다고 생각했다.
"일어나자. 조금 더 걸을까? 술 깰 때까지만?"
"네"
한주아. 무려 여섯살 연하의 귀염둥이 팀 막내. 원래부터 단합이 잘 되던 팀이었던데다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
훤칠한 키, 시원시원한 성격의 현민은 팀원들 사이에서도 단연 빛나는 존재였고 모두와 잘 어울렸다. 주아는
특히 그런 현민을 잘 따랐다. 현민도 자기를 많이 의지하고 싹싹하게 잘하는 주아를 또 많이 예뻐하긴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동료로서.
'그런 그녀가 오늘 고백을 했다고. 그 남녀관계 쑥맥 한주아가!'
이제껏 23살 먹도록 남자라고는 딱 한번 사귀어 본 순둥이. 뭐 생긴 것도 귀엽고 착하고, 언니 오빠들에게
싹싹하고 다 좋은데…
'아…'
지금 2팀에 가 있는 현지 대리, 구 여친인 그녀를 떠올려보면 헤어진지 두 달만에 또 사내연애라니 이거 뭐
모양새가 너무 안좋다라는 생각도 들고, 슬슬 결혼도 생각해야 될 나이에 23살짜리 여자애랑 뭘 어쩔거냐란
생각도 들고, 워낙에 다들 친한 팀 사이에 그 안에서 또 커플이 생긴다고 치면 이래저래 골치 아픈 문제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핑계일까'
사실은 '연애'를 해야한다는 사실이 부담이 되었다. 팀의 귀여운 막내로선 정말 더할나위없이 사랑스럽고
분명 종종 '얘가 나 좋아하나?'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에 대해 분에 넘치는 애정을 보여준 적 있지만
그저 친한 동생으로서 그러려니 했을 뿐… 정말로 진지하게 연애를 한다면, 아니 그게 가능이나 할까.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저 어린 애랑 잘 수 있으면 됐지 뭐 어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잖아도 굶은지 오래라…
'아 새끼야 이건 아니지'
자꾸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빠지자 고민이 가득하던 차에 현민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자세로 주아의 손을
잡았다. 주아는 또 움찔 전기라도 온 듯 놀랬지만 가만히 그대로 손을 잡고 있었다.
"주아야"
"네 오빠"
현민은 주아에게 물었다.
"너 오늘 들어가야 돼?"
가게를 나와 조금 방향감각을 잃어 반대방향, 골목쪽으로 걷다보니 모텔촌이었다. 새벽시간, 둘 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손까지 잡고 걷는 이 와중에 모텔촌을 걸으면서 그런 질문… 12시는 이미 까마득한 예전에 넘긴 이
시간에 뜬금없이.
그것도 고백에 대한 예스냐 노냐 대답도 없는 상태에서…
"… …"
주아의 대답이 없었고, 현민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지금 이미 전철은 끊겼으니까, 가야되면 택시 타고 가야 돼. 너 돈 있어? 없지. 없으면 내가 빌려줄께"
현민의 뜬금없는 말에 주아는 순간 발걸음까지 반 걸음 멈췄을 정도로 오만 생각을 다 한듯 했지만 곧 다시
살짝 희미한,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에, 아니에요. 저 돈 있어요"
"그래"
현민은 그저 혼자 피식 웃었다. 어느새 둘의 걸음은 큰 길가에 다 와있었고 텅 빈 도로였지만 저 멀리 붉은
빈 택시등을 켜고 달려오는 택시를 발견한 주아는 말했다.
"오빠 저 들어갈께요"
하지만 현민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주아야"
대답 대신 몸을 돌린 주아를 바라보면서 현민은 뒷머리를 살짝 긁적이고는 대답했다.
"너 정말 들어가려고?"
그러자 주아는 가벼운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저 멀리서 오던 택시는 빠른 속도로 그대로 둘 곁을 스쳐지나
갔고, 다시 도로는 텅 비었다. 짐작컨데 이미 새벽 4시를 넘겨 거의 4시 반은 족히 되었을 시간. 현민은 잠시
콧바람을 내쉬면서 말했다.
"결론부터 말해서, 니 고백에 대한 내 대답은 노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그저 사귀기에는
생각컨데 너무 장벽이 많아. 너 스스로도 잘 알거야"
주아는 현민의 그 말에 아주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힘없이. 하지만 현민은 다시, 그런 너무나도
피곤해보이는 기색의 그녀에게 어쩌면 아주 잔인한 요구를 해왔다.
"그런데 오늘은…너 집에 안 들어갔으면 좋겠어"
주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현민은 스스로의 찌질함과 그 병신같은 욕망을 저주했지만
뜻밖에 주아는 다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민은 무표정하게 그대로 서있었지만, 주아는 다시 현민의
손을 잡았다.
"… …"
현민은 무어라 한 마디를 할까 하다가 그대로 말을 꿀꺽 삼키고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바로 근처의 한
모텔로 들어섰다. 새벽 4시 45분, 이미 하늘은 희끄므레하게 밝아오고 있었지만 그 두 남녀의 '밤'은 지금
부터 시작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욕구와 부질없는 희망의 밤 말이다.